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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시인한다는 뜻? (눅 1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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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시인한다는 뜻? (눅 12:8-12)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앞 7절을 다 같이 읽습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아신다는 표현이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시편 139편1절 이하를 보세요.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와 우리 입술의 말도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을 없다고 합니다. 

2009년 영국의 어느 버스에 무신론자들의 광고가 뉴스가 되었습니다.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당신의 인생을 즐기세요.”라는 광고였습니다. 

이런 문구가 세계적으로 파급되다가 2010년 10월에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이슈타인’이라는 물리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버스 광고판에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는 내용을 달고 다녔습니다. 한국교회가 강력하게 항의해서 못하게 했습니다. 반기련, 반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가 그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가기에 무신론자들이나 이단들이 점점 더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합니까?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14:1절을 보세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왜냐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첨단 과학 시대라 하지만 생명체 하나를 못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생명력이 있는 콩알하나를 못 만듭니다. 그런 인간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주도 없고 하나님이 없다면 이 지구도 없습니다. 그러니 참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예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8절~9절을 다시 보세요.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를 시인한다” 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살펴보며 은혜 나누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1. 예수를 내 主人으로 認定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적인 決斷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몰로게오’라는 말인데 뜻은 “동의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하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아르네오마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부끄러워하다” “창피하게 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내 주인이다” 라고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느냐?”아니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이 질문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 몇을 꼽아 봅니다. 

첫째는 에녹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이 땅에서 죽지 않게 하고 그냥 데리고 가십니다. 

둘째는 노아입니다. 그는 당대에 의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와 그 가족만 살리시고 새로 시작합니다. 

셋째는 다윗입니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 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저사람 내 마음에 들어” 해도 대단한 것인데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러니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엄청나게 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약 성경을 보세요. 롬10:9-10절을 보세요.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멘? 

주를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또 요일4:15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국 가는 방법은 입술로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옥 가는 것도 입술 때문에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입술로 시인하고 삶으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까? 지금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요? 그리고 여러분 직장에서 당당하게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살고 계십니까?   

어느 대기업 회사에 상무가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신우회 모임에 나오질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신우회장이 장로님이 나오면 신우회가 활성화 될텐데...하고 기도하던 중 그 장로님 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담임목사님에게 장로님이 신우회에 나오도록 도와달라 요청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당장 전화하여 회사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접대를 하겠다는 것을 구내식당으로 가자고 우겨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판에 음식을 담아 상에 앉아 기도하겠노라하고는 일어나셔서 큰소리로 “하나님 우리 장로님이 다니는 이 회사를 축복해 주세요.” 하고 주변에 직원들이 다 듣도록 기도를 했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장로님이 신우회에 열심히 나왔답니다. 
그 장로님이 장로신분을 숨기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다 들통 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명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교회와 이 시대의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총이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2. 예배를 온전히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그를 온전히 섬기며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를 시인하는 사람은 그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도 주를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기에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인천에 아주 유명한 밴댕이 회집을 운영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회집은 워낙 유명하여 골목이 주차할 장소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께 갔다가 그 집에서 식사 접대를 하겠다고 하셔서 갔었습니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번호표를 받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집 주변에 가계들도 그 회집을 따라 밴댕이 회집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일은 주변 집들은 다 파리 날립니다. 간혹 그 본점에서 기다리기 힘들 사람들이 그 옆집에 가서 먹는 사람들이 몇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회집이 문을 닫는 날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주일입니다. 그날에는 옆 가계들이 장사를 좀 합니다. 어느 날 친구 목사님이 그 주인에게 물어봤답니다. 

“하루 매상이 몇 백만 원도 더 될 텐데 어떻게 문을 닫을 수 있나요?” 

그러자 그 주인이 하는 말, 
“우리 하나님은 그 돈보다도 더 큰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루 몇백만원이 들어와도 주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 성령에 붙들려 예배하고 말씀에 사로잡혀 예배하는 자입니다. 

왜요? 그 예배가 주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23절을 아시지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매주 드리는 형식적 예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내 신앙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이 내 주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를 시인하는 사람은 예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를 시인하는 사람은 주를 심김으로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입니다. 그러기에 주일에는 만사를 재껴 놓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에 /결혼식이다, /환갑이다, /돌이다 해서 예배를 포기하고 가는 것은 주를 시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예배보다 그런 예식이나 잔치가 더 중요하다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순간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해 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주를 믿는 사람인가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십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이 뭔가요?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는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 놓고 칼을 빼들어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스톱 시킵니다. 그리고 이제야 할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루고 계시나요? 
여러분은 무엇을 더 사랑하고 계시나요?

마10:37절 이하를 보세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치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예배를 위해 대가를 치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멀리 갔다가도 주일이면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와서 예배에 준비하고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그 자세가 주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꼭 본 교회를 지키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까? 아무 교회나 참석하여 드리면 되지 않나요?” 

예배를 안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그 몸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한 몸으로 주를 섬기야 합니다. 여러분은 장안중앙교회라는 주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그 몸 안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몸이 제대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배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기에 禮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 예배라면 거기에는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친척 결혼식에 갈 때도 거기에 맞는 격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제대로 입고 갑니다. 

하물며 예배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옷차림도 단정하게 입고 오셔야 합니다. 시간도 잘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시인하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배 구경꾼이 아닌 예배자가 되길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똑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분은 예배자가 아닌 관람자 내지 구경꾼으로 참석한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핸드폰 가지고 만지작거립니다. 옆 사람과 잡담합니다. 그리고는 찬송 부를 때 찬송안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도 안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닙니다. 참가는 했는데 예배는 드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주를 시인하신다면 예배에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시인한다는 뜻은 

3. 복음에 목숨 거는 것입니다. 

주를 섬기다 보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고난과 핍박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핍박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욕먹지 않고 신앙생활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마5:11절 이하를 아시지요?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왜 주님 때문에 욕을 당하지요? 왜 주님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악한 말을 듣게 되지요? 

주님 가르침대로 살려면 세상과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치관이 다르기에 시각과 관점이 다르고 그러다보니 먼저 할 일 나중할 일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있습니다. 박해가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려 할 때는 사단은 더욱 우리를 대적하여 길을 막으려 합니다. 그래서 눅9:23절하반부를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 말은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온전히 믿고 살려면 그 만큼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代價일까요? 
고난의 代價입니다. 주를 위해 핍박과 고난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대가를 지불한 사람에게 반드시 상이 따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5:12절을 다시 보세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주를 시인하고 사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믿는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담대하게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모두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주 극열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신경질적으로 반대하며 모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폭행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때로는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도 없는 것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무자비한 테러를 당하기도 합니다. 어디에 그런 일이 있냐고요?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핍박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산배들이 다 피를 흘려 얻은 신앙의 자유입니다. 일제 때, 6.25때,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 피 흘림의 대가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서 북쪽으로 40KM만 가보세요. 저 북한 보세요. 그리고 저 중국 보세요. 중동 회교권, 인도 힌두권 보세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한해에도 수만 명이 순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를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교단 총회 선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선교사님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어떤 편지는 눈물이 나서 읽을 수 없는 편지가 많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 말 다르고 문화 다른 나라에 가서 그 고생을 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목사나 선교사가 되려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는 지 아시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마쳐야 하고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거치면 빠르면 9년입니다. 그리고 선교사 훈련까지 합치면 약 11년 정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가서 언어 연수 2년 이상해야 비로소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 고생을 하는 것이죠?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우리의 유일무이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땅 끝까지 이루러 전하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느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치릅니다.   

그 복음전도가 주를 시인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인 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를 충성된 종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재판장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 석상에서 천사들은 우리 사역에 증인들입니다. 천사들은 우리를 돕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완벽한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否認을 당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찬사들이 증인이 되어 변명의 여기가 없는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로 거역해서도 안 되고 성령을 모독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용서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동성애를 공개하는 것이 커밍아웃이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신앙의 커밍아웃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사람이 뭐라하는 것 때문에 창피해서 숨기고 믿지 마세요. 

그러면 주님도 여러분을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공개 선포를 하세요. 주변 사람이 “저것도 예수쟁이야” 할까봐 그것이 두려워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추고 사십니까?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이 “나 제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망신당하고 공개하고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계십니다. 
그때마가 여러분이 주를 시인하고 있는지 주를 부인하고 있는지를 보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편 핑계할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도 이런 것은 묵인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를 시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입으로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주님은 우리 믿음을 수시로 점검하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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