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시 104:24-30)

첨부 1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시 104:24-30)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 기후 변화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환경주일로 지키는 오늘은 6.10 민주 항쟁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25년 전 6월의 서울은 참 뜨거웠습니다. 역사를 새롭게 하려는 이들의 열망이 거리에서 장엄하게 분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항쟁 덕분에 우리는 다소라도 민주화된 사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다가서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장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현재의 기쁨은 물론이고 미래의 소망조차 잃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백이 사라졌고 작은 자극에도 감정적으로 찰랑거리기 일쑤입니다. 가끔 시편 구절이 절로 떠오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시120:6) 

샬롬의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은 인류의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바람을 저버리곤 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를 욕망의 외길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 길에는 쉼이 없습니다.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성찰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세상을 쓸모의 관점에서 파악합니다. 

그것이 자연 세계이든 이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쓸모없는 것은 즉시 폐기처분됩니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 시대를 이렇게 풍자했습니다. “믿음 소망 돈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돈이라.” 본말이 뒤집힌 시대, ‘돈 세상’이 만들어내는 것은 외로움과 안식 없음입니다. 인간관계는 파편화되고,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불안하기에 또 질주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런 인간으로 인해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자연입니다. 우리는 지금 극심한 기후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림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빙하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방출되고, 수온의 변화에 따라 생태계가 교란되고, 전염병이 국경을 넘나듭니다. 경작지의 감소로 인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고, 벌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먹을거리 생산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희귀생물들이 멸절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에너지 고갈 시대가 눈앞입니다. 눈 밝은 한 저자는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탄식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송전탑이 지나가면서 농토를 잃은 밀양 농민들, 골프장 건설 사업으로 인해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는 강원도 사람들, 지리산과 설악산에 케이블카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 지리산 댐 문제, 4대강 사업의 폐해 등 모두 심각합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당장의 편리가 아니라, 먼 후손들의 삶에 미칠 영향입니다. 사람들은 인공의 낙원에 열광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은 두바이에 세워진 멋진 신세계의 실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깥은 섭씨 40도가 넘는 데, 실내 스키장에는 영하 5도의 기온에 400미터가 넘는 인공 슬로프가 있고, 매일 30톤의 눈이 뿌려진다. 호텔에서 바다로 나가는 뜨거운 백사장 밑에 에어컨 배관을 해서 시원한 모래를 밟으며 바다에 풍덩 빠져 해수욕을 즐긴다. 그저 교만과 악덕의 덩어리일 뿐인, 허깨비 같은, 무조건 망하게 되어 있는 삶의 방식들.”(이계삼, <그건 신기루였지>, 한겨레신문 2012년 5월 11일자 칼럼)

• 그날이 오면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예비 전력 부족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기후 재앙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에 다들 걱정은 하면서도 선뜻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불편한 게 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석유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해도 결국은 원자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년 3월 11일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자력 신화가 얼마나 위험하고 허구에 찬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원자력은 값싼 에너지도 아니고 안전한 에너지도 아닙니다. 우라늄을 채굴하고 정제하여 플루토늄으로 만드는 비용, 거기에 발전 이후에 나오는 핵 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용은 실로 막대합니다. 핵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냥 땅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파멸적 재앙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문명은 화산 위에 지은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섭습니다. 무엇보다도 후손들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가 놀다 간 자리에 쌓인 쓰레기더미를 치우기 위해 그들은 생 전체를 바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그날이 오면>을 두려움으로 읽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나이 든 사람들을 경멸하리라

그들은 아이들 몫의 자원을 다 써버렸고
자식들을 위해 남겨놓은 건 병든 대지뿐이니

그날이 오면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를 증오하리라
그들이 유산으로 남겨준 것은
콘크리트로 막아 죽인 갯벌과 강물과
쓰레기 더미로 썩어가는 바다와 들녘과
노후한 원자력과 핵폐기물 덩어리뿐

그날이 오면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저주하리라
농부와 토종 종자와 우애의 공동체를 다 망치고
깨끗한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토록 고갈시키고
막대한 빚더미만 떠넘긴 어른들을

더 이상 남겨둔 미래도 없이 
삭막한 도시와 번쩍이는 기계더미와
역습하는 기후와 복수하는 대지만을 남겨준 
어른들을 증오하며 공격하리라

그날이 오면
그날이 다가오면 

• 주님의 세상

그날은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두렵지만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대안이 있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런 문명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기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탈리아의 혁명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지성으로는 비관주의자이다. 그러나 의지로는 낙관주의자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람시는 그런 순간에도 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오연한 의지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의 희망의 뿌리는 자기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첫 구절은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선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

이 위대한 선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없음’에서 ‘있음’을 이끌어내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물속에 사는 모든 생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하지만, 삶으로는 부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맨 나중에 초대받은 손님인 인간은 생명이 흥성대는 그 잔치마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요? 시편 104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주님은 빛을 옷처럼 걸치시고 하늘을 천막처럼 펼치셨습니다. 구름으로 병거를 삼고, 바람을 심부름꾼으로 삼으시고, 물이 정해진 길로 흐르도록 경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들짐승과 새들이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땅에는 들짐승이 뜯을 풀을 자라게 하시고, 밭에서는 사람들이 먹을 푸성귀가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밤과 낮이 조화롭게 운행되게 하셨습니다. 세계는 자율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돌보시고 지키실 때만 존속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달았기에 기쁨의 탄성을 발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24) 

주님이 만드신 세상의 특징은 다양함에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제 귀에는 생명이 흥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뭇 생명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참 좋다’. 저는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하나님의 감탄에 동참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탄사는 언제 나옵니까? 마음이 평화로울 때입니다. 안식을 누릴 때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마음이 굳어져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고, 뭘 봐도 감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 돈 세상을 넘는 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고도 감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돈 세상’의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그들은 행복의 신기루를 좇지만, 행복은 다가갈수록 저만치 멀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 속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이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동해나 설악산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사막의 고요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을 보며 감탄사를 발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순수하고 착합니다. 저는 요즘 와서 이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우리 속에 생태학적 감수성이 깊어지면 명품은 그 매력의 빛을 잃고 맙니다.” 어플루엔자(Affluenza, 부자병/affluence와 influenza의 결합어)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으로부터 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감사함으로 누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걱정 때문에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뭐라 하셨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을 쓸모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모래 한 알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영혼을 고양시킵니다. 내면이 풍요로워지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휘황한 것들에 현혹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이 땅에 영을 불어넣으시어 땅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시24:1)임을 거듭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무너져 가는 생태계를 바로 세울 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고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성도는 낙담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살라고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존재의 기쁨이 늘어나면 소유에 대한 집착은 줄어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게 되면 아무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망가뜨린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우리의 안간힘을 하나님은 기도로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마른 뼈의 골짜기에 서서 바람을 향하여 대언했던 에스겔 같은 존재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오면 땅의 모습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영에 지펴 생명의 바람, 평화의 물결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