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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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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빌 3:12-16)
  

들어가는 말

옛날 팔레스타인의 어떤 마을에 ‘실바노스’라는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바구니 두 개와 조약돌을 집에 놓고 살았다고 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오르면 오른쪽 바구니에 돌을 담고,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왼쪽 바구니에 돌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저녁마다 조약돌을 세어 오른쪽 바구니의 조약돌이 많으면 저녁을 먹고, 왼쪽 바구니에 조약돌이 많으면 금식했다고 합니다. 
그 날에는 밥 먹을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거지요.
이렇게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애를 쓰니(마5:8) 어찌 그 인격이 성숙되지 않았겠으며 존경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되는 것(to make or to be righteous)’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믿음’과 ‘생활’이 일치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미드미>들은 많지만 <예수 따르미>나 <예수 달므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그는 칭의(justification)와 더불어 성화(sanctification)와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했습니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해 주는 것(to regard as righteous)’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야 한다(to be righteous)’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인으로 간주 되는 것’과 ‘의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to regard as righteous)

먼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행위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 죄, 실패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또 미래에 죄지을 가능성 때문에 자기 구원을 불안해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믿음에 근거되어 있다고 하지 ‘선하냐? 악하냐?’는 행위에 근거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의인이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떳떳하게 나설 때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스톰스( storms)박사라는 분은 ‘은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무 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함과 ‘자랑할 것’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구원이든 간에 은혜일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에베소서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본래 ‘왕이 계신 어전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데리고 하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옷은 남루하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신발도 신지 못한 볼 품 없는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우리는 오로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저 가는 것입니다. 
큰 죄를 졌지만 거저 가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282장이 생각나서 혼자 여러 번 불렀습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2. 의인이 되는 것(to be righteous)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의인으로 간주 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 범사에 그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기 이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12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절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달려간다.’라는 희랍어는 ‘디오코’라는 말인데, 결승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달리기 선수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달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육상경기가 자주 열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운동장에서 육상 선수들이 골인지점을 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바람직한 성도들의 자세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의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를 교훈합니다. 

1)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13절)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잘한 일이 있겠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잘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한 일이겠지요? 
그 다음으로는, 못한 일도 있겠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못한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일이겠지요?
바울은 이런 모든 일을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일에 중요합니다.
육상 선수가 자꾸 뒤돌아보면서 달리면 속도가 늦어지고 방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나오던 롯의 처는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19장)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애굽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과거의 공적을 자랑하다보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고전 10: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또한 잘못한 것에 집착하면 낙심하기 쉽고, 용기를 상실하여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가끔 듣습니다.
“저 선수, 지난번 실패한 것을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잊어버리지 못함으로 또 실패할까봐 벌벌 떨다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2)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본문에는 ‘잡다’라는 표현이 4번 나옵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러면 우리가 잡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 4: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고전9: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약1: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신약성경에서 ‘권위’(혹은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수시아’(exousia)입니다. 
이 말은 ‘본질(本質)’이라는 뜻의 ‘우시아(ousia)’와 ‘~로부터’라는 뜻의 ‘엑스(ex)’가 합쳐진 것입니다. 
풀이하면 권위라는 것은 ‘본질로부터’,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란 뜻입니다. 
본질이 권위의 근원이자 바탕이요, 근거이자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권위가 있습니다. 
‘하늘’(하나님)을 본질로 삼는 권위와 ‘사람’(땅)을 본질로 삼는 권위가 그것입니다. 

사람을 본질로 여기는 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에 민감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 노력합니다. 
반면 하늘을 본질로 삼는 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에 예민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에 최우선 관심을 둡니다. 
사람을 본질로 삼는 자들은 권력과 물질적인 것에 예민하고, 하늘을 본질로 삼는 자는 신앙과 영적인 것에 예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민한 분이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이처럼 ‘하늘’(하나님)을 본질로 삼고 사신 예수님이셨기에 ‘사람’(땅)을 본질로 삼는 이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 권위자’로 통하던 제사장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시 ‘정치적 권위자’였던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대왕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예민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럴 때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성가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새벽기도회 때 2011년에 국민일보에 보도된 신성종목사의 인터뷰 기사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신성종목사는 199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 중의 한분이셨습니다.
그는 당시 ‘장로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이 출석하던 ‘충현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는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70여권의 책을 저술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접고 70노구를 이끌고 캄보디아의 오지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2008년 초에 그의 장모가 “여보게, 천국은 정말 있는 건가?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어?”라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장모님께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천국이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매일 한 끼씩 금식하면서 간절히 “하나님, 제게 천국을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며 그곳에 누가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환상은 8일간 지속되었습니다.
충격적인 내용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신은 간신히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갔지만 상급은 거의 없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부한 그였습니다.
놀란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모두 네 영광을 위해서 한 일이다. 나를 위해 한 일이 아니다.”
그 말을 듣고 환상 중이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천국을 살펴보니 맨 앞자리에 순교자들이 보였습니다.
책속에는 천국에서 만난 순교자들의 실명이 거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교사와 복음전도자들이 자리했습니다.
그는 그가 본 환상의 내용을 2009년 초 ‘신성종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크리스천 서적)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복음전하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그것이 사는 길이구나!’
이것이 ‘화려한 경력의 목사’ 신성종이 70노구를 이끌고 선교지에 나간 이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예민한 목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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