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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복을 받은 백성 (시 115:12-15 ,롬 1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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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복을 받은 백성 (시 115:12-15 ,롬 15:28-29)

칼뱅은 시편 1편을 시편의 서론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편에는 두 길을 설명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복 있는 삶과 복 없는 삶입니다. 시편은 모세의 오경 즉 ‘토라’(율법서)를 기초로 하여 편집된 시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5권 150편인데 1권은 창세기, 2권은 출애급기, 3권은 레위기, 4권은 민수기, 5권은 신명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신앙의 기초를 말합니다. 

150편 전체를 시작하는 말인 1:1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시편의 서론인 1편에서 말하는 첫 마디는 “복”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는 “복 있게 살아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복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뜻합니다. 복이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느끼는 행복하다는 감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실재의 은총입니다.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복을 주지 말라고 해도 복을 주시기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축복, 은혜, 구원, 평강 등의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본성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창세기 22:17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하여 자녀의 복을 주십니다. 

시편 132:5에는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라고 하여 양식의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28:5에는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라고 하여 삶의 전반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복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좋은 운수,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상서’에는 수(壽), 부(富), 귀(貴), 강령(康寧), 다남자(多男子)가 복이라고 정의합니다. 중국 고대 ‘통속편’에서는 장수(壽), 부(富), 강령(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에는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들보다 딸이 있어야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좋은 아내를 얻는 것이 복이며, 치아가 튼튼함도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기복적인 신앙을 거부합니다. 동시에 복을 부인하는 것도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복을 가르칩니다. 복이란 신앙의 조건은 아니며, 신앙의 결과입니다. 복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축복관은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은 정신적인 것이며 내세적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현세적인 복을 부인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샤머니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내세가 없이 현신을 의지하는 현실성, 나와 신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중간매개에 의존되어 있는 의존성, 그리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기복성입니다. 샤머니즘적 신앙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기복적은 아니지만 신앙의 결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시편 제5권은 107편부터 150편까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명기에 기초한 5권의 한 부분입니다. 신명기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신명기에도 복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이스라엘 집에, 아론의 집에,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민족이,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을 받는 조건은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5:13에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높은 자, 낮은 자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높고 낮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척도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이런 지식과 지혜를 가진 것이 이미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욥기 28:28에는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경외함이란 “The fear of the Lord”라고 합니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경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섭다는 말과 두렵다는 말은 처음부터 그 뉘앙스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귀신이나 알지 못하는 세상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두려운 대상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처음으로 모세를 도울 중간 지도자를 선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자격을 18:21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2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강청기도를 드릴 것을 요청하신 말씀이지만 이 재판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성실하고, 자신에게 엄격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제사장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법궤를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이 법궤 때문에 전쟁에서 돌보아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패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법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법궤가 기럇여아림의 아미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기뻐서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을 연주하였습니다. 법궤를 싫은 수레를 끌던 소가 놀라 날뛰자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이 일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역대상 13:12에는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라고 합니다. 다윗은 법궤를 모셔올 수 있는 적격자가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법궤를 모시고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다윗성에 들이지 않고,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들여놓았습니다. 

역대상 13:14 하반절에는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로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바로왕, 엘리제사장 가문, 헤롯왕, 가룟유다 등이 한 결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한 죽음을 맞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3, 4대까지 그 죄를 갚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섬긴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섬길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사람을 섬길 것인지 선택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선택은 곧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라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12에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어느 마부가 알렉산드리아로 마차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한 할머니가 올라탔습니다.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할머니는 누구세요?” 할머니는 “난 페스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 페스트요? 당장 내리세요.” 할머니는 “태워달라”고 애걸합니다. 할머니는 자신은 “딱 세 사람만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세 사람 이상이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머니는 “만약 세 사람 이상 죽으면 이 칼로 날 죽이라”고 하며 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부는 화가 나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할머니를 성문에서 만났습니다. 마부는 너무 화가 나서 그 칼로 할머니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난 세 사람만 죽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페스트란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시지요? 당시에 유럽인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약 2,500만 명이 죽었답니다. 흑사병이라 불리는 페스트에 걸리면 40일 동안 격리시켰기 때문에 ‘고독살인’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않는 세상은 병에 대하여, 앞날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온갖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경외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둘째, 복을 받는 내용은 우리와 우리 자손이 번창하는 것입니다. 
  
시편 115:14에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너희 위에, 너희 자녀 위에 더하시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데 물질에, 명예에, 영적으로 숫적으로 증가하게 하여 주십니다. 
  
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에쉐르’입니다. 이 말은 번영과 행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스모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힘입어 ‘의롭다’함을 받게 된 사람이 받은 복을 의미합니다. 즉 복이란 하나나님께로 부터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복과 저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저주만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복과 저주를 주셨는데 둘 중에 선택하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도는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습니다. 사도가 축복권을 가지고 축복하면 복을 받습니다. 사도가 저주권을 가지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분명히 저주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일꾼은 축복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저주권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주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축복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도의,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창세기 1:28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최초의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라고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신 복으로 번성을 허락하셨습니다. 
  
번성이란 외적인 번식과 내적인 충실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인류는 전 지면에 번식하고, 내적으로 충실하고, 유족하게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고조들의 수명을 보세요. 900세를 더 살았습니다.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셈의 후손들은 50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400 여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고,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모세는 120세를 살았습니다. 왜 이렇게 수명이 줄어들까요? 오래 전 하나님께서 세계를 만드셨을 때에는 번성하여 빨리 만드신 지구를 채우게 하기 위하여 수명을 길게 하셨다가 점점 짧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굉장히 번성한 백성입니다. 야곱은 그의 식솔 70명을 데리고 애급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창세기 15:16에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4대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70명이 60만 명이 되어 출애급하였습니다. 굉장히 번성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도 히브리 사람들의 번성을 염려하여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번성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의 번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들이 열둘이었고, 딸이 하나 있었고, 부인이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짐승의 떼를 모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하셔서 번창의 복을 주신 대표적 인물입니다.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4:10에는 야베스의 기도 가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구약적인 복은 지역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번성이란 자녀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는 많은데 지역이 좁으면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의 번성과 더불어 땅의 번성, 물질의 번성까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미국의 전통에는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거기에는 물질적인 복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전통적인 축복관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자에서 복(福)이란 글자는 ‘옷’(示) 옆에 입(口)과 밭(田)이 있고, 맨 위에 한 일(一)자가 있는 것입니다. 한문에서 복은 옷 한 벌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밭이 있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욕심 부리는 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욕심 부리면 복이 날아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 신문에는 ‘397세대가 대세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30대, 90년대 학번, 70년대 출생한 자를 말합니다. 개방적 유연한 가족관(flexible), 일과 삶의 균형 중시(balance), 사회 공동 책임 및 인권 중시(social), 비관적 현실주의(gloomy), 사회 전반에 대한 불안감(anxiety)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30대 라이프스타일은 격식보다 편안함(comfy), 식도락(gourmet), 가족과 여가(family leisure), 실용적 거주 개념의 집(dwelling), 이중적 소비패턴(duality)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대세라고 하는 이들의 특징과 라이프스타일을 아무리 봐도 이전 시대의 복에 대한 개념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다남(多男)도 아니고, 물질주의(物質主義)도 아닙니다. 편의성이 발달한 자기중심의 세대라고 느껴집니다. 요즘은 복의 개념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3에서 말하는 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항상 형통합니다. 시간적, 공간적, 내용적으로, 모든 일이 다 잘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입니다. 이런 형통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습니다. 화가 오히려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추구하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영상에 보니 제목이 ‘전화위복’인데 전화기 위에 복을 올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전화위복’이란 이름을 가진 식당도 있습니다. 복요리 전문 음식점입니다. 복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9에는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딜 가든, 누구에게 가든 충만한 복을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복이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복으로 우리와 우리 자손이 번창한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여 복을 받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의 배달꾼이 됩시다.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하만국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이 복을 받아 천하만국의 모든 사람에게 복을 배달하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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