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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떡 (요 6: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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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요 6:41-51)


흔히 하는 말로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먹는 재미가 없다면 과연 사는 게 재미가 있을까요?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리고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그리고는 나중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먹을거리를 챙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먹을거리가 없어서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베들레헴 사람 하나가 흉년이 드니까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갑니다. 먹을 것을 찾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이유도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이 들어 먹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아주 중대사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먹을거리가 넘쳐나도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푸념들을 많이 합니다. 우선은 식당은 많아도 우리 입에 꼭 맞는 음식들을 찾기가 쉽지가 않고 또 값도 만만치 않은데다 무엇보다도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변수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아주 건강에 민감하다 보니 이것이 몸에 좋은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내게 맞는 것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하지만 그나마 배불리 먹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식한다고 하는 것이 몸에 결코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 배터지게 한번 먹어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운동하는 선수들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듣기 어려운 말이 됐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엇이 몸에 좋은 것이냐 어떤 음식을 먹어야 몸에 좋으냐 여러 가지 말들을 하지만 너무 거기에 민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먹는 것만큼 자기 관리를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허약한 것도 못 먹어서 허약한 사람도 있지만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아플수록 더욱 건강관리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합니다. 꼭 나가서 운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그 자리에서도 간단한 스트레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 충분한 휴식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첫 시간을 드려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실이지 새벽 시간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이 그냥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돈 벌기는 쉬운가요? 그렇다고 먹는 일은 또 쉬운가요? 그렇다고 자식들이건 부부 간이건 항상 마음에 탁탁 맞아서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래저래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렇다면 그 먹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느냐 하면 물론 무엇을 먹느냐에 달린 것이기는 해도 먹을 걱정은 없는 사람도 있는 반면 먹는 것마저도 걱정할 수에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은 먹을거리도 건강과 돈이 없이는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거리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 지천으로 먹을거리가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그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새벽 일찍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난 다음에는 그 먹을거리가 햇볕을 받아 스르르 다 녹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날에 자기 먹을 양식만큼만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은 벌레가 생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한 호멜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단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를 않습니다. 

그래 하루 전에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는데 신기하게도 안식일 전날 거둔 만나는 안식일까지 두고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새벽 일찍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건강하지 못하고야 어찌 날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가 만나를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만나를 거두지 못하면 굶어야 합니다. 굶으면 점점 더 몸이 힘들어지겠죠? 물론 이웃이 도와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 아침 일찍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침 일찍이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는데 첫째는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기도하는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거기에 더하여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갑니다. 힘들어서 못한답니다. 하지만 힘들기에 오히려 더해야 하는 것이 새벽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는 말합니다. 새벽기도하면 돈이 생기냐? 아니면 뭐가 생기는데 그렇게 열심이냐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루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우선 건강도 주셔서 돈이 빠져나가는 틈을 막아 주십니다. 그러니까 피곤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곤하기 때문에 더 해야 하는 것이 새벽 기도회입니다. 이 시간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날의 만나를 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만나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살아갈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니라” 이에 무리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니 다시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시니까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의 출신 성분을 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구 아들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가 그 아버지라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비겁하고 못된 짓이 다른 사람의 출신문제나 신분을 들먹거리며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는 행위입니다. 과거에 자기는 잘 살았는데 그는 못 살았다고, 자기는 공부를 잘 했는데 그는 공부도 못했고, 자기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기는 도시 출신인데 그는 저 시골 깡촌 출신이라고 하는 등 출신이나 신분을 거론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함으로 은근히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못된 태도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만 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이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나간다 싶으면 수군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군가가 새로운 사람이 왔다 싶으면 또 수군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더 커 보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좋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조금은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요 어찌 보면 비겁한 것입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군댑니다. 한데 그 수군거림이 결국 상대방의 귀에도 들려지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고 관계가 안 좋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상대방에 대해 깔보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은근히 왕따 시키는 이런 모습은 수군거림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불쾌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린다면 그거 기분 좋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거나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사에 구시렁거리며 수군거리는 것은 정말 고치기 어려운 고약한 병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다고 해서 수군대지 말고 내가 받지 못하는 관심과 사랑을 다른 사람이나 새로운 사람이 받는다고 해서 수군거리지도 말 것입니다. 누군가가 앞서 보이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에게 그럴만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수군거릴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나고 그런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나를 갖추어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왜 누구는 되는데 나는 안 됩니까? 내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만으로 얻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은 단지 믿는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게 몸에 좋은 보약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먹으면 몸이 좋아진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한데 보약만 먹지 운동을 안 하면 또 어떻게 됩니까? 결국 건강하기 위해서는 음식도 중요하고 운동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꾸준하게 운동을 실천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앞서서 사랑을 받고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나도 그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실천하기 위한 본보기로 삼아야지 그저 부러운 마음에 수군거리고 빈정대는 그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수군거리거나 불평하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나만 더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군거려도 수군거림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실천하십시오. 
그러므로 아파서 못한다고, 힘들어서 못한다고, 없어서 못한다고만 하지 마십시오. 사실은 말로만 하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의지도 뜻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도 그저 부러운 마음에 수군거리고 구시렁거린다고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됩니다.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도 또 사람을 살리는 것도 주님이 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성도는 매사에 순종하면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 주님께로 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내가 작정을 하고 마음먹고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게 되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데 첫째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림 받는 은혜’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은혜’입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셋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심으로 가능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요 14:2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나 어느 개인에 대해서나 매사에 비판하거나 불평불만으로 수군거리지 말고 오직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깨우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셨으니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말만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림 받는 은혜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은혜를 체험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 같은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 방갈로르의 한 신학교에서 강연했을 때였습니다. 강연 후 한 수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님,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공짜로 주어서 그들을 버릇없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청중이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숨을 죽인 채 쳐다보았습니다. 

테레사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을 버릇없게 만드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안경을 쓰지 않고도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시력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주신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이 내야 하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공짜로 주셨기에 우리는 아무 값도 치르지 않고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가 네 시간 일한다면 두 시간 동안 햇빛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테레사의 대답이 떨어지자 질문을 던진 수녀는 물론이고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야말로 무수한 은혜의 선물들을 무상으로 받고 또 받는, 그러면서도 감사할 줄은 모르는 버릇없는 이들이 아닙니까?
‘갈망의 과녁, 바라고 소망하는 과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없이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5점짜리 과녁입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살면 좋겠다’는 바람은 7점짜리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좋겠다’는 것은 10점짜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살 만하면 갈망의 과녁에서 5점짜리를 맞히고 고작 7점짜리 정도 맞힙니다. 그러나 죽을 지경으로 괴롭고 어려우면 10점짜리를 맞히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탕자가 먹고살만할 때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돼지죽이라도 먹고 싶은데 그것조차도 없어서 주려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혀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죽겠구나!’ 싶은 고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갈망하면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프고 힘들고 삶이 고달프다고 느끼신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요 지금이야 말로 은혜 받을 때임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말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으십시오. 정말 죽을힘을 다해 부르짖으십시오. 

아직은 조금 살만합니까? 그래서 말로는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만 이제 더 이상은 못해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올 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어도 못해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때 죽을 각오로 한 번 더 하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다고 해도 믿음으로 그릇을 준비한 사람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법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그냥 밀가루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가난해서 더 이상 먹고 살 길이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밀가루를 가져다가 빵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할 때 밀가루가 계속해서 생겨나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을 믿으십시오. 

수넴 여인은 조금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엘리사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엘리사가 자기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합니다. 거기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자기 집에 방을 하나 들여 거기 편히 쉴 수 있는 가재도구까지 갖추고는 선지자가 지나갈 때 자기 집에서 쉬었다 살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합니다. 그랬더니 나이 들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그가 아이도 낳게 되고 나중 그 아이가 죽었어도 다시 살림 받는 은혜를 받기 될 뿐 아니라 7년 가뭄의 때에는 가뭄을 피하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까?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순종하며 섬기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먼저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다 누구나 다 모든 죄를 다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김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아들이 빚을 졌습니다. 빚쟁이에게 시달려 죽을 지경입니다. 그것을 보다 못해 아버지가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 줍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합니다. “아들아 내가 네 빚을 다 갚았다. 그러니 이제는 빚 때문에 힘들어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아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 빚쟁이가 그에게 왜 빚 안 갚냐고 하더라도 무슨 말이냐 이미 다 갚았는데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 값을 다 치르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가 그러므로 장식이 아닙니다. 은혜의 상징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의 감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가 그 떡을 먹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는 떡을 먹는 것이 주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육신을 위한 양식도 먹어야 하지만, 육신의 양식 못지않게 더욱 중요한 양식이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입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살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찬 예식을 통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우리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려주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못 박히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 생명에 우리가 동참할 때, “주님 이 떡은 나를 위해 못 박히신 주님의 살입니다. 주님 이 잔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주님의 보혈입니다.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내가 믿음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는 고백의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 생명의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날마다 양식을 먹듯 우리 영혼을 위한 생명의 양식을 또한 날마다 먹어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삽니다. 예수님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말씀을 시간, 시간 먹을 때 우리 영혼이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풍성해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고 몸도 건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외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우리 삶을 통해 실천하고 심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존 웨슬리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홀리 클럽입니다. 이 홀리 클럽은 제일 처음 4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6, 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주로 저녁에 서너 시간 동안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다른 학생들은 이들을 성경벌레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먼저 존 웨슬리는 영국과 세계를 뒤흔드는 위대한 감리교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되었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평생에 6천개의 찬송가를 작곡, 작사해서 우리가 지금도 그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 휘트 필드는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와 함께 미국이 타락할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1차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약속을 따라 이미 성령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따라가시면 성령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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