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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소처럼 (삼상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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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처럼 (삼상 6:7-15)      


I. 법궤는 교회

초등학교 어린시절 소를 몰고 산으로 들로 나가 소를 먹이곤 했습니다. 
- 소는 참 힘이 있습니다. 
- 그러면서도 그 힘으로 사람을 헤치지 않습니다. 
- 소는 참 착하고 충성된 짐승입니다. 
어린 내가 끄는 대로 따라옵니다. 
나를 믿어 줍니다. 
가파른 길을 갈땐 나를 등에 태워서 터벅터벅 갑니다. 
어릴때 소는 내친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처럼 충성하면 복을 받을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소처럼 교회를 섬기면 정말 훌륭한 교인이 될 겁니다. 

오늘은 한소망교회 창립감사주일입니다.
「소처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힌 강대국 중 하나가 블레셋이었습니다. 이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번번히 실패를 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여지없이 패하고 있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법궤를 전쟁터로 끌고 나갔습니다. 내용없는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존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높여 영광을 돌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궤만 전쟁터로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법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당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가서 보니까 큰 다곤 신상이 엎어져 목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잘라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박살나 있었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법궤를 갖다 놓은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마을에는 전염병이 번져 사람이 여기 저기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라는 마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드에도 역시 무서운 독종이 임했습니다. 법궤를 다시 ‘에돔’이라는 마을로 옮겼습니다. 거기에도 무서운 재앙이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은 블레셋 방백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이 심상치 않은 일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로 생긴 것인지 좌우간 흑백을 가리자. 그래서 그들은 새끼가진 암소 두 마리를 구해 새 수레를 메워서 그 위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가게 해서 곧장 가면 정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고, 소가 좌우로 치우치면서 그 길로 가지 아니하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먼 길 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향하여 벧세메스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 법궤는 오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구원의 장소입니다. 법궤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영혼을 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느시대는 교회의 영광을 잃은 시대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명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한 마리 소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II. 법궤를 멘 소는 고난의 소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법궤를 멘 소는 고난의 소가 아닙니다. 불행의 소가 아닙니다. 영광의 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성도라 불리워지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거룩한 무리가 되어 주님과 더불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을 “집사”라 부릅니다. 

이 집사는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하나의 형식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청지기, 천국일꾼들에게 붙여주는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막10:43)고 했을 때 여기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δίακοϒος (디아코노스) 즉 집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교회를 메고 가는 집사가 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직분을 잘 감당한 자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딤전3:12). 존경받고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자는 교회를 잘 섬긴 집사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 권사 그리고 우리 집사님! 직분에 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벳세다 들녘 광야교회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지 아니하고 그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락을 받아들고 감사기도를 드려습니다. 그때 신구약 성경 최고의 기적 -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한소망의 기적은 바로 우리집사님들의 이 광야 어린이같은, 소같은 충성이 있었길래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공짜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의 짐을 다 걸머지고 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시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신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이고 그분이 살아나심은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부활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지위를 얻을 것이냐? 보상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 우리의 연약한 이웃들을 어떻게 섬겼느냐?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소가 있지만 법궤를 멘 소처럼 존귀함을 받는 소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많은 수레가 있지만 법궤를 실은 수레만큼 영광스런 수레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짐이 많으나 법궤를 짊어진 소처럼 아름다운 소가 역사상에 또 있었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 가정의 멍에, 사회적인 멍에, 정치적인 멍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분단된 조국의 현실도 또 통일의 과제도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될 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멍에들 가운데 주님의 몸인 교회의 멍에를 메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짐이 아니요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악인의 장막에서 주인 노릇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적인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젊은 나이로 짧은 시간에 기업을 일으킨 한 집사는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기업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집사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이 모두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시지는 않겠지만 만약 기업의 사장의 직임과 교회의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무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기업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미카터 전 미국대통령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겐 대통령직보다 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의 직이 더 영광스럽다”고요.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여사는 종종 아이들에게 이런 문답을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너희에게 맡겼느냐?”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하겠느냐?”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청소년들에게 사명이 있고 열정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교사로서 봉사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웃들을 섬겨주고 돌봐주고 어린 영혼들을 잘 키우는데 은사가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소그룹에 목자로서 혹은 예비 목자로서 목장을 섬길 수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이 밝은 사람들은 안내로 봉사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상과 음향기재를 다루는 일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방송부에서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밖에서 주님의 얼굴을 대신하는 차량봉사안내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 차량봉사자들이 얼마나 교회를 흥분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III. 그 다음 법궤를 멘 소는 울며 자기의 길을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암소들이 왜 울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그 울음의 이유를 우리는 쉽게 한 두 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 울음은 젖 빨이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가야하는 어미 소의 울음, 모정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명 자의 길은 눈물의 길일 수 있습니다. 어린 송아지를 버려야 했듯이 주님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버려본 경험, 짤라 본 경험, 잃어본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외아들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도 외아들을 버려야 했고,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 자리를 버려야 했고,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양식을 버려야 했으며, 베드로는 그물을, 마태는 직업을 버려야 했습니다. 얻고자 하는 자는 버려야 하고 찾고자 하는 자는 잃어야 합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나 주를 위하여 죽을 때 주님 내게 부활의 영광을 주십니다. 

보십시오. 
외아들을 버린 아브라함은 바다의 모래알 같은 믿음의 자손들을 얻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버린 모세에게 하늘 보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기름통은 마를 줄을 몰랐으며 땅의 그물을 버린 베드로는 천국 그물을 얻어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둘째 암소의 울음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법궤를 멘 자는 감격으로 메야 합니다. 감격할 줄 아는 자만이 기쁨이 있고 새 힘이 용솟음칩니다. 
봉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 같은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여 직분이 무겁다고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목자의 직분이 무겁고 집사의 직분이 부담스럽고 목자의 일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만들었는데 새들이 모두 와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리도 길고 등에 아무 것도 없어서 곧잘 달려가는데 우리는 다리도 짤막하고 등에 뭔가 날개라는 것을 매달아 놔서는 무거워서 걸어갈 수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새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날개를 펴라. 그리고 훠어이 훠어이 한번 저어 보려무나. 새들은 날개를 좍 폈습니다. 훠어이 훠어이 저어 보았습니다. 창공을 향하여 솟아 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뛰는 어떤 짐승보다도 빠르게 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 사명은 소명은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접어둔 채 짊어지고만 있으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이 직분들 사명들을 펼쳐서 훨훨 저어보면 우리의 믿음이 솟아 오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성장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 직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이 성숙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 천성을 향하여 훠어이 훠어이 날아 오르게 될 것입니다.

언제 영광스러운 직분이 무겁게 느껴지든가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불평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원망하는 마음이 내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받은 직분이 언제 무겁게 느껴지든가요? 예수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가 보일 때 우리는 울며 감격하며 이 직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날 사랑해서 주신 직분이군요. 주님 내게 맡겨주신 이 아름다운 짐을 내가 기쁨으로 짊어지며 가리다. 

생각해 보면, 어린 송아지를 떼어 놓아야 하는 아픔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은 별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헌신과 희생은 애착을 가져옵니다. 친구의 피를 본 등반가는 등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산에 더욱 깊은 애정을 갖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애절한 것은 똑같이 아버지와 함께 아들을 얻었지만 피 흘린 사랑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이 더 간절한 것 아닐런지요. 
주님께서 교회에 이토록 애착을 갖는 것은 피 흘려 사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역 소그룹리더 한번을 해도, 성가대에서 봉사를 해도, 새벽기도 한번을 나와도 희생이 있을 때 능력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울어본 사람, 교회를 위해 값진 땀 방울을 흘려본 사람, 교회를 위해 희생해본 사람, 이 성전에 피를 묻혀 본 사람,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바쳐본 사람은 교회에 애정과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소망!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보더라도 눈물이 핑 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하여 땀 흘릴 수 있고 울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피를 묻힐 수 있는 것은 나의 최대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암소를 보십시오. 울며 울며 자기의 길을 갔고 자기의 길을 마쳤습니다. 종착점에 도착하여 자기 몸까지 불태워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미련한 소라구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소로부터 우직한 충성을 배우려무나. 

1629년(인조 7)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이 근찬(謹撰:삼가 지음)했다는
 ≪의열도 義烈圖≫에 부사(府使) 조찬한(趙纘韓)이 쓴 ‘의우도서(義牛圖序)’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유래담이 전해집니다. 

문수점(文殊店)에 사는 김기년(金起年)이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해 여름 이 소와 같이 밭을 갈고 있을 때 갑자기 숲속에서 사나운 호랑이가 뛰어나와 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기년이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며 가지고 있던 괭이로 마구 싸웠습니다. 호랑이는 소를 버리고 사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기년이 급하여 양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소가 크게 우짖고는 머리로 호랑이의 배와 허리를 무수히 떠받았습니다. 마침내 호랑이는 피를 흘리며 힘이 다하여 사람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몇 걸음 못 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기년은 비록 다리를 여러 군데 물렸으나 정신을 차려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0일 후에 이 상처로 말미암아 기년은 죽고 말았습니다. 기년이 죽기 전에 가족에게 이르기를 “내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누구의 힘이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소를 팔지 말고, 늙어서 스스로 죽거든 그 고기를 먹지 말며 내 무덤 옆에 묻어달라.”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는 물린 데가 없었고, 기년이 누워 있을 때는 스스로 논밭 일을 하더니 주인이 죽자 크게 울부짖고 마구 뛰며 쇠죽을 먹지 않더니 삼일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이 사실을 관에 알렸는데 부사 조찬한이 그 사실을 돌에 새겨 무덤가에 세웠습니다. 이르기를‘의우총’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는 변덕이란 것을 모릅니다. 밭 갈고 짐 끌고 농사짓고 먹는 것은 볏짚 콩깍지 옥수수대 고구마순. 그러나 대접 소홀하다고 불평하는 법이 없습니다. 

소는 죽어서 살은 푸주간에 큰 뼈는 사골탕, 작은 뼈는 단추로 껍질은 가죽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살아도 주인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인을 위해 죽습니다. 소는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이 없습니다.

왜 불평이 생깁니까? 일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일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감사함 뿐입니다. 그러나 일꾼은 대가를 바랍니다. 손님은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불평대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원망대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함으로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일꾼, 법궤를 멘 소의 충성을 보십시오. 좋아서 울고 아파서 울고 감격해서 울고 모자라서 울고 울며 울며 봉사하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주인공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위하여 섬기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주님을 섬기던 
주기철 목사님! 마지막에 주님 얼굴에 침뱉지 않기 위하여, 신사에 참배하지 않기 위하여 못 박힌 길을 걸어갑니다. 한 발자욱 옮길 때마다 땅에 박아 두었던 못이 발등을 찌르며 올라옵니다. 그걸 뽑기가 힘에 겹습니다. 쓰리고 아픕니다.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는 울며 울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수많은 우리 믿음의 자손들이 그 길을 가야겠기에 주기철 목사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골고다의 험한 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IV. 셋째 법궤를 메고 가는 길은 두 마리 암소가 함께 가는 길이었습니다 

영국 속담에 왕의 밥그릇도 깨어지면 강아지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봉사는 줄당기기처럼 나뉘어지면 힘이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독창이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요 합창입니다. 혼자 빨라도 안되고 느려도 안됩니다. 혼자 소리가 커도 안되고 모두 노래하는데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안됩니다. 부족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이 세운 교회의 지휘자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충성의 박자와 음정을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두 마리의 소를 상상해 보십시오. 두 마리 여덟 개의 발이 맞추어 갔습니다. 혼자만의 충성이 아니올시다. 앞서가는 소를 시기할 필요도 없고 뒤에 오는 소를 깔봐서도 안됩니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사십시다. 불같이 열심내는 사람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서도 안되는 일이며 연약한 사람 흉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아주지 않는다 고독하다 외롭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손 붙들어 기도할 때에 거기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분 엎드려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두 사람이 손 붙들어 아파트 계단을 오르 내릴 때에 추위에 떨며 봉사하고 우리를 영접할 때에 그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나와 함께 떨며 교회 봉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이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되는 것입니까? 아름다운 충성은 서로 보조를 맞추는 충성입니다.

V. 오늘 우리는 이 법궤를 어떻게 메고 갈 수 있을까요?

첫째, 하늘 법궤를 실어 나르는 수레는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무릎은 천국 수레의 바퀴요 기도의 눈물은 수레를 구르게 하는 기름입니다. 이 법궤를 실은 수레는 세상 지식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탁상공론으로 굴러가는 수레가 아닙니다. 오직 기도로 굴러가는 수레입니다. 

강동구 변두리에 가면 크지 않은 조그마한 예배당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 그 언덕 밑에 천막촌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조그만한 예배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 서울시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조그만한 아파트촌이 건설되니 철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주민들이 다 떠나가고 이사를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당에 천막 걸쳐놓고 예배드리는데 철거반들이 와서 못질해 버렸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모두 끌어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는 줄 알고 포크레인이 와서 뚜껑은 집어 치워버리고 푹 찍어서 트럭에 옮기려다 보니까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분이 허리가 딱 짤려진 채로 모래 속에 파묻혀서 들려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하나님 예배당 무너진다고 그래요. 여기 예배당 서게 해달라고 목사님이 울면서 기도했어요. 우리는 어디로 가요. 우리 교인들은 어디로 가요. 여기 크지 않지만 작은 예배당 짓게 해 주세요’ 울며 기도하고 혼자 예배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포크레인 기사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 허리가 잘렸구나’ 생각할 때 뒤로 쓰러져서 기절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잘려진 것이 아니고 모래위에서 기도하다가 포크레인이 푹 찍으니까 모래가 허리 밑에 파묻힌채, 기도하는 자세로 딸려 올라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그곳을 예배당으로 불하했고 그곳에 예배당이 세워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틀림없이 천국에 가서 보면 그 예배당 입구에 할머니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을을 정복했던 할머니의 기도!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늘 법궤는 내 몸으로 메고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땀을 흘려야 하고 다리가 아플 때도 있는 겁니다. 하늘 법궤는 일꾼사서 메고 가게 하는 짐이 아닙니다. 몸바쳐 내가 메는 법궤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에 관한 고전적 얘기를 아시지요?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날 세 사람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험난한 산맥과 추위 때문에 한 사람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선다씽 목사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고 다른 한사람은 그렇게 하면 우리까지 죽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홀로 떠났고 선다씽 목사는 쓰러진 사람을 들춰 업었습니다. 추운 눈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선다씽 목사는 있는 힘을 다 쏟았습니다. 기력이 다하여 쓰러지려는 순간 저 멀리 마을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선다씽 목사는 다시 힘을 내어 마을로 내려가려는데 얼어 죽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사람은 혼자 살겠다고 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선다씽 목사는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지 않았다면 자신도 그 사람처럼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 사람을 업는 동안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몸에 땀이 나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메어야 할 짐, 법궤, 십자가를 팽개치면 내가 살 것 같겠지만 나를 죽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법궤를 내 몸으로 메는 것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봉사로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 생각하지만 교회에서 봉사를 쉬면 결국 자신이 죽는 길임을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존 러스키라는 사람의 책에 보면 교회 건축의 7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철근, 시멘트, 나무, 흙, 기와, 벽돌이 아니고 교회를 건축하는데 진리가 있어야 된다. 아름다움이 있어야 된다. 애정이 있어야 된다. 희생이 있어야 된다. 순종이 있어야 된다. 땀이 있어야 된다. 꿈이 있어야 된다.

설계자와 건축가의 인격이 합쳐져서 건축물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순종과 땀과 희생의 피를 섞어서 교회를 만들어 가게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믿음과 꿈을 담아서 이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건축은 그 시대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조잡한 건축물이다. 그 시대에 조잡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실한 공사가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 시대에 가치관이 정신체계가 부실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진실하고 아름다웠다. 그 시대가 그만큼 진실하고 아름다웠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 여기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건강한 신앙인이 될 때에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되었다. 여기있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행복한 신앙생활 할 때에 우리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희생의 터 위에서 세워지고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님들의 얘기를 들으니까 교회가 도무지 부흥이 되지를 않는다고 그래요. 이유를 조사하고 연구해 보았더니 태국에는 순교자가 없다고 합니다. 태국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딱 두사람 있는데 한사람은 수레를 타고 교회를 오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게 첫 번째 순교자요, 두 번째 순교자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다가 홍수를 만나서 홍수에 떠내려 간 사람이 두 번째 순교자랍니다. 그래서 그 두 곳에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땀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피가 이 자리에 고여질 때에 주님의 희생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우리 한소망교회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과 희생이 여기 녹아서 스며들어갈 때에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21년동안 한소망교회를 소처럼 섬겨오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천국 입구에서 우리모두에게 법궤를 멘 소와 같은 영광이 있기를 원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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