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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마른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 (사 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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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 (사 55:1-3)

 
오늘 살펴볼 말씀은 「목마른 인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목마름이란 영적인 은혜를 갈망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제 때 술을 마시지 못하면 온 몸의 세포가 술을 달라고 아우성칩니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이 주는 쾌감에 대하여 목말라합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에는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도 있고, 지식에 목말라하는 사람도 있고, 재물이나 권력에 목말라하는 사람도 있고, 향락에 목말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대상은 영혼의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종류의 목마름은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만, 영혼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목마름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혼의 기갈과 기근 상태에 놓여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비참하리만치 곤비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가련하게도 그들은 자기들이 그 같은 형편에 놓여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합니다. 이는 영적인 무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균에 감염되면 감각 신경이 마비되어 몸에 상처가 나거나 화상을 입더라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 부위가 세균에 감염되어 지체가 손상되는 결과가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죄는 우리의 영혼의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따라서 죄에 감염된 영혼은 올바른 영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적 욕구가 없고 그 대신 세상적인 것들을 갈망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형편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으로 이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해 있는 영적인 비참함을 일깨워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줄 때, 성령의 감화로 인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6:8). 

그렇습니다. 일단 복음을 들어야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술에 만취되어 낭떠러지 위에서 깊이 잠들었던 사람이 잠을 깨고 나서 그가 처한 상황을 깨닫고 전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전도의 중요성에 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하였습니다. 

곧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복음을 들을 수 있으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으며, 믿지도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 이웃들이 구원의 초청을 듣도록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긴 채 영혼의 갈증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주 복음을 듣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처해 있는 비참한 실상을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초청에 응하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영생의 물을 선물로 주어 마시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실 물일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신병들이 여름날에 뜨거운 햇빛 아래서 행군을 하다보면 땀을 많이 흘려서 갈증이 심하게 됩니다. 물을 아껴서 마셔도 수통의 물은 금방 다 떨어지고 맙니다. 갈증이 심할 때는 논에 고인 물도 마시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처럼 갈증이 심할 때 시원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 가면 물이 생명과 같습니다. 여름철에는 낮 기온이 섭씨 50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충분한 물을 준비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탈수 증상을 일으켜 위험합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사라의 여종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집에서 쫓겨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 날 하갈은 고향인 애굽으로 가려다가 그만 브엘세바 들판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황량한 광야지대를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가죽부대의 물을 다 마셔 버렸습니다. 뜨거운 대낮에 물이 떨어졌으니 큰 일 났습니다. 어린 이스마엘이 탈진하여 쓰러졌습니다. 그 때 하갈은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 앉혀 놓고는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면서 화살 한 바탕쯤 떨어져서 마주 앉아 바라보면서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사자를 보내셔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곧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물이 귀한 팔레스틴을 무대로 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초청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시자 사마리아 여자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시자,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날 이 여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여자는 영혼의 목마름을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목마름을 해결하는 바른 방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자는 영혼의 목마름을 세상적인 방법 곧 남편을 자주 바꾸는 방법으로 해소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꾸었고 주님을 대면했을 때에는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처럼 빈번하게 남편을 바꾼 것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이 사마리아 여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성 편력을 통해서, 또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좇음으로써, 또는 육신의 향락을 추구함으로써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이 주는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은 그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하게 됨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쁨의 포도주와 신령한 젖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도주와 젖은 매우 중요한 식품이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하지만 그 대신 포도가 많이 생산되므로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물 대용으로 마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많이 쳐서 양젖으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포도주와 젖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식품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포도주는 심령의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시편 4편 7절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젖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구원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령에는 즐거움이 넘쳐나게 됩니다. 누구나 즐거움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봄 ․ 가을에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고, 여름철에는 피서를 가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함입니다. 영화를 보거나, 오락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소갈증에 걸린 사람이 금방 물을 들이키고도 돌아서면 또 목말라 물을 찾듯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그 효력이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의 즐거움이 다하면 곧 어이서 마음속이 공허감으로 가득 찹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권세든, 사랑이든 무엇을 얻음으로써 누리는 즐거움은 그 즐거움의 원인이 사라지면 덩달아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빼앗아갈 자가 없듯이, 우리 심령의 즐거움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 이르기를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기쁨이 충만했으므로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이므로 이 같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자격자가 되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혹 범죄하여 심령의 즐거움을 상실하였거든 다시금 죄를 회개함으로 이 즐거움이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2절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죄는 태양 빛을 가리는 구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이 구름은 사라지고 다시금 하나님의 광명한 빛이 우리 영혼에 비추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항상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서 영적 생명이 풍성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언제나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해서 자주 허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들면 맨 먼저 식욕이 사라집니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만, 병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항상 영적 건강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되 값없이 주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모두 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없이도 영적인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즘은 물 한 병을 마시려 해도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영혼의 생수인 구원의 은혜와 포도주인 심령의 기쁨과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면 부자들만 혜택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돈을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주님의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잔치할 시간이 되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초청 받은 사람들이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사양했습니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밭을 샀으므로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하고,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므로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하고,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사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이 말하기를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하니, 주인이 명하기를 “길과 산을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하나님을, 종은 선지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정중하게 초청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원 계획에는 없었으나 나중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슨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주인의 호의를 힘입어 참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강권해서 잔치 자리에 데려 왔듯이, 하나님께서도 그 종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강권해서 구원의 자리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와서 잔치를 맛보고 나자 “참, 잘 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도 처음에는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 이끌려서 마지못해 왔지만, 곧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면 “정말, 예수님을 믿기를 잘했구나!”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한편, 우리는 값없이, 돈 없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지라도 그 은혜가 값싼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는 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장 18절로 19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돈 없이 받는 은혜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귀한 독생자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대가를 지불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또 죄인이 다른 죄인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늪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고 누군가가 바깥에서 그를 구출해 주어야 하듯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는데 전적으로 무능한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혼자서 행하셨으며,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다만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일컬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는데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소용이 된다면 구원은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구원받는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선악과를 두고 언약하셨습니다. 또 노아와는 홍수 심판에서 건져주실 것을 두고 언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너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언약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이 섬기는 신들은 그를 섬기는 자들과 언약을 맺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약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살아계시는 기독교의 하나님 한 분 만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상대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하신 대로 이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계약을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들과 더불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곧 이 계약을 기록해 둔 책입니다. 구약은 오래된 계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에 입각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인간들은 서로 약속을 하고서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신실성이 부족하고 또 약속을 이행할만한 능력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약속의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미쁘신 분이심을 보아서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영원한 언약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었음을 아시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목말라 방황하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영생의 생수와 기쁨의 포도주와 신령한 젖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달을 때 더 이상 세상길을 방황하거나 세상의 헛된 것들에게 소망을 두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신 성도님들께서는 주 안에서 영생과 신령한 기쁨과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풍족히 받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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