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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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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막 14:1-9)


어느 날, 캐나다에서 백인 교회당을 빌려 예배드리는 한 한인 이민교회가 지역의 한인 노인들을 위한 노인회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때 한인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 준비를 하고 백인교회 목사님에게 성경 봉독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소통이 잘못되어서 백인 목사님이 성경 봉독을 한 후에 그냥 설교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통역을 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목사님이 고민하는데 마음속에 이런 확신이 왔습니다.  "네가 준비한 설교를 그냥 전하거라."

통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배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 목사님이 설교하면 목사님은 통역하는 척 하면서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후에 어르신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예배당을 나서는데 갑자기 문 앞에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유학생이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네가 여기에 왠 일이냐?"  이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배짱이 대단하시던데요."

숨긴 것은 언젠가 드러납니다.  충성도 고난의 시험을 당해봐야 그 진위가 드러납니다.  사랑도 정말로 어려울 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생명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기입니다.  사랑이 들어가면 생기가 일어납니다.  사랑은 산소입니다.  산소만 호흡하면 다 삽니다.  사랑은 접촉입니다.  사랑으로 정복하지 못할 것은 이 땅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끝없이 힘을 얻는 곳도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절대 사랑에 정복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생포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힘입고 다시 인생을 힘차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십시오.

지금 여기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사랑을 보이는 일이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우리 속에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터뜨리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사랑을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마음껏 나누어보십시오.  랑이 멈춘 곳에는 분노와 정죄만 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는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분노 때문에 가로막힌 행복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손해가 많습니까?  순간의 분 냄으로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으로만 바라보아야 했던 모세를 기억하십시오.  모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그였지만 순간의 분 냄으로 그는 평생 꿈꾸고 기대했던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을 버리라."  이 시간 모든 분노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분을 내면 파괴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분을 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로 정지된 삶에 하나님의 사랑의 활력을 집어넣으십시오.  모든 생명의 시작은 사랑입니다.  치유가 시작되는 것도 사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집에서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치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동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잘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언제나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행동을 보고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있게 한 나의 믿음을 보고 감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을 하셨지, "네 행동이 거룩하고 위대하다."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언제나 그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행동을 있게 하지만 믿음 없는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한다면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헌신으로 응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명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이 가까운 시각에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잡아죽일 음모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전역에서 심지어는 해외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에 이백만에서 삼백만명의 인파가 예루살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난하고, 소외당한 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슈퍼 스타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삶의 소망이었고, 능력이었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를 잡아 버리면 혹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한 나머지 그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로 예루살렘이 잔치 분위기로 떠들썩한 그 순간에 예루살렘의 한 구석에서는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각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 사건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몬은 누구일까?  학자들이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소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아마도 이 사람은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적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이 별명이 따라 다닙니다.  "나병환자 시몬".  그러니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를 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내용과 똑같은 기사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 잔치에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과 이들 형제들이 같은 베다니 마을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고 삶이 변한 가정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 여인은 마리아라고 그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마리아가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오더니 그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유는 마침내 예수님의 발등까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흥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그리고 계속해서 5절의 말씀을 보면, 그 향유를 삽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면서 그 여자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렇게 비난하고 책망하는데 앞장 섰던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였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 여인을 향해 비난하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괜히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이 사람의 말이 옳습니다.  당시에 노동자가 하루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년 품삯에 해당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 엄청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겠느냐?  왜 괜히 쓸데없이 낭비를 하느냐?

아주 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이고 설득력 있는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전혀 유다의 편을 들거나 이 사람들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분명히 이 여자의 행위는 낭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여자의 편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우리말 성경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과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 보면 "아름다운 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매우 역설적인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낭비다.  그리고 칭찬하셨습니다.

칭찬하신 아름다운 낭비, 낭비는 분명히 죄악인데 어째서 이것을 아름답다고 칭찬하셨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런 낭비의 죄악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오히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첫째, 이 여인의 행동에는 아름다운 동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의 행동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산을 초월한 사랑의 동기.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 계산을 초월합니다.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사랑에 빠져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그 시간을 낭비로 생각하는 연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사랑에 빠져 있다면 하루 밤을 지새워도 모자라는 시간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시간을 결코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어떤 돈도 그것을 허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사랑에 빠져 버리면 사람이 어떤 맹목적인 인간이 되는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상식을 초월한다, 계산도 초월한다.

유다의 비판은 피상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것은 상당히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보통 액수입니까?  이 옥합 속에 들어있는 향유, 인도산 향유 나드, 그 당시에 가장 고급 향유였습니다.  그 값이 자그마치 삼백 데나리오입니다.  노동자의 일년 품삯입니다.

여러분의 일 년 월급을 계산해 보십시오.  결코 적지 않은 헌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 금액은 문제가 아닙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 사실을 비판하고 있었던 가룟 유다의 숨겨져 있는 동기를 주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는 도둑이다."  겉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단어를 쓰고, 가장 사회 정의에 민감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흔히 남들의 헌신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에게도 그 헌신이 요구될까봐,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헌신을 비판합니다.  그것이 유다의 동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는 도둑놈이다."

그런데 사랑하면 이 모든 계산은 초월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을 서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아주 그럴듯한 아름다운 상식으로 포장된 말,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인 말을 하고 설득력 있는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Nothing!  그것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설득할 수 있는 그런 합리적 지식을 갖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내가 순교를 한다 할지라도, 내가 수 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해도 사랑의 동기가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은 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으로 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마음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동기, 사랑의 동기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아름다운 동기, 그래서 정말로 사랑하면 낭비도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낭비는 아름다운 헌신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의 헌신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녀가 아름다운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녀는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를 붙잡을 줄 알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 앞에서 사랑이 담긴 헌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이 마지막 기회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증거를 본문에서 볼 수가 있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인정을 하셨습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미리 알고 준비한 것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요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그 분 앞에 마지막 가슴 가득 찬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것은 성령의 인도였다.  다만 이 여인은 그 성령의 인도 앞에 민감했고, 순종했을 따름이다.  저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객관적인 정황적 증거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늘 제자들에게 장차 오실 죽음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 말을 심각하게 들은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재미있는 것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해 보면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같이 있는 현장을 보면 마르다는 항상 서 있습니다.  항상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항상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그 말씀이 희망이었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근거였습니다.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을 걸고 항상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여인, 그래서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을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주님께서 부쩍 죽으심에 대해서 예언을 하셨는데 아마 그 때가 가까운 모양이다.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어떤 준비를 주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분이 떠나가시기 전에 다시 없을 기회에 내 사랑을 표현하겠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면 그 앞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무엇인가를 여한 없이 할 수가 있다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봉사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헌신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사랑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 보면 차차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신하라고 하면 차차 헌신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봉사하라 하면 차차 봉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활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옥이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차차 봉사하겠다, 차차 헌신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차차!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옛날 희랍의 시라큐스라는 거리에는 아주 재미있는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어깨에만 날개가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도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앞머리는 수풀처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입니다.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리스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왜 그대는 날개를 발에도 달고 있는가?  빨리 빨리 빨리 날아다니기 위하여.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할 수 있는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내 마음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 여인은 마지막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의 헌신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인의 행위가 아름다웠던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장롱 속에 고이 감추어두었던 향유가 담긴 옥합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결혼 준비를 위해서 고이 간직해두었던 옥합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옥합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옥합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립니다.

옥합을 깨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옥합을 위의 뚜껑만 살짝 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부어도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아름다운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좋은 헌신이었을 것입니다.  혹은 그 뚜껑을 열고 향유를 다 쏟아 붓고 그 옥합을 다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마지막으로 영원한 기회가 되기 위하여 그 옥합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옥합의 모가지를 깨뜨립니다.  그러면 다시는 옥합으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분에게만 드려지기 위하여 옥합을 깨버린 것입니다.  오직 이 분에게!  그것은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마리아의 헌신은 부분적인 헌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전 존재를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힘을 다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체를 바치는 최선의 헌신이었습니다.  '힘을 다하여' 바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이렇게 힘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할 수가 있었던 동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의 간까지 빼주면서도 기뻐하게 만듭니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주의 전을 위해 내 힘을 다해 드렸다고 기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드리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헌신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의 헌신과 섬김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더러는 가룟 유다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그런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만을 의식합니다.  사랑하면 받아서 기쁘기 보다 줌으로써 기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나병환자 시몬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당시에 천형이라고 불리는 나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니라 시몬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나음을 받은 사실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나병환자 시몬처럼 모든 헌신과 섬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자신의 이름만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룟 유다처럼 소위 약한 자들을 향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둑놈입니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정죄를 합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자격지심과 질투심을 정당화하려고 헌신하는 사람을 깎아 내리려는 것입니다.  가장 의인인척 하지만 실상은 도둑놈입니다.

마지막으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을 절대적 가치로 보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 안에서는 헌신이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헌신이 낭비로 보이고 아깝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가 등골이 휘도록 자녀를 위해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주판알을 튕기면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자신의 헌신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의 헌신은 바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아름다운 고백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여러분이 깨뜨려야만 할 여러분의 옥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이가 어리고, 신앙이 어릴 때에는 받는 것이 행복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신앙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낭비로 인하여 행복해 합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이 여인과 같은 사랑의 낭비가 역사를 일으킵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 엄청난 로마의 핍박을 이기고 로마를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까?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초대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를 완료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면 기적적인 힘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모습에서는 결코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들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나눌 물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은 얻으려고 나부대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애태우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을 느끼듯이 성도는 사랑의 낭비를 통해 더욱 행복해집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과 이기주의로 희생도 없이 최소한의 종교 행사로 체면을 차렸던 바리새인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름 없는 죄인이었지만 주님이 칭찬했던 본문의 마리아처럼 사랑의 거룩한 낭비를 통해 이 땅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하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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