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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과 역경 (요 6: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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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역경 (요 6:16-21)


사람들은 제각기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픔을 어떻게 다스리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은 인생이다. 인생에 고통이 없으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을 것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간질병과 사형수로서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을 다스려 나갔습니다. ‘어린 왕자’를 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도 귀족 가문의 꼬리표 때문에 위대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공군 제대 후 평생을 대기 발령으로 살아야 했던 절망감이었습니다. 고통은 삶을 포기하라고 오는 게 아닙니다. 격렬한 파도와 태풍은 물고기들에게 산소와 좋은 먹이를 제공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고난을 도약의 기회로 삼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그 역경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시그널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복입니다.

룻은 화목한 가정의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몇 년 사이에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 그리고 남편까지 집안의 남정네들이 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가정에는 과부가 된 고부들만 남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 형편이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터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인 며느리들이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간들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 너무도 며느리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고자 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자기 나라에 남아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앞날이 불투명한 가나안 땅 베들레헴보다 자기 고향에서가 새 삶을 시작하기가 훨씬 좋을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뒤쫓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함께 룻은 베들레헴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하나님 신앙으로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가난합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자기 나라에서 힘든 일 하나 해 본적이 없을 그녀가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서 보리밭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것도 추수꾼들이 흘린 이삭을 줍는 일입니다. 

그나마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도 아닙니다. 보리 밀 추수가 끝나면 그 뒤에는 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한 결과가 이겁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겠다고 하며 시어머니를 따라 외국까지 온 이 여인의 길이 활짝 열려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다 평탄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요? 한데 결쿠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 쉬는 시간 외에는 강행군의 연속입니다. 그러면 추수가 끝난 다음에는 무슨 대책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날에 가서 고민해야 할 일이고 지금은 당잔 추수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야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그 일을 통해 지극 정성 어머니를 봉양하며 하나님 신앙을 지킨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고 그 결과 그녀는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 그 결과 룻은 이름은 자랑스럽게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에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은 99도까지는 액체지만 100도가 되어야 비로소 기체가 됩니다. 반대로 1도까지는 액체지만 0도가 되어야 고체가 됩니다. 변화에는 일정한 시간과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완성은 순식간입니다. 마지막 1도를 기다리지 못해 완성을 못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종들이 마지막 여섯 번째 돌항아리의 아귀까지 물을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중간에 조금씩 달라지는 조짐이 가끔 보였더라면 얼마나 이해하기 쉬웠을까요. 

만일 두 번째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 저 바닥 밑에서부터 포도주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면 좀 더 쉽게 순종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일의 완성은 그렇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물을 채우는 듯 보였지만, 그들은 순종과 인내를 하며 마지막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우며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채워야 할 것은 순종과 인내입니다.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사실 조금 배가 고타서 그렇지 한두 끼 굶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는 것뿐이지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으니 그냥 참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어땠을까요? 엄연히 자기가 먹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싸주신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기에 더 배가 고프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참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먹거리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가뜩이나 배가 고플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먼저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병이어의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는 배가 부른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그 마음이 더욱 벅찼을 것입니다. 그 오병이어의 역사에 자기가 작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이에게는 전부지만 어른이신 예수님에게는 보잘 것이 없을 수도 있었을 오병이어입니다. 하지만 아이로서는 배고픔을 참고 드린 결단입니다. 

보리빵을 먹을 정도니 그 집안이 결코 넉넉한 집안이 아닙니다.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픔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압니다. 그래도 어른이라면 모를까 아이가 그 누구보다도 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내드린 오병이어는 사실은 그 아이의 생명입니다. 누가 드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건 이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재물보다 주님을 더 아꼈고 자기보다는 주님을 더 아꼈기에 드린 결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우리가 주님에게 드리는 예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아리지 말고 드리라고 했고 자원해서 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전 예물함에 드린 과부의 두 렙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부로서는 하루를 굶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드렸고 이에 주님이 칭찬을 하시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역사는 거기에 모인 무리들의 마음에 주님이야 말로 메시야라고 하는 확고한 마음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 메시야라면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들이 무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이 서둘러 무리들을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에게도 빨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는 산 위로 올라가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관심을 세상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칭찬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 주님의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생명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주님이 잘 아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여기도 적용이 됩니다. 생명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소를 잡고 양을 잡아 그 생명으로 대신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대신하려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쉬운 길로 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생명은 주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 보혈이 우리 영혼에 뿌려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돌려보내십니다. 제자들을 배타고 떠나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순종한 제자들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 큰 풍랑이 닥쳐옵니다. 어떻게든지 그 풍랑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수고도 헛되이 바다 한 가운데서 새벽까지 풍랑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라고 하실 때 풍랑이 있을 것을 알고도 가라고 하신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가도록 하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혹 있습니다. 

풍랑이 있을 것을 몰라서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하셨다면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 하나고 알고서도 가라고 하셨다면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고 그런 주님이 어떻게 사랑의 주님이 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길이요 험한 길이라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어찌됐든 그렇다면 주님이 풍랑이 올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바다 가운데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 고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죽음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몇 시간째 바다에서 고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보통 때 같으면 두세 시간이면 건너갔을 호수인데 이날따라 풍랑이 일어나 그만 바다 한 가운데 오도가도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점점 지쳐만 갑니다. 죽음의 공포가 물려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바다에서 애쓰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저들을 지켜 주 도록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윽고 예수님은 밤 사경쯤 우리네 시간으로 새벽 네시쯤 되어 직접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물론 산 위에서 명령하여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풍랑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생을 하게끔 두었습니까?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이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제자들로서는 절망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누가 자기들을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전에도 예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너다 풍랑이 일어 어려움을 겪었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기에 주님만 깨우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배에 계시지 않습니다. 누구도 자기들을 도울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십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을 위해서 물 위로 걸어오실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주님이 물 위로 걸어서 자기들에게로 오시니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반갑게 맞이했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귀신인줄 알고 소리를 지릅니다. 가뜩이나 파도가 휘몰아쳐서 죽을 지경인데 이젠 귀신까지 나타나니 어쩌란 말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이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풍랑 속의 작은 배처럼 위태로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딴 짓을 하고 다니다가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정말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자 몸부림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더미 같은 파도가 몰려올 때 자칫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그런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결코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산 위에 올라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눈동자와 같이 살피시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 물 위로 걸어서 새벽같이 파도로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찾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코 혼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0:13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딪히고 있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한 가지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건 하나님이 눈동자와 같이 나를 지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주 예수께서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하십니다. 

사 44:2은 우리를 도와 줄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때에 오히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순종하는데 어려움이 있느냐 하면 바로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언제 깨닫게 되느냐 하면 이런 고난의 때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듯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지켜주시고 어떻게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셨는가를 광야 길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영화에 보면, 한 사병이 일선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전쟁으로 지친 피곤을 풀고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나눌 것을 생각할 때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격으로 건물은 다 파괴되었고 가족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선에서 남의 생명을 죽이기도 했고, 남의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해 버린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으며, 전쟁으로 지금까지 자기가 믿고 있던 모든 질서와 가치와 도덕이 와해돼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어느 날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옛 스승 풀만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아직도 우리가 믿을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교수는 “아무렴 남아있고 말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병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풀만 교수는 엄숙한 태도로 “그것은 하나님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아직도 신을 믿습니까?”라고 묻자 “이러한 위기와 부조리에 처해 있기 때문에 더 믿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의 때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절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십시오. 캄캄한 밤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은 귀신인가 싶어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절망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전혀 염려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염려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는 염려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염려를 붙들고 있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내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땀을 흘린 만큼 거둡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둡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려를 심지 말아야 합니다. 민 14:20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염려하고 좌절하는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들려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때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 믿음의 간구를 드림으로 약속하신 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1980년 인양될 때까지 스페인의 군함 ‘아토차’ 호는 358년 동안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1622년 9월, 아토차 호는 멕시코 만을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 플로리다 근처에서 침몰했던 것입니다. 배의 잔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부력 조정용 모래주머니 속에서 358년 전 함께 섞여 들어갔던 씨앗 몇 개가 발견된 것이다. 인양팀은 맹물이 담긴 컵에 씨앗을 잠시 넣어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씨앗 중 4개가 싹을 틔운 것을 9일 후에 우연히 목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작은 씨앗 속에 먼 훗날의 잎과 줄기를 미리 담아 놓으셨습니다. 그 씨앗의 발아시기에 대해서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는 그분만이 이루시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기다려야 할 시간과 이루시는 속도를 아무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루실 것은 반드시 이루시되, 끝까지 신뢰하는 자에게만 미리 보여주십니다. 누구에게 보여주십니까? 믿음으로 씨앗을 준비하고 믿음으로 그 씨를 심는 자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 씨앗을 심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씨앗을 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함을 심습니다. 결과 염려한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심습니다. 결과 믿음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은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을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그 결과 재물을 주인 삼은 사람은 평생 돈의 노예로서 살다가 명망의 곳으로 가게 되는 반면 주님을 주인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추수 때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도무지 쌓아둘 곳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창고를 새로 짓고 그 창고마다 가득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날마다 먹고 마실 궁리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날이 다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결국 그는 그 많은 것을 하나도 써먹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 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만 같습니다. 한데 과연 그럴까요? 집을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요.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길의 그늘막일 뿐입니다. 또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지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내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산에 다니는 사람이 무척 많아졌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산은 가도 가도 좋다고요. 그런데 산을 가보면 산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 때문에 마지못해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산이 좋아 산에를 올라가도 이윽고는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은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 집이라고 말하는 집은 진짜 내 집입니까? 어떤 사람은 임대 주택에서 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출을 받아 집을 삽니다. 임대주택에서 사는 분은 매달 사글세를 냅니다. 대출받아 집을 산 사람은 원금 분할 상환에 이자까지 더하여 매달 냅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사글세가 아니겠습니까? 명의만 내 것이라고 했을 뿐이지 담보가 잡혀있으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 집도 아닙니다. 그나마 내 집이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다 두고 갑니다. 결국 지금 잠시 내가 사용할 뿐이지 근본적으로 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청지기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소유권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그것은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제 언제 어디에 있든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께서 눈동자와 같이 살피신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랑 가운데서 얻은 교훈입니다. 이것을 말로만 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풍랑을 준비하셨습니다. 한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물고기입니다. 그것도 때를 맞춰 요나가 던져질 바다, 바로 그곳에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고 요나가 바다로 던져지기가 무섭게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그것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불평으로 얻는 것은 매밖에는 없습니다. 인색함으로 얻는 것은 긍휼 없는 심판일 뿐입니다.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사랑은 천국을 누리며 천국에 속한 모든 것 곧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고난을 통해 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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