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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고전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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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고전 1:4-9)

: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고린도(Corinth)는 그리스 수도인 아테네(아덴)에서 서남쪽으로 80㎞ 떨어져 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사이에 있습니다. 고린도는 동쪽으로 에게해로 진출하는 겐그리아 항구와 서편으로 아드리아해(=이오니아해)로 나가는 레기움 항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두 항구 사이의 거리는 6Km 정도 입니다. 

지중해의 동서교역을 위하여 수 백 Km씩이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다니느니 육지로 질러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고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리석으로 장장 6km나 되는 레인을 설치하여 배를 바다에서 끌어올려 반대편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시간을 절약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고린도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물질적인 변영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풍성함은 예나 오늘이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퇴폐적이었고, 방탕하였습니다.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습니다. 이 도시는 온갖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18:1-8).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는 부패한 도시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하였음에도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변질시켰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성적인 문제가 교회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교인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성찬의 문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은사의 문제,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문제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투성이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두고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 감사 

바울은 어떻게 감사한다고 할 수가 있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목적은 바로 그들의 문제에 대한 신앙적 해결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지적하기에 앞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다[eujcaristevw/유카리스테오]’는 ‘고마움을 느끼다’, ‘감사기도를 드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에게 감사하였습니까? 바울이 감사한 대상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감사한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1. 하나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인간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감사할 조건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보면 감사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까? 바울이 감사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은혜를 주셨다는 것 때문에 바울은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런 놈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다니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저런 고린도 교회에도 은혜를 주시다니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도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참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찬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은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II. 은혜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혜의 내용은 5절에서 7절까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바울이 가장 먼저 꼽은 것은 고린도 교회가 언변과 지식에서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언변[lovgo"/로고스]’은 말재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gnw'si"/그노시스]’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고린도는 헬라 철학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대한 논리도 탁월하였습니다.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언변이 뛰어났던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행 18:24-27).

1. 지식을 풍족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신앙과 지식이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식한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b)라고 하였다고 해서 지식을 멀리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멀리하게 하려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어거스틴이 한창 저술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바닷가에서 한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 다가 모래에 붓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지나가다 궁금하여 물으니까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어 바다를 마르게 하려고요.” 

어거스틴이 ‘어찌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낼 수 있겠느냐’며 꾸짖자, 아이는 도리어 이렇게 어거스틴에게 대꾸했습니다. 

“당신이 조그만 지식을 믿고 하나님의 무궁한 신비를 캐내려 하니 그 어리석음이 나의 행위보다 더합니다.” 

적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식 그 자체를 도무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뇌(腦)를 주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의 한계뿐만 아니라 유용성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진리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는 지식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음으로 고린도 교회는 어떤 은혜가 있었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지식적으로 분명하게 알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견고하다[bebaiovw/베바이오오]’는 ‘확고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이 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확실하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2. 증거를 견고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망설입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세우는 데는 서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 못하는 사람을 무조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적으로 많은 실수와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잘 믿고 전도도 잘하는데 이웃과 잘 싸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를 참으로 열심히 하는 교회인데 교인들끼리 싸우기도 잘하는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만약 전도를 열심히 하는데 이웃과 잘 다투는 첫 번째 사람과 전도는 못하지만 이웃과 잘 지내는 두 번째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닮으시겠습니까? 선택의 여지없이 두 번째 사람을 닮으시겠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는 전도도 잘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세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확신 있게 전한다고 해서 완전한 신앙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가운데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계속해서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할 사람일뿐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전도하는 확신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예수님을 확신 있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또,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7a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은사[cavrisma/카리스마]’는 ‘아무 공로 없이 받은 사랑’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구원입니다. 그들은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영적 은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3. 은사를 넘쳐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은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한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여기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등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각종 은사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고린도 교회는 문제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덕스럽지 못한 모습 때문에 ‘성령 받아도 다 소용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처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겪었던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방언을 하고, 진동을 하고, 입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못된 마음이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행동을 여전히 하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가슴을 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한 적인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은사는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은사가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거룩한 사람이라는 보증 수표는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한 길을 계속하여 달려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7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7b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가 받았던 은혜의 절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재림의 신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리다[ajpekdevcomai/아페크데코마이]’는 말은 ‘학수고대하다’, ‘꾸준히 끈기 있게 기다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4.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현실의 삶에 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은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그 날’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었습니다(창 7: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마 13:19). 그 날을 알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장 현세적이고 가장 세상적인 고린도 교회에게 재림을 기다리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같이 행동하는 그들에게 재림의 신앙이 있다니! 그 날이 올 것을 기다리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신앙이 또한 그들과 같지 않습니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의 것을 헤아리고 다투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마다 깊은 탄식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영원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무엇인가에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은혜가 보다 더 분명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혜와 고린도 교회의 실제 모습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받은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도에게는 그들을 향한 어떤 확신이 있었습니까?
  

III. 확신  

어떤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실제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현재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완전히 거룩한 모습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1. 주님께서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관점은 먼 미래를 향하여 있었습니다. 현재는 문제가 많은 정말로 골치 아픈 교회였으나 ‘그 날’에는 책망할 것이 전혀 없는 자로 세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지라도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희망의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희망의 사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씨앗에서 움터 나오는 가늘고 여린 싹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싹이 자라서 마침내 알곡을 맺을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희망이 우리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어느 때, 어느 형편에서도 희망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영원한 회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확신은 무엇입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완성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교제를 통하여 이 땅에서 성화의 길을 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교제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과 교제한다면 우리는 은혜를 유지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를 통하여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받은 은혜를 지켜 나가는 것과 더 향상시켜 나가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잊게 하고 은혜생활을 누림에 가로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습관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입니다. 
넷째는 게으름에 젖어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교제할 때, 우리는 은혜를 지킬 수 있고 또한 더욱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교제하게 하심으로 거룩하여 지게 하십니다.

호흡을 하듯이 예수님과 사귐을 깊이 하십시오. 그래야 이 땅에서도 진짜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분명히 아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넘쳐나게 하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하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거룩한 삶을 대한 도전이 계속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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