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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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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요 9:3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39-41)

심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서 맹인이 눈을 뜬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심판자이심을 밝힙니다.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 끝까지 예수를 배척하려는 사람들에게 꼭 이 말씀을 들려주시려고 하셨을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3:17, 1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자로 오셨음을 또한 여러 차례 밝히십니다.(5:22,27,30, 9:39, 12:31,48) 

예수님이 심판자라는 사실은 사도들도 가르친 바 있습니다.(행17:31, 24:25) 왜 이렇게 상반된 말씀을 반복하셨을까요? 구원과 심판은 언제나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반대편에는 항상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주님이 심판자이신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적 의미에서 주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오신 것은 분명히 인류 구원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자이십니다. 그 때에 주님은 하나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시고,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33,46)  
  
둘째로, 현세적 의미에서 주님은 심판을 확정하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 받지만, 배척한다면 그는 심판이 확정됩니다. 주님께서 별도의 심판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심판이 그냥 확정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복역 중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습니다.(약4:4)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복역 중에 있는 죄수가 살아날 길은 사면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면장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고 의지하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면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별다른 조치가 없어도 그가 이미 받은 선고대로 집행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지만, 믿지 않는 순간 이미 받은 심판은 영구히 확정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심판을 확정짓는 심판자가 되시는 셈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일부러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고의로 배척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영구히 저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은 구원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고 자녀가 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는 동안 예수를 고의적으로 배척한다면 그에게 이미 내려졌던 사망 선고, 지옥 형벌은 확정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현세에서 심판의 최종 확정자이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다시 39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 이 말씀은 눈 뜬 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직후에 그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 말씀이 들렸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일부러 그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 듯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 묘한 뉘앙스가 담긴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영적인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아마 알아들었을 겁니다. 주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은 눈 뜬 사람들이니 눈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주님은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이 말씀이 육신적 의미보다는 영적 의미가 담겼다는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그래도 짐짓 모른 척 했습니다. “우리가 맹인이냐?” 그 한 마디로 애써 자신들을 변호하고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이 말씀은 분명히 육신의 눈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영의 눈을 감은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우리는 영의 눈이 감겨져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고백했 구원의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영적 분별력이 있다고 고집하니 더 이상 대책이 없습니다.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하지도 못하면서, 자만하여 판단을 내리고 결정하니 문제입니다. 이들에게는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최종적으로 확인하십니다.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과거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붙잡고 놔 주지 않던 파라오의 특징이 뭡니까? 강퍅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완고함, 완악함입니다.(출4:21, 7:3,13,22, 8:19, 9:12,34, 10:20, 11:10, 13:15) 

우리를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최대 원수가 바로 교만한 고집입니다.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 내 판단이 요지부동입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이 완고함의 두 당사자가 있습니다. 결코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으려 하는 두 무리들! 첫째는 아 사람의 부모이고, 둘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예수를 시인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예수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애초부터 예수를 배척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모르쇠든지 배척이든지 결과는 같습니다. 불신앙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는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완고함,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신앙의 장애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맹인의 부모가 부딪친 현세적 손실의 문제

눈 뜬 맹인의 부모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현세적인 불이익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뭔가 잃을까봐 겁났습니다. 영생이 밥 먹여 주나? 예수 믿다가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나?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 동료들에게 밉보이고, 상사에게 점수 깎이면 어쩌나? 누가 나약한 좀씨라고 욕하지 않을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거래가 끊기면 어쩌나? 뭐 이런 것들입니다.  
  
맹인의 부모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앞 못 보는 자식을 거리에서 구걸하도록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마당에 자식과의 관계를 단절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신앙 때문에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즉, 출교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들보다 자신들의 이해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부모의 모습은 오늘날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손해가 싫어서 의리를 외면합니다. 

21세기 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입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된 30여 년 전만 해도 4인 가족이상이 주류였습니다. 지금은 1인 가족, 2인 가족이 절반을 넘는 대세입니다. 남의 간섭을 싫어할 뿐 아니라, 남의 삶에 무관심합니다.  남이 나에게 무관심하다고 불평하면서, 정작 나도 남에게 무관심합니다. 각 사람이 철저히 고립된 가운데 고독한 생애를 살아갑니다. 

불행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곁에 사람이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이런 흐름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관심 없어요. 나홀로 신앙입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나만의 행복,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 인류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 이기주의가 신앙고백을 가로막는 최대의 원수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의 변명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을 해 봐야 하니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눅14:18-20) 밭을 사고파는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상품을 팔고 사고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시집 장가 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부딪치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일들입니다. 장사하는 일,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일, 집 짓는 일, 집안 정돈, 가족 관계, 자녀 양육, 친구와의 만남, 취미 생활, 여행, 어떤 일이든지 좋습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 즉 신앙이 먼저냐? 아니면 세상 일이 먼저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만일 이 눈 뜬 맹인의 부모가 바리새인들의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순간 현세의 모든 삶은 끝장이 났을까요? 가정이 해체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고, 지위를 빼앗기고, 그렇게 되었을까요? 태생적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이 먹고 살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양식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풍랑 위로 걸어오신 주님이 풍파를 잔잔케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믿는 바람에 세상에서 망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순교의 길을 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삶이 어렵게 된다면, 지구상에 수 십 억의 기독교 신자들이 어떻게 생존하겠습니까? 주님은 영과 육을 살리는 분입니다. 먼저 신앙, 우선 신앙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일부터 하세요. 물질 문제, 육신의 문제는 그것에 더하여 주시는 덤입니다. 결코 세상의 이해상관 때문에 주님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의 사상 문제

둘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들을 붙잡은 것은 바로 인간의 사상입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에 덧붙인 인간의 해석들입니다. 탈무드를 구성하고 있는 미쉬나, 혹은 게마라가 그것입니다. 미쉬나는 구약의 해석서입니다. 그들은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색하면서 이것이 성경의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문제는 해석에 그치지 않고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성경 전체를 재정리 한 겁니다. 안식일 계명만 해도 39개 조항에 270여개의 세칙으로 정리했습니다. 반죽하지 말라, 칠하지 말라는 조항은 원래 성경 말씀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계명일 뿐입니다. 성경보다 그 계명들을 더 신봉했습니다. 성경 위에 인간의 사상을 둔 겁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구원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기들은 무조건 선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과 자신들이 어떻게 다른지(difference)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사상은 확고합니다. 그들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부터 전 인류가 죄인이요 구원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리가 만무합니다. 구원 받을 일이 없는데 무슨 구세주가 필요합니까? 단지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할 정도의 메시아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사상 체계를 대대로 물려받는 사람들이 속죄하러 오신 구주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예수를 배척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 더 부연하면 자신들의 지배권을 지키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에 긴장했습니다. 많은 무리가 요한과 그 제자들을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타나자 더욱 긴장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을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배척하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펼치다보니 꼬투리 잡기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눈 뜬 것보다,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가?’ 하는 방법만 따졌습니다. 누가 고쳤는지 왜 고쳤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이 만든 안식일 규칙을 위반한 사실을 밝히는데 주력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점점 나빠집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를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았다고 소극적으로 평가했습니다.(16) 그 다음에는 예수의 이적을 가짜라고 했습니다.(18) 그 다음에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했다가(24), 그 다음 그를 모르는 자(29)라고 단정합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신앙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인간 사상입니다. 요즘 주사파들을 보세요. 어떻게 그 낡은 사상을 그렇게 철저하게 따를 수 있습니까? 대명천지에 김일성의 사상만 유일한 진리라고 합니다. 산업 사회가 되고 자본가가 등장한 이래로 돈에 의한 지배구조의 문제는 심각한 이슈입니다. 자본가가 지배하는 금융 제국주의는 언제나 투쟁의 대상입니다. 

어떤 면에서 옳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지금까지 인간 사회의 모든 불평등은 제도 때문이거나, 혹은 투쟁을 안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원인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탐욕이 있는 한 공산주의를 하든지 자본주의를 하든지 상관없이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본가 제국주의는 안 되고, 김일성 세습 제국주의는 됩니까? 자본가 계급만 타도의 대상이고, 공산당 특권층은 타도 대상이 아닙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의 완고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다 반대해도 그들은 자기 사상만 옳다고 합니다. 삼대 세습 나쁘다, 정치범 수용소 탄압 나쁘다, 백성 굶어죽게 만든 것 나쁘다, 그 소리 왜 못합니까?  김일성 정권은 인정해도 대한민국은 인정하지 않아요. 애국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회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상의 완고성을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사상이든지 마찬가집니다. 가장 바꾸기 힘들고 버리기 힘든 것이 인간의 사상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인간적인 모든 철학과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논리 때문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부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 논리에 매이지 마세요. 우상 숭배, 다원주의, 과학주의, 경험주의, 무신론, 김일성 주의, 어떤 사상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철저히 버려야만 합니다. 주체사상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앙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간혹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김일성 아래 예수님이지, 예수님 아래 김일성은 두지 않습니다. 인간 사상을 다 버리세요. 그래야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 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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