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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마 23: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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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마 23:24-28)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읽고 지나치고, 특히 저를 포함한 목사들이 설교만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준엄한 주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마음이 무거운 그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질책하신 행위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언행의 불일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외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을,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과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대접과 높임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여덟 가지 화를 선포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향하여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고 또한 그들을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고,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고 가르치는 눈 먼 인도자요 어리석은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뒤집힌 가치관을 가지고 진리를 오도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네 번째 저주의 선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저주 선언은 세 번째 저주 선언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되,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맹인된 인또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루살이는 ‘모기’ 각다귀‘같은 곤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곤충은 사람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부정하여 먹어서는 안 되는 생물들로 규정되었습니다. 레 11:20절에 보면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담근 후 마실 때 거기에 번식해 있거나 달라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곤충들을 채로 걸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곤충들을 먹음으로써, 자신이 부정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약대는 팔레스틴 지방의 가축 중에서 가장 큰 동물로서, 역시 율법에 부정한 동물로 규정되었습니다. 레 11:4에 보면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작은 입으로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약대를 삼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약대를 삼킨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입니다. 이는 율법에 어긋나는 엄청나게 큰 부정한 행동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한다는 풍자적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표현을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전도된 가치관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살이를 삼키는 것과 같이 사소하고 적은 율법 조항에 저촉되는 것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습니다. 일례를 들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금지한 육체노동 39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씨 뿌리지 말 것 2. 밭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불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8. 곡식을 찌지 말 것 9. 채질하지 말 것 10. 반죽하지 말 것 11. 굽지 말 것 12. 털 깍지 말 것 13. 빨래하지 말 것 14. 때리지 말 것 15. 염색하지 말 것 16. 실 짜지 말 것 17. 밧줄 끌지 말 것 18. 두 끈 만들지 말 것 19. 두 실을 짜지 말 것 20. 두 실을 가르지 말 것 21. 매듭을 짓지 말 것 

22. 매듭(끈)을 풀지 말 것 23.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24. 두 뜸을 깁기 위해 찢지 말 것 25. 사슴을 잡지 말 것 26. 죽이지 말 것 27. 껍질을 벗기지 말 것 28. 소금 치지 말 것 29. 그 가죽을 만들지 말 것 30. 머리털을 밀지 말 것 31. 그 것을 깍지 말 것 32.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34. 집 짓지 말 것 35. 헐지 말 것 36. 망치로 납작하게 때리지 말 것 37. 불을 끄지 말 것 38. 불을 켜지 말 것 39.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 등입니다. 

제가 성지순례 할 때 들은 말인데, 이스라엘에는 안식일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동으로 서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도 자기들이 움직이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 아파서 고통을 당하는 환자라도 생명이 위급하지 않으면 고치지 못하게 했고, 전화도 받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처음 자동응답기가 개발되어 시판되었을 때 이스라엘에서는 대 인기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율법조항까지 만들어 그것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약대를 삼키는 것과 같이 정작 중요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범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너무 쉽게 저버리는 큰 악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고 책망하신 것에 대하여, 윌리암스는 “주님은 아주 사소한 의식상의 더러움을 피하고자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저들의 모순성을 지적하신다.”고 정확하게 잘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책망 속에서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의 윤리에 대해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은 나라의 근본을 흔들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상태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까지 악화된 데에는 한국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그 책임이 없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향한 주님의 책망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윤리 의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국 교회의 대표적 정결 법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주초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 술과 담배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기독교인’ 하면 가장 먼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떠올립니다. 물론 술과 담배처럼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멀리한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처럼 술과 담배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이보다 더 큰 거짓과 사기, 뇌물과 부패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고 할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도가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한다는 소문이 나면 집사직도 맡기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사회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부정한 결정을 마다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교회의 중직을 맡기는 것까지 별로 주저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술과 담배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서 그 사람의 건강에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그 행위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누가 사기나 거짓말을 했다면, 더구나 그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부정한 행위는 수많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법에는 소위 ‘희생자의 법칙’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희생자가 적거나 없는 범죄는 가볍게 처벌하지만, 많은 희생자를 낸 범죄는 무겁게 처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반대로 술과 담배처럼 그 피해가 개인에게 국한되는 문제에는 대단히 민감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뇌물과 사기, 그리고 부패와 거짓말과 같은 행위에 대해서 둔감하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도 걸러내고 약대도 걸러내야 합니다. 즉 작은 개인적 윤리 문제만 지키면서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 큰 사회적 윤리에 대해서까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개인적인 정결 법은 물론, 사회적 윤리와 정결 법까지 온전히 회복하여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음식을 담는 접시와 음료수를 담는 잔의 겉은 깨끗이 한다는 본문의 비유는,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특징을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실상 잔과 접시는 안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 담긴 음식까지 더러워져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잔과 접시의 안과 같은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기보다, 잔과 접시의 겉으로 비유되는 자신들의 행동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함으로써 경건에 힘쓰는 삶을 산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했으며, 회당과 거리에서 드러나 보이게 구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은 의로운 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음으로서 정결한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다른 모든 죄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며,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행도 서슴지 않는 악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잔과 대접의 안쪽을 깨끗이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생활을 성결하게 하고,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과 영혼은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것인데, 사람이 내적으로 성결하지 못하면, 외적 행위를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할지라도 깨끗하지 못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행위를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노력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날마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여섯 번째 저주입니다. 이 저주는 앞서 나온 다섯 번째 저주와 마찬가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에 관한 지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무덤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에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에도 쉽게 무덤을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도록 무덤에다 흰 색깔의 칠을 해놓았던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의 겉은 희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시체나 뼈로 가득 차 있으며, 부패한 냄새로 진동합니다. 그러므로 회칠한 무덤 같다는 비유는, 실제 내용물은 구역질나는 것인데, 겉포장은 아름다우므로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을 닮았다는 것은, 그들의 외적 행위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들의 실상 즉 도덕적. 영적 상태는 썩어 냄새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책망은 비단 주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만을 향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외식주의에 빠져 있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향한 질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전쟁 중에도 망하지 않는 사람은, 음식 장사와 화장품 장사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외모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한 벌에 수백만 원이나 하는 고가의 옷을 걸치고, 또 몸에는 최고급 브랜드의 향수를 마구 뿌려댑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은 돈과 남녀의 스캔들, 그리고 각종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되는 저속한 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주님의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에는 각종 썩고 냄새나는 것들이 가득한 외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장막은 비록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 겉은 초라했지만, 내부는 황금과 유향에서 나오는 빛과 향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역시 비록 초라한 옷을 입으며 머리 둘 곳도 없는 생활을 하셨을지라도,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영광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이처럼 하나님의 장막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아야 합니다. 

즉 성도들은 비록 겉은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속사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거룩한 향기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의 몸에서는 고급 향수 냄새가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자만이 풍길 수 있는 생명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풍겨나야 합니다. 온갖 죄악의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의 향기를 날리는 백합화 같은 존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루살이 같은 미미한 것은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랄한 책망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겨우 술 담배는 피하면서, 다른 계명들을 범한다면 이와 같은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라는 희한한 논리에 빠져, 주일에는 예배당 가서 기도하고, 주말에는 노래방에 가서 딸 같은 여자아이 끌어 앉고 노래를 부르는 기가 막힌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이가 부지기수라고 하니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과 같이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외식을 통하여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척했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책망하시면서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옛 시조 가운데 “까마귀 검다고 백로야 비웃지 마라/겉이 검다고 속조차 검을쏘냐?/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는 시조가 있습니다. 백로가 얼마나 희고 아름다운지 영상을 통하여 확인해보실까요?(백로 영상) 백로가 저토록 고고하고 아름다운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백로처럼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척했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 개의 ‘나’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이 보는 ‘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는 ‘나’는 대개의 경우 관대합니다. 자기 합리를 잘 시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외식과 위선으로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시는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는 정확합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고, 그리해서 우리의 안과 겉이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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