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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 (고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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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 (고후 8:1-9) 

오늘의 본문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정신을 사도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헌금을 해서 고통 받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와 같은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 많은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지역은 항구 도시로 무역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헌금에는 인색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헌금을 했는지를 먼저 설명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적극적으로 헌금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성경적인 올바른 헌금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헌금 문제는 성도들에게도 가장 민감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 나오기 싫어하는 이유가 헌금부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국 평신도 연합회가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조사 결과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헌금의 종류가 모두 38가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국가에 징수하는 세금 27가지 종류보다 많은 것으로 한국교회는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인 칼빈은 당시의 교회를 가르쳐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해 바른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문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물질에 대한 비유와 설교를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비유 중 거의 50% 이상이 물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밭에 보화 비유, 부자 청년에 관한 비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말라’는 말씀 등 많은 부분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질에 대해 많이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물질, 즉 헌금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성도의 신앙의 표시입니다. 헌금생활 속에는 그 사람의 신앙이 나타나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헌금은 신앙의 성장과 많은 관계가 있는데, 어떻게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헌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다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구실을 찾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이유를 찾는다는 점이 서로 다릅니다. 

헌금은 물질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헌신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이 있으며, 물질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몸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물질로도 헌신하게 되며, 물질로 헌신하는 하는 사람은 몸으로도 헌신하게 됩니다. 

헌금이란 물질이 많이 있다고 하고, 적게 있다고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억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깨닫지 못하면 단 돈 10원도 헌금할 수가 없습니다. 헌금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할 수 있으며,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헌금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헌금생활을 통해 몇 가지 자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1.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 1: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날부터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은혜란 단어가 5회나 나타납니다.(1,4,6,7,9절) 

은혜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금행위는 바로 이런 은혜에 대한 응답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 14장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으로 강조하는 출애굽기와 레위기 훨씬 이전에 벌써 십일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영접하면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 중에 창 14: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때에 아브람은 자기가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전쟁의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하였습니다. 2절 말씀에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극한 가난가운데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어떻게 많은 환난과 시련 속에 넘치는 기쁨이 있을 수 있고, 어떻게 극한 가난 가운데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이 가능합니까? 이는 서로 반대되는 말이요,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 받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볼 때 감사는 형편이 좋을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했으나 고린도 교회들은 부유한 가운데서도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헌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감사는 형편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가능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크기에 따라 감사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크기는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크기입니다. 감사헌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벅찬 감격으로 헌금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고난 중에서도 기쁨이 넘쳤고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형편과 환경을 초월한 성도의 힘이요, 행복입니다. 이 기쁨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헌금을 드렸습니다.

본문 3-4절에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사도 바울이 강제로 요구해서 드린 헌금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에게 자신들도 함께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여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가난하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을 돕고자 하는데 동참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원하여 헌금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자신들에게 할당된 의무만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로 다른 성도들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 은혜로운 헌신에 자신들을 동참시켜달라고 자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색함입니다. 고후 9: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충동적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혹은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 결심에 의해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행 5:1-10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하고서도 저주를 받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교묘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한 위선의 방편으로 한 헌금이며, 그것도 인색한 마음이 들어 헌금하기로 마음먹은 것에서 일부를 감추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할 때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그 헌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후 8:12절에 보면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헌금이라면 많이 소유한 자가 많이 드리는 것과 적게 소유한 자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한 것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헌금이라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하나님은 동일한 가치로 여기시며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끼는 것을 굉장한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아낌이 어떤 동기로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 11:24절에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아낀다고 다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은 좀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쓸 때 아끼는 것은 오히려 은혜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돈을 쓸 때 인색합니까? 더 쓰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지 않습니까? 좋은 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자녀들에게 베푸는 것입니까? 바로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생이 되고 힘들어도 줍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의무감이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인색함으로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드렸습니다. 

본문 5절에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단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먼저 주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을 드렸다”는 것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소유도 필요할 경우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여인을 보십시오. 가뭄이 심하여 먹을 것이 없어 힘들게 생활합니다. 이 여인에게는 마지막 한번 식사할 정도의 양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와서는 자기를 위해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실제로 먹을 것을 줄 수도 줄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남아 있는 밀가루 조금을 가지고 빵을 구어 엘리야에게 드립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먼저 드립니다. 

이 사르밧 여인이 마지막 남은 양식을 엘리야에게 드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드렸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부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그 풍성한대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전 인격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이 없이 드려지는 그 어떤 헌금도 알맹이가 빠진 헌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 시간, 재능 등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구실을 찾지만,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드릴 이유를 찾게 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좋은 것으로, 더 많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릴 때 “얼마를 드렸느냐?” 하는 것은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 녹아 있는 헌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신앙고백이 있는 헌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경험하는 성숙한 성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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