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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조물의 소원 (롬 8: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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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소원 (롬 8:19-25)


지난 주 우리 교회는 18분의 임직자를 세웠습니다. 세워진 분들만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한결 같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직분을 받으신 분들은 받음으로써의 기쁨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부담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 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회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이는 차서 시집은 가야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꺽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믿는 것 따지고말고 조건보고,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청년들 모습 속에서 저들의 아픔을 봅니다. 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나 체념의 탄식이 아니요, 진리를 가슴 안에 끌어안고, 장차 내가 누릴 소망을 기다리며 결코 세상방법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피조물은 허무한테 굴복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는 썩어짐이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피조물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이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게 있습니다.“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세상이 파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임직 예배를 마치고 어머니 산소가 있는 양주쪽으로 가다보니 가뭄의 현상이 서울에서 느끼던 것하곤 사뭇 달랐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논밭은 물론이거니와 먹을 식수 마져 없어 소방차를 동원하는 이 물 부족 현상은 기상 관측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라니냐 현상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환경 파괴로 온 영향 때문입니다. 논밭이 타들어가는 모습 앞에 지금 자연도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내리는 강수량의 35%밖에 비가 오지를 않고, 또 온다하더래도 찔끔 찔끔 오거나 우박이 쏟아져서 농작물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심각한 피해를 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현상이 계속 되면 국가 위기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환경운동 단체라고 하는 ‘월드워치자구감시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는 오늘날의 환경위기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위기는 이제 과학기술의 발달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혁명적인 기술진보가 없는 한 인류는 다가오는 굶주림’ 시대를 필할 도리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전 세계 인구는 매년 거의 1억명씩 증가된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와 같은 추세가 계속될 전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의 곡물 생산량이 84년 이래로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농업용수의 오염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도시화로 인해 농경지��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루에 굶어 죽는 사람이 세계에서 3만 명이 넘는 다고 합니다. 3초에 한 명 꼴이요, 1년이면 1000만 명이 되는 숫자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분별하게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시킨 데 있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이와 같은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세계적으로 두 가 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태평양의 조그마한 섬 투갈루입니다. 투갈루는 9개의 작은 산호초 섬으로 인구가 만 천명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투갈루가 점점 물에 감겨가는 것입니다. 벌써 9개의 섬 중 에 두 개의 섬이 물에 잠겼고 나머지 7개의 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에 잠길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바닷물이 땅에 스며들어서 염분 때문에 농사를 질 수 없고, 마실 물이 없어서 살 수가 없습니다. 파도에 집이 휩쓸려 갑니다. 벌써 9년 전에 투갈루는 정부는 더 이상 땅을 지킬 수 없다는 국토포기선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환경난민이 생겼습니다. 전쟁난민이라는 말처럼 환경 난민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뉴질랜드나 호주로 피난을 가려고 피난 신청을 했지만 받아주지 않아서 올 데 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 몽골에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유기열 선교사님을 파송했습니다만, 여기에도 엄청난 재앙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몽골의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 남북한 합친 것의 7배, 남한의 14배가 되는 큰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몽골의 반 이상이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몽골이라 하면 푸르른 초원에 말과 양과 염소가 뛰어노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다 옛말입니다. 국토의 반이 사막으로 변했고 90%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700개의 강이 말랐고 1500개 의 개울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사이에 몽골에 있는 1180개의 호수가 사라졌습니다. 

투발루나 몽골이나 자기들의 잘못으로 이런 재앙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산업화 로 공장을 많이 짓고 그 공장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비행기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자동차에서 나오 는 이산화탄소 이런 것들 때문에 당하는 피해입니다. 몽골은 자동차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이산화탄소를 나오는 공장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투발루는 세계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낮은 곳이어서 물에 잠기고 반대로 몽골은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4-5월에 황사가 몰려오는데 우리나라에 오는 황사의 절반은 중국 내몽고에서 오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몽골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불어오는 황사의 발원지가 바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라에서 200킬로쯤 서쪽에 떨어진 바양노루인데 막 사막화가 시작된 곳입니다. 회오리바람이 불면 그곳 에 있는 모래기둥이 제트기류를 타고 72시간쯤 지나 우리나라에 오게 되는데 중국을 거치면서 중국의 이산화탄소, 공장의 분진, 화학물질이 섞여 우리나라에 올 때는 거의 비료 성분이 됩니다. 

우리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면 우리나라도 환경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산업화’라는 허울 좋은 이유를 내세우며 산지와 농지를 함부로 파헤치고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죽음의 폐수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하청으로 흘려보낸 결과 땅과 강, 바다, 공기 그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많은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에 다라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엄청납니다.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폐수를 흘려보내고 공해를 일으켜 가면서도 공장을 가동합니다. 왜냐하면 공해도 공해지만 당장 내 이익이 생기니까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주장하게 되면 누구도 잘못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욕심대로 살면 이 세상은 파괴되어가고 불균형과 갈등으로 파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피조물이 다 압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이 파괴되어가고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단 하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을 포기하고 제 마음으로 대로 제욕심대로 살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여기 ‘고대한다’는 말은 머리를 빼고 열렬히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이제나 저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 역시 허무한데 굴복을 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진 자연이 인�@�수고를 요청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피조물도 허무하게 굴복하게 됐다는 것이 이 뜻입니다. 창3:17-18절을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여기 보세요.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과 자연이 함께 타락을 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을 시키고, 자연은 산사태와 폭풍, 천재지변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연을 찬양하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 위해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면 먹이 사슬로 이루어진 약육강식의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호초가 덮힌 바다 속에서도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 잡아먹고, 공경하고, 도망 다니고, 살기 위한 전쟁의 연속입니다. 

우리나라에 광우병 소동이 한바탕 소용돌이를 쳤지 않습니까? 광우병은 소의 뇌가 스펀지처럼 녹아서 발작을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 무서운 병이 소에만 국한되지 않고 양, 닭은 물론 사람에게까지 전염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병의 원인은 소에게 다른 죽은 소의 뼈와 고기를 섞어 만든 사료를 먹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는 본래 채식동물입니다. 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 소에게 썩은 고기를 섞어 만든 육식 사료를 주었기 때문에 뇌를 녹이는 무서운 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자연이 부른 재앙이 바로 광우병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셔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몰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을 해서 먹어서는 안 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스스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번에 뉴욕 시장이 재임을 하면서 한일이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규제하고 트랜스지방을 함유한 음식, 탄산음료 등을 규제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미국 뉴욕시의 기대수명이 최근 20여년동안 10년이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규제하고 트랜스지방을 함유한 음식, 탄산음료 등을 규제한 ‘정책’의 힘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피조물도 고대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우리의 강과 호수와 나무와 바람과 공기가 병이 들어 탄식하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자연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되면 내가 복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상과 자연까지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나 하나의 욕심 때문에 자기 것을 고집하며 살면 자기하나 사는 것이 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헌신하면 여러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어진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한 교회에서 교인 10명중 1명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다면 이 나라가 초대교회와 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역사를 감당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토이남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한국 사회도 ‘토이남’ 시대가 열렸습니다. 토이남이란 낭만적인 삶을 살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기애가 강한 대한민국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남성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남이 해주는 음식보다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을 즐기고 술 한 잔을 마셔도 카페에서 비싼 술을 즐깁니다. 최신 유행에 민감하고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습니다. 토이남의 특징은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들의 인생 목적은 승진이나 성공이 아니라 근사한 외모의 은발 신사로 늙는 것이라 합니다. 

교회에도 토이남이 늘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을 낭만적이라고 합니다. 화려하고 멋진 예배당에 앉아 근사한 설교를 듣고 세련된 찬양을 들으며 예배드리고 한 달에 한 번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고 여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젠 정말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우리가 날마다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일에 내 삶을 전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23절에 보세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그러니까 처음 익은 열매, 칭의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속 사람,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인도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려는 탄식이 일어나야 합니다. 탄식은 원어를 보면 해산의 고통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절망의 고통이 아니라 희망의 고통입니다. 진통이 너무 아파서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아기가 태어난다는 소망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탄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이 아무리 어둡게 느껴지고 나 하나가 애쓴다고 세상이 달라지냐는 식의 체념이 성도에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말씀 붙잡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4절의 말씀입니다. 여기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내 삶속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거룩한 성숙을 성취하고 쓰임 받을 만한 생애로, 내 삶을 붙잡아 사용하신 후에, 주의 거룩한 영광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어두움과 이 자연의 탄식과 내 안에 일어나는 깊은 신음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삶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용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바울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할 때, 우리는 그 상황에서 우리만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주께서 허락하시는 여러분의 뜻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장차 있을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능히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세상의 유혹과 환경 앞에 허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삶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단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 우리 임직자를 세운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토이남이 아닙니다. 우리 한사람의 변화를 세상의 피조물도 탄식을 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도 힘든데 물질을 드려 선교사를 보내고, 전도를 하고 장애우 예배를 드리고, 어머니 기도회를 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서 자신이 무시되고, 오래되고, 멸시가 되어도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비록 고난이 그의 인생을 휘감고 있었지만 현재 받는 고난이 하나님께 미래에 주실 연장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그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며 소망의 관을 부여잡고 기꺼이 그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 변함없이 진정 붙잡고 달려가는 여러분의 생애의 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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