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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이 많은 사람의 비밀 (눅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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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은 사람의 비밀 (눅 1:5-25)

여행을 해 보면 압니다. 세 배는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사십년이 걸렸는지 이해가 됩니다. 처자식을 데리고 대가족이 가축까지 거느리고 그 먼 길을 가는데 사십년이 걸린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린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애당초 같이 갈 것이 아니라면 뭣 하러 갑니까. 나 혼자 즐기기 위해서 가나안땅에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과 미래를 위해서 가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오래 걸리더라고 함께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치가 좋은 곳을 여행할 때 혼자 여행하는 것처럼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경치가 좋을수록,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게 아니고 혼자 가는 길이라면 아름답고 경치가 좋을수록 나의 고독함이 더 강조되는 것입니다. 

홀로 걸은 분들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입니다. 예수님은 남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딸린 가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셨고 자식도 없으셨고 당신의 부모와 형제를 버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집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고 세상의 좋은 것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정말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선교여행을 다녔지요. 성경 뒤에 보면 바울의 선교여행을 보여주는 지도가 나와 있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성경책을 보고 왜 그 많은 지도 중에 바울의 선교여행을 보여주는 지도가 있을까 늘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바울이 유럽 전체를 네 번 정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것도 걸어서. 일평생 돌아다녔다는 얘기입니다. 오로지 복음만을 위하여. 그것은 바울이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에게 가족이 딸리면 그런 삶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뭣 하러 결혼을 하고 뭣 하러 자식을 낳겠습니까. 혼자 살지. 자식에게 아비 역할도 해주지 못 할 텐데 가족이 딸리면 살 궁리를 해야됩니다. 의료보험 내야 되고 부모님 노후보장을 해 드려야 되고 자녀 교육을 시켜야 되고 등등 이런 염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아버지와 남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의 가르침은 별로 신뢰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형편을 모르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경건, 현실적인 경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경건은 우리가 흉내 내기가 불가능합니다. 

요즘 특별새벽집회를 하는 교회들이 유행인데 어떤 교회는 특별새벽집회에 본당에 들어가기 위하여 새벽 두시에 교회에 도착한다고 하지요. 전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뭣 하러 자느냐. 그냥 깨 있지. 깨어 있다가 가지 어떻게 몇 시에 자서 두시에 일어난다는 얘기입니까. 그런 식으로 며칠을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일평생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고 며칠 하다가 그만둘 것이라면 경건의 모델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몇 번하고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것이라면 그건 우리가 일평생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경건의 모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어르신인 어느 한 목사님이 일평생 통장 하나 없이 사셨다고 하지요. 정말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목사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통장이 없으면 신용카드를 어떻게 만들 것이며, 세금을 어떻게 낼 것이며, 해외여행을 어떻게 할 것이며, 일반 교인들이 매달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는 애환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너무 비슷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다른 것도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와 대학을 같이 졸업한 동급생들 중에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두세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천 이백중에 두세 명이 목회자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학생들이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일단 성공의 가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을 사야 되고, 차를 사야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되고, 그렇게 하게 되면 이자 내야죠, 모기지 내야죠, 아이들 교육비 내야죠, 수준에 맞는 레저 활동 해야죠, 한번 그 길에 들어서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입맛이 한번 올라가면 낮아질 수 없습니다. 

제가 목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월가의 잘나가는 직장에 취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빚이 없었기 때문이고 아직 입맛이 높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이 일을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나중이라는 것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나중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제가 대학원 다닐 때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에 논합시다.’라는 말이 입에 벤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 교수님인데 침을 튀면서 강의를 하다가 어떤 주제가 떠오르면 ‘다음 기회에 논하도록 합시다.’ 그러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수업인데도 ‘다음 기회에 논하도록 합시다.’ 그러다가 우스운지 혼자 웃더라구요. 다음 기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에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 중요한 장면이나 중요한 대사는 지금 보고 기억해야지 ‘저거 다음에 DVD빌려서 다시 봐야지.’ 다음 기회 오지 않습니다. 다음에 보더라도 감흥이 오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을 때 재미있는 기사, 중요한 기사가 있으면 지금 읽고 기억을 해야지 ‘그 기사가 뭐더라?’ 인터넷을 찾으면 늦습니다. 스크랩을 하더라도 스크랩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금 집중해서 지금 읽는 것을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두 눈을 크게 뜨고 지금 보고 마음속에 담아두어야지 사진 찍느라고 바쁘면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그렇다고 나중에 사진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여행을 가면서 느낀 것이 도대체 제 눈으로 경치를 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봅니다. 찍느라고 바쁘기 때문에. 그래서 정작 제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이가 먹어갈수록 다음 기회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듭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경험을 쌓지요. 그런데 그 경험을 이용할 다음 기회가 옵니까. 자식은 이미 다 자랐는데 누구한테 그 경험을 쓰겠습니까. 그 경험을 이용하기 위해서 아이를 또 낳겠습니까. 또 젊었을 때는 ‘내가 나이가 들면 내 소득이 많아지겠지.’라고 기대를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장차 내 소득이 더 많아질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가 회고록을 써서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가 들어서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은 적습니다.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 할 수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에요. 

또 나이가 들수록 신앙적 영웅담의 가능성도 줄어듭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이긴 것은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지, 그가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한 영웅담을 보여줬다는 성경구절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단기선교 · 비전트립 이런 것도 젊었을 때 가능하지요. 나이가 들어서 어느 정글에 들어가서 텐트치고 거기에서 머무는 거, 이거 여러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젊었을 때는 텐트를 치고 하는 여름수련회를 자주 다니면서 설교를 했는데 지금은 오라고 부탁을 해도 못 갈 겁니다. 지금 이 나이에 텐트에서 자고 설교하고……. 해야 된다면 하겠지만 아마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실질적인 경건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하냐. 오늘 본문을 읽는 이유가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부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미혼이신 분, 사별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예외는 늘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가 중요합니다. 그 반대를 주장하는 분들은 농담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수많은 농담,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천사가 사가랴의 이름을 말하면서 아내 엘리사벳의 이름을 같이 말하는 것을 보세요. ‘사가랴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거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두 사람이라고 사가랴의 엘리사벳을 한 단위로 묶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라고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계획하신 것은 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13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협조를 해 주어야 남편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엘리사벳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가랴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두 사람이 마음을 합쳐서 협조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도리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를 귀중히 여기고 서로 의지해야 됩니다. 

둘째로 나이가 들수록 더 분명한 경건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6절에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젊은 사람은 신앙이 있더라도 바쁘고 신경 써야 될 일이 많고 남자는 직장일로 여자는 아이 키우는 일로 바쁘기 때문에 경건의 삶을 제대로 살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가지치기가 저절로 되기 때문에 덜 바쁘고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부각되는 것입니다. 평균수명이 점점 길어진다고 하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무엇을 하면서 살겠습니까. 결국은 경건에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여행 · 레저 다 좋아요. 그러나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경건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바쁘기라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 무슨 이유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경건의 삶을 사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내 생전에 다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데 인생은 짧고 신앙은 깁니다. 그러므로 내 살아생전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미처 다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됩니다. 다윗이 살아생전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전이 세워질 수가 있었던 것이고 모세는 살아생전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세대에 가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살아생전 스페인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스페인뿐만 아니라 더 멀리 있는 지역까지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느냐.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사가 말하기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이 일을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친히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세대인 요한의 세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같은 경건한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를 배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한 야망입니다. 신앙적인 야망입니다. 사가랴가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그랬더니 가브리엘이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니라’ 사가랴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됐어요. 놀라운 약속을 받았지만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우리 마음속에 비밀로 남겨진다는 뜻도 됩니다. 

사가랴가 말을 한들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를 납득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의 일은 비밀과도 같습니다. 영적인 일은 비밀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가랴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침묵하면서 기다렸어요. 이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이 된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비밀을 가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영적인 면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깊은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는데 깊다는 말은 비밀스럽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신이 쉽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것입니다. 영적인 비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를 소유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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