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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함께 세워져가는 교회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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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세워져가는 교회 (엡 2:19-22)
  

비행기가 비행할 때에 ‘마의 11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비행 중의 가장 위험한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륙할 때의 3분, 착륙을 할 때의 8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 항공 사고의 74%가 마의 11분에 발생한다는 통계를 보아도 이때가 가장 위험한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을 빌면 '비행기가 이륙하자면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행기에 달려 있는 엔진 모두가 불을 붙여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작은 불꽃 하나만 스파크를 일으켜도 폭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챌렌지호 폭발사건이나 종종 보도되는 이륙시 비행기 폭발사고는 모두 이런 연유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비행기를 아는 사람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최초의 3분에 가장 많이 긴장을 한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비행기의 모든 엔진이 불이 붙어야하고, 2만4000내지 4만 피트 상공에 이르러 고도를 잡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엔진을 분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침체에서 부흥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엔진에 불을 붙여야하고 고도를 잡을 때까지 그 조건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이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흥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한 개의 엔진에만 불을 붙이고 이륙을 하다가 여러 장벽에 부딪혀 아예 모든 엔진에 불을 붙일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행기를 몰고 활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동차보다 더 불편한 모습이 되 버리고 맙니다. 비행기의 용도는 하늘을 나는데 있지 지상을 맴도는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정복하도록 되어있지 세상의 눈치를 살피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다음 주면 43주년을 맞게 됩니다. 참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나님이 ‘기뻐하나’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저는 이번 우리 창립 43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여기서 안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비전의 날개를 펴서 주께서 주신 귀한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할 것인가를 분명히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도 당신의 관심이 하나 있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거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핏값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신다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얼마나 더 교회를 사랑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 이런 소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 이 교회를 그처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면 나도 한 생을 살 동안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지. 좋은 교회 에 다니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지.“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이요, 또 여러분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은 사데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아주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에 몸담고 싶어 하겠어요? 평생 고생하면서, 그런 교회 누가 다니겠습니까? 이왕 다니려면 빌라델비아나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고 그런 교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헌신해보고 싶어 하는 것 이 우리의 소원이요 심정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성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냐는 우리가 몰라요, 주님이 평가하시겠지만 동성교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 교회를 좋은 교회 만들어야 내가 삽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함께하는 신앙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권속’은 그 의미가 가족과는 약간 다릅니다. 가족은 아버지, 엄마, 형, 누나, 동생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데, 권속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 즉 머슴으로부터 노예까지도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짝하여 살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권속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제 각각 성격이 다르고, 출신지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만드시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권속이란다. 함께 사는 공동체야!” 교회는 문턱이 없어야 합니다. 지방색, 계층간의 벽, 세대간의 갈등이 없는 함께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엡3:6절을 보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여기 6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지 않습니까?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라는 이 말은 교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에 불과한 것 같은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은 함께 하면 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함께 하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함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건강한 교회는 터가 견고한 교회여야 합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신약성경,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은 성경말씀위에 굳건히 서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말씀의 기초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터가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맙니다. 

지난번 중국 쓰촨성의 지진과 아이티의 지진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버렸고 남아있는 것이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져 버린 것과 함께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무너진 땅 속에 다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미래마져도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상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사라져버리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땅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터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흔들리면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리위에 바로 서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 역시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바로서서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를 늘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 초대교회 예수 믿어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된 사람들은 신앙고백이 확실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만 예수 믿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고백 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에서 결코 복음을 위해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신앙의 색깔이 분명했습니다. 신앙의 고백의 터가 튼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말 가운데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어로는 ‘붉다’라는 단어가 red라는 단어 하나를 쓰는데 우리나라에는 붉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붉다. 검붉다. 불그스름하다. 불그니 죽죽하다. 불구치치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열 개 이상도 있습니다. 붉다라는 단어 찾아보면 열 개 이상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게 붉으면 붉은 것이지 표현이 다양하기 때문에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뭐 그렇게 좋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언어가 풍성하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정확하지 않은 어떤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붉어야 되는데 예수의 보혈로 붉어야 하는데 불그스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붉어야 하는데 뭔가 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붉으티티하고 불그스름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색깔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이 와서 마구잡이로 성도들의 영혼을 훔쳐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절대가치와 절대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모호하게 만들고 진리를 거부합니다. 왜 지금 교회가 안팎으로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이 양보 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 타 종교는 우리를 편협 된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회 여론도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이 진리의 터를 포기하는 교회가 자꾸 생기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 4월 초팔일을 축하한다고 명동 성당에서 중을 불러다가 아베마리아 노래를 불렀고 이것을 방송 매체가 앞 다투어 보도합니다. 종교간의 화합, 진정한 평화의 합창... 

지난번에도 청주 어느 교회에 새로 예배당을 지어 입당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화합 차원으로 성가대를 불교의 중들이 와서 해 주었고 천주교의 사제단이 와서 순서를 맡았는데 그 때 찬양대가 부른 노래가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때 신문이나 방송은 얼마나 이 상황에 대해서 종교 간의 화합을 이야기했고, 그 교회를 칭찬을 했는지 모릅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닙니까?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진리의 터 위에 바로 서서 오직 구원자 이신 예수를 붙잡고 세상을 향해 거짓과 이단에 빠진 영혼들을 주 앞에 나오게 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3. 건강한 교회는 성장해야 됩니다. (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자라나야합니다. 믿음이 자라야 되고 인격이 자라야 됩니다. 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발육부진의 자녀를 둔 가정에 둔 부모는 얼마나 고통이 큽니까? 발육이 멈춰버린 교인들만 그득한 교회에 가 보세요. 기도하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로부터 어린이까지 계속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처음에는 다 잘 자랐습니다. 처음엔 양질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목회자도 병들고 자라기를 멈춰버리고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도 다 배가 불러 성장을 멈춰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가 안 나오나, 버가모나 두아디라교회처럼 세속화를 받아들여 문란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자기 쾌락을 즐기는데 정신이 팔린 성도들만 득실 득실거리는 교회가 되버리지 않나, 또 영적으로 죽어버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배가 불러 자만하며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열심히 다 식어버려서 주님이 보실 때는 다 토해내고 싶은 역겨운 교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장이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나는 주님이 서 계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성장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합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리만리라도 달려갈 만큼 갈급한 심령이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쳐서 날마다 복종시킵니까? 아예 그런 노력 안하면 문제가 일어나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내가 성장하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성장해야 발전하게 됩니다. 성장이 멈추면 그때부터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노화를 방지해야 합니다. 노화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노화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속이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면 늙게 되어 있습니다. 또 정신적 노화입니다. 정신도 늙어갑니다. 아이 때는 마음이 맑고 정신도 맑고 생각도 신선합니다. 뭔가 창의가 일어나고 모험에 대해 절대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쇠퇴하면 자꾸 안주하려고 합니다. 내가 힘들고 부담되는 것은 안할려고 합니다. 

또 영혼의 노화도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육신적으로 태어나지만 동시에 영적으로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느 날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내 영혼은 주님과 긴밀하게 교통을 성장을 발전을 확장을 깊어짐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영적으로 거듭나고 나면 영적 성장도 멈추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내 영혼이 성장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성장 세포가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내 영혼 안에서 영적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으며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장14절).” 

영혼의 노화가 시작되면 사람들을 슬프고 힘들게 하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내안에서 영적 성장이 멈추는 순간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시야가 멈추어지고 남을 쳐다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남의 부족한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내 눈의 티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티가 눈에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남의 흠이 크게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내 신앙의 영적성장이 멈추고 남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 나는 늙어가는 것입니다. 영적 노화가 촉진되는 순간입니다. 그 노화현상이 중증에 도달하게 되면 눈의 초점이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서 주변만 보게 되고 심판하고 지적하고 흉을 보게 됩니다. 그 상태가 이미 바리새인이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예수께서 가장 강하게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은 생명력을 잃고 형식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43주년을 맞으면서 이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앞으로의 대안이 무엇입니까? 참 신앙은 생명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교회는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라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교회는 43주년 창립을 준비하면서 저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동성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부흥의 진원지가 되고, 온갖 퇴폐로 무너져가는 한국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생수의 발원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올해 표어처럼 회복과 열정으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로 힘차게 나아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누구나 동성 교회에 오기만하면 은혜를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사야처럼 불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으로 “믿음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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