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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벽돌을 던지실 때 (사 6:1-8, 요 3:1-17,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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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벽돌을 던지실 때 (사 6:1-8, 요 3:1-17, 롬 8:12-17)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과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 사이에 끼어 있는 주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세 위격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리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성을 잃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구원을 잃어버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도 신비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한 가족을 이루어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교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좋습니다. 세 위격의 하나님 사이에는 ‘Perichoresis,’ 즉 통교(通交)가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각 위격의 하나님 안에는 한 하나님의 본질이 모조리 들어가 있어서 인격적인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를 하신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세 위격의 하나님은 절대 평등하고 절대 동등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컨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하나님을 다 더한다고 할지라도 성자 하나님 한 분보다 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복잡하고 난해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 자리에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 3: 1-17절 말씀을 중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비밀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니고데모,’ 오직 요한복음에만 세 번 등장하는 인물이지요.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항구에다 배를 대면서 “배 들어가유!” 했더니만 니고데모가 “니고데모 안 된데이!” 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거기에다 배를 대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충청도 사람으로, 니고데모는 경상도 사람으로 설정해서 나온 우스갯소리이지요.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유대의 최고위층 인사입니다. 그런 그가 한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눕니다. 무언가 풀기 어려운 영적 고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야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3절).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반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육적인 중생(重生)으로 오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적인 중생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자기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이치와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8절). 바람이 분명히 부는 것을 알지만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영적인 거듭남 역시 분명히 있지만 육이 아닌 영으로부터,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고 감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하나님이 능력을 바꾸는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이어주는 유명한 레인보우 브릿지, 무지개다리가 있습니다. 244미터나 되는 다리를 엄청난 괴력으로 떨어지는 폭포 사이의 협곡에다가 설치했습니다. 1800년대에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습니다. 기술자들이 온갖 지혜를 짜냈습니다. 다리를 설치할 기금도 모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폭포를 가로질러 케이블 전선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일꾼들이 무섭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를 가로질러 다닐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큰 속도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이길 만큼 전선이 달린 활도 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벽을 기어 올라가 설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때 10살 먹은 소년 하나가 누가 들어도 코웃음을 칠 제안을 했습니다. 하늘에 연을 띄워서 그 위에다가 케이블 전선을 매달아 골짜기를 가로 질러 띄워보면 어떻겠냐는 것 제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기술자들이 철없는 아이의 농담으로 치부하고 누구 하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847년에 사람들은 연을 띄워 연줄로 다리 양쪽을 연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인보우 브릿지라는 무지개다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지요. 우스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벽돌을 던지시는 하나님>
     
육적인 삶만 가지고서는 참된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지고 아픈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던져진 불치병 환자들입니다.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고 숱한 성취를 자랑하지만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헬라어로 죄는 ‘함마르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갈 때 이 말을 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과녁을 향하여 명중하는 화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양궁에서 그런 것처럼, 촬영 렌즈를 깨뜨릴 정도의 10점 만점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정확히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쏘기에 사정거리가 너무 길고, 우리는 너무 불안정하고, 때때로 사정없이 부는 바람마저 우리를 방해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 습관적으로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아래로 우리 이웃과의 관계가 부서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모든 의미와 가치를 산산조각내고야 마는 죽음으로 시시각각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 첫 번째 탄생이라고 한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두 번째 탄생입니다. 육의 탄생보다 훨씬 더 고귀한 영의 탄생이지요. 오늘 여러분은 이와 같이 신비하고도 우리의 삶 전체를 살리는 제2의 탄생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워드 브렘이라는 사람은 미네소타 주의 성공한 기업가였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이 브렘에게 혹시 아프리카에 단기선교를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브렘은 거절했습니다. 한 번 기도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브렘은 꼭 그렇다면 목사님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거듭되는 기도와 설득에 못 이겨 브렘은 두 달 후에 아프리카로 가는 10일 동안의 단기선교 팀에 합류했습니다. 놀랍게도 아프리카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브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그는 기근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처참한 이야기를 들었고 죽음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우간다에서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브렘은 자기가 몰랐던 엄청난 비극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브렘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우리에게 자갈 같은 작은 돌멩이를 던지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하면 조금 더 큰 돌멩이를 던지십니다. 매우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은 나중에 큰 벽돌을 우리에게 던지시는데 아프리카가 자기에게는 하나님이 던지신 벽돌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벽돌에 맞고 회심한 니고데모와 이사야>
     
그렇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는 하나님이 니고데모의 주의를 끌기 위해 벽돌을 던지시는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권세자요 부자요 율법학자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만사가 형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성공 뒤에는, 하지만, 까닭모를 공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예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대화는 있었지만 소통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은 니고데모의 영적 주의력을 끌기 위해 하나님이 던진 벽돌이 분명합니다. 거침없이 고속 질주를 하고 있던 니고데모에게 신령한 세계를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던진 벽돌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이 벽돌에 맞은 니고데모는 점점 더 예수님께 끌리게 되었고 마침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나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도록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근 쯤 가지고 왔습니다(요 19: 39). 무서워서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니고데모가 합니다! 예수님이 던진 벽돌이 니고데모를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이지요!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여러분 모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원하십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때로 작은 돌멩이 큰 돌멩이를 던져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큰 벽돌을 던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봉독한 이사야 말씀으로 돌아와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사 6: 1-8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유다 민족은 웃시야 왕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태평성대를 누리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죄를 밥먹듯 저질렀습니다. 웃시야 왕 자신도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유다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초심을 잃어버리고 교만해졌습니다. 급기야 왕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가 나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이와 같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하던 땅의 왕이 죽게 되었을 때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지자로 불러 주십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 너무도 신비하고 황홀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땅의 왕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너무나 장엄한 하늘의 왕을 체험했던 것이지요. 이사야는 땅의 왕이 무너져 내려도 하늘의 왕은 쉴 새 없이 우주 통치를 계속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에게 웃시야 왕의 죽음은 하나님이 던지시는 벽돌이었습니다. 세상의 권세나 혈육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오직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해 주의를 끌도록 던지신 벽돌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던지시는 벽돌은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께로 주의를 기울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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