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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살렐, 오홀리압 (출 35:3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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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살렐, 오홀리압 (출 35:30-36: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지식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내어, 그 생각해 낸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물리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와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술을 넘치도록 주시어, 온갖 조각하는 일과 도안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시고,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로 수를 놓아 짜는 일과 같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시고, 여러 가지를 고안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주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 가장 큰 은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새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으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족끼리 벌인 전쟁,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아픔과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온 국민의 힘으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시리아의 북부 도시 훌라(Houla)입니다. 지난 25일에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의 폭력단체인 ‘샤비하Shabiha’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샤비하는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여린 생명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의 보복이 예고되고 있기에 그 땅에서는 더 큰 학살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무저갱이 열린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그 잔학한 시대에 대한 증언자로 살았던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탐욕과 광기에 맞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맞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갑니다.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은 악한 영의 주술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든든함이 찾아듭니다.

• 교회의 근본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제2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소식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40:9c)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52:7c).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아무리 막강하게 보여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견 든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십니까?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벨론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하나님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저는 오승윤 화백의 전시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오방색(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뜻하는 청백적흑황색)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로 알려진 그는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은 모두 ‘산 그림’이었는데, 화가가 100개의 산에 오르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초기의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변화하는 산 빛과 형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화가는 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골격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핵심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교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결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열린 태도야말로 교회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교회는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11장)고 했습니다.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모인다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교회라는 수레는 구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빈 데 없이 내 이익, 내 견해, 내 계획으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이웃과의 평화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 성막 짓기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지었던 성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압제의 땅인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핏줄이나 지역에 뿌리를 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야 할 미래의 비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비전은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지향해야 할 비전이 없다면 삶은 무기력하거나 권태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아주 조금 진보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습니다. 비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퇴색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새롭게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억압과 착취와 비인간화의 땅인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백성임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했습니다.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봉헌한 헌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것을 내주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건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과 재능까지도 바쳤습니다. 

몇 해 전 여수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교회를 둘러보며 참 놀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 교회를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몸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면 아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교회에 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남성 교우들이 찾아와 늦도록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 땀 흘림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기술, 하나님의 선물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입니다. 어쩌면 출애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들의 그 숙련된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31) 그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홀리압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는데, 특히 그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막과 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들은 이전의 노동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레테aretē입니다. 주로 인간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따라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건강의 아레테, 아름다움의 아레테, 운동 능력의 아레테, 기술의 아레테를 성취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ē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데, 이 단어는 신의 활동에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테크네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는 빼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아레테 혹은 테크네가 인간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서 유래한 탁월함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감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2:7).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라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교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우리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가 다소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돈’의 지배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깨어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이들이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삶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살 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기쁘게 수행하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평화의 일꾼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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