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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굴과 터널 (시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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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과 터널 (시 23:4-6)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4∼6절

동굴과 터널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감옥입니다. 나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하고 땅 밑의 깊은 굴이라도 나갈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굴과 같은 인생을 살 수도 있고 터널과 같은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시련은 크고 작은 동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이 있고 좌절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러한 동굴도 반드시 출구가 있는 터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출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동굴이 생긴 원인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빠진 채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죄악의 동굴입니다. 우리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조상들이 죄인으로서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죄악의 동굴에 이미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도움 없이 결코 그 동굴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또한 허물의 동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허물이 많습니다. 오늘날은 게임 중독과 같은 허물의 동굴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며 인생 파탄을 맞이합니다. 또한 질병의 동굴도 있습니다. 

어떤 질병을 하나를 고치면 다른 질병이 다가오고 또 어떤 질병 고치면 더 무서운 질병이 다가오고 인생은 끊임없이 질병의 동굴에서 허덕이며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난과 낭패의 동굴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동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발버둥칩니다. 우리가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 금모으기 운동하던 것이 어제 같지 않습니까? 현재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금융위기의 동굴에 빠져서 허덕이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여파로 다시 금융위기의 동굴이 찾아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한 가장 두려운 죽음의 동굴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번 무덤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동굴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극입니다. 아담이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죄악의 종이 되었고, 그 다음부터 모든 인간들은 죄악의 동굴, 허물의 동굴, 질병의 동굴, 가난과 낭패의 동굴, 죽음의 동굴이라는 감옥에서 허덕이며 못나오고 발버둥치다 일생을 끝마치는 것입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이렇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고 도덕적인 문제는 즉 종교의 문제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은 종교 문제이므로, 종교가 바로 서야 양심이 바로 서고, 그럴 때 올바른 정치를 하고 정치가 올바르게 되어야 평온한 가운데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자신의 시에서 “모든 범죄는 그 속에 천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고통의 씨를 품고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에는 종교가 있으며 종교가 바로 서야 위기에서 나올 수가 있는데 그 종교를 바로 세우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양심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동굴에서 나오는 문이 우리의 생활 속에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이나 가정, 생활, 사업에서 고통을 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들어가면 못나오는 동굴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허덕이고 고통을 당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지 동굴의 문이 열리면 터널이 되어 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나 지방을 내려갈 때 동굴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가다보면 터널입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동굴은 터널이 되고 맙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을 떠난 죄는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은 모두다 아담과 하와가 불신앙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들어온 동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동굴에 출구를 뚫어야 됩니다. 바로 죽음의 동굴, 죄악의 동굴, 불의의 동굴, 질병의 동굴, 저주의 동굴, 절망의 동굴에 출구를 뚫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동굴들에 출구를 뚫어줄 이는 누구입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뚫을 수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동굴입니다. 

그것을 뚫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이 찢기고 피를 흘려 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죄악을 뚫었습니다. 허물을 뚫었습니다. 질병을 뚫었습니다. 저주를 뚫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허물에서 병에서 나갈 길이 있으며 저주에서 나갈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자가 없다”고 말한 예수님이 바로 동굴에서 터널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아무리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갔을지라도 예수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그 동굴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가운데서 문이 되어 열려서 터널이 됩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든지 원수의 공격을 받아서 고난당하든지 예수님만 있으면 그 땅굴은 터널로 변화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종을 통해 동굴같은 우리 삶의 터널의 출구가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별로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삼손은 사자를 죽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원수의 보리밭에 불을 지를 수 있었으나, 한 여인이 지른 정욕의 불에 의해 전신이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 머리를 깎지 않는 하나님 앞에 헌신을 서약한 사람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만 정욕과 여인의 유혹에 노예가 되어서 파멸 당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바로 마귀의 종이 되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고달픈 동굴의 절망 가운데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욕의 동굴에 갇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삼손과 같은 위대한 장사도 정욕 앞에서는 꼼짝 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이 있기 때문에 한평생을 살면서 감사하고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도 교육이 없고 출신이 천하더라도 남녀노유 빈부귀천 차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예수님을 내 가슴속에 모셔들이면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길을, 생명이 있는 곳에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굴에서 터널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어떠한 동굴도 터널로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의 문제에 해결책이 나옵니다. 동굴에 출구가 열려 터널이 되는 것입니다. 앞길이 캄캄하던 동굴에서 터널 출구에 밝은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네 스스로 더 공부해라. 더 노력해라. 더 수양해라. 도를 더 닦으라. 그래서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손톱이 다 뒤틀리도록 노력해도 동굴에 출구를 뚫어 터널로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전부다 자신의 힘으로 뚫으라고 합니다. “더 많이 수양과 도덕을 닦으라!” 그렇지만 나약한 인간이 수양과 도덕을 닦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3.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믿고 순종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절망의 동굴을 전부 터널로 뚫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망의 동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안됩니다.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상을 주시러 오신 것이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 상을 주시는 좋은 이미지의 예수님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떻게 믿고 순종할까요? 믿고 순종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자신의 신발을 벗어 놓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주신 그 축복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오중복음의 생각을 마음속에 가득 품고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꿈을 꿉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꿈을 꾸고 현재에 내가 아무리 생활이 형편없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잘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를 외치며 믿음으로 더 나은 내일을 향해야 될 것이고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드시 주님의 뜻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현세의 안심, 내세의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현세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는 포기하고 죄나 사함 받고 내세에 들어가서나 잘 살아라”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현세의 안심, 내세의 복락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현세에 못박힌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은 내세에 우리에게 영생 복락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현세에는 우리의 죄를 청산하고 우리의 허물을 청산하고 우리의 병을 청산하고 우리의 저주를 청산하고, 내세에는 영생복락을 주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주고 영생복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영혼이 잘되는 것이 첫째요 둘째로는 범사도 잘되고 강건해지는 전인구원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성품을 바꾸지 못합니다. 태어날 때 타고난 그 성품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인격입니다. 인격은 자기가 노력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인격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연단을 받아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같이 동참하면 예수의 생명에도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면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고난은 반드시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데 그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다가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우리에게 인격적 변화가 다가온 것은 고난을 통해서 다가온 변화이지 수양과 도덕을 닦아서 얻은 것은 지극히 적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는 괴롭지만 갖가지 고난을 통해 큰 영광이 우리 삶속에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반드시 우리에게 해롭지 않습니다. 갖가지 고난은 그 이상의 축복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 앞에 하나님께서 밥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께서 밥상을 차려 주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온갖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권세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퍼부어 주셔서 누구도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영적인 밥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원수가 보는 앞에서 기름 부어 주셔서 하는 일마다 성공시켜 주시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동굴 속에 가둬 버리지만 예수님은 그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서 우리가 밖으로 나가 더 큰 성공을 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깨닫게 되므로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으면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구원해 주시고 높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시고 장수를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니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면 신앙의 성숙과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변화됩니다. 사람도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그 제자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사귀는 친구가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 우리도 하나님을 닮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세상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잠깐 동안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변화를 받고 성숙해지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의 수련을 받을수록 터널을 통과해 나올 때마다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넘쳐나고 사랑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하면 통과할수록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의 인격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 통과할수록 그 자라나는 인격과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동굴을 피하지 마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통과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동굴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같이 계심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터널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동굴에서 나가는 터널입니다. 우리의 모자란 행동을 벗어나는 터널이요, 병을 통과하는 터널이요, 가난을 통과하는 터널입니다. 또한 죽음의 감옥을 지나가는 터널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가두어 놓을 동굴과 같은 감옥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절망할 동굴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고 문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활짝 열린 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유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질병에서 자유를, 저주에서 자유를, 죽음에서 자유를 얻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터널을 지남으로 말미암아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얻고 예수님을 더욱 튼튼히 붙잡고 영혼이 더욱 잘되고 범사에 더욱 잘되고 더욱 강건하고 더욱 생명을 넘치게 얻어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갖가지 동굴을 모두 터널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터널을 나올 때마다 영혼도 자라고 범사도 강건해짐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됨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같이 계셔 우리의 나갈 수 있는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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