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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고전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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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고전 1:10-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매우 세속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지식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하시고, 은사를 넘쳐나게 하시고,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다만 그들은 받은바 은혜를 감당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받은바 풍성한 은혜에 걸맞은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래 전, 몇 주간 금식 기도하였던 때입니다. 제가 금식 기도한다는 것을 어떻게 들은 어느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 마자 대뜸 “아니, 왜 교회에 무슨 문제 있어요?”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다’고 대답을 했지만, 계속해서 무슨 문제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를 염려하여 묻는다지만 다른 어떤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제 말을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이, 문제가 없는데 왜 금식하느냐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하던 그 분의 얼굴이 잊히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평소에 금식하고, 문제가 생기면 밥 먹고 힘을 얻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분쟁’에 관한 내용을 설교하면 교회에 엄청난 싸움이 있어서 그런 설교를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쟁이 없기에 분쟁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교회 창립기념주일을 맞으며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을 간절한 권면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권면입니다.  

I. 권면  

우리말에서 ‘권면’은 권할 권(勸)자에 힘쓸 면(勉)자를 써서 어떤 일에 힘을 쓰도록 권하는 것이 권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 왜,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까?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앞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원수같이 여겨서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권면하다[parakalevw/파라칼레오]’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불러서 부탁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문제가 많은 교회의 대표 선수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교회였고,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형제들이었습니다.

1. 형제로써 권면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권면하려고 할 때, 또는 세상에 있는 다른 교회들의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 때, 우리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로 여기는 미움에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는 사랑에서 권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이기에 정말로 냉정하게 꾸짖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의 권면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여, 먼 고장으로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런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가 집을 떠난 뒤에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첫째의 이야기입니다. 마침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종을 통하여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첫째의 말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동생을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말은 잘못된 동생을 맞아들인 아버지의 행동을 단단히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첫째야 말로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큰 아들에게 하였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눅 15:31)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말은 ‘얘[tevknon/테크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들아’(My son)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아버지를 몰아세우는 바로 그 아들을 향하여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돌아온 그 둘째가 바로 ‘네 동생’(눅 15:32)이라고 그에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이 여전히 한 가족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모두 거룩한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원수처럼 비난하는 것으로 교회를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교회만은 안 그렇다고 내세우는 것으로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또, 문제 있는 교회를 도려내는 것으로 잃어버린 교회의 신망을 되찾을 수도 없습니다. 결코, 저런 사람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사람을 우리가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라는 하신 이들을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형제로써 다만 사랑하여야 할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권면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으로 권면합니까?

다시,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0a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diav/디아]’라는 말은 무엇을 ‘통하여’, 또는 무엇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권면하는 이유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하는 근거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권면할 수 있는 능력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권면하는 방법도 예수님이셨습니다. 


2.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여기에 함께 모인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전혀 관계없이 살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은 오로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계획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들인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일 이유도, 목적도, 능력도 모두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님 때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로 자매로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II. 내용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써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당위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 줄을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매우 단순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권면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표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내용의 권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의 내용은 모두 같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본래 ‘말하다[levgw/레고]’는 ‘앞에 놓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역시 알 수가 없습니다. 말한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같은 모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같은 주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1. 같은 말을 하십시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앵무새같이 똑같은 소리를 짓거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소리의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도 서로 다른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써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는 예수님과 저 사람이 믿는 예수님이 다른 분처럼 보이고, 이 교회가 믿는 예수님과 저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분처럼 드러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그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저는 제가 지금까지 목회해 온 교회를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보이지만 교회에서는 작은 다툼이라도 크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도무지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권면의 내용은 분쟁이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데 문제는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쟁이라고 합니다. ‘분쟁[scivsma/스키스마]’은 ‘틈’, 혹은 ‘간격’, ‘찢어진 곳’을 가리킵니다. 갈라진 틈이 보입니다.

찢어진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즉 베드로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분열된 모습입니다.

바울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바울이 보다 더 위대하게 보였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후에 아볼로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볼로가 바울보다 더 낫게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먼저 사역하였으니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파였고, 아볼로는 바울의 후임이었으니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은 신파였을 것입니다. 구파와 신파가 서로 다투는 것에 실증을 느끼고, 교회가 시작된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신앙의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게바파입니다. 그러나 아예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짜 원조’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런 모습에 사도 바울은 통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13)라고 묻습니다. 자신을 따fms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15)고 합습니다. 결코 사람을 따르는 분열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분쟁이 없이 하십시오.

인간은 매우 분열적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누가 더 잘 났느냐 하는 것으로 갈라집니다.

천안 병천은 순대로 유명합니다. 강원도 안흥은 찐빵으로 유명합니다. 여주 이포대교부근에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합니다. 춘천은 닭갈비로 유명합니다. 저마다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유명하다는 곳에 가면 예외 없이 ‘원조’라는 이름이 붙은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집의 이름은 ‘진짜원조’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할매 원조’ 심지어는 ‘진짜진짜원조’도 있습니다.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원조라는 것을 내세워야 장사되는 상술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 다고(:14)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을 따르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면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조금 잘하면 교만할 수 있고, 조금 못하면 좌절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두 패가 생기고, 세 사람이 모면 세 패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분쟁을 없이 하여야 합니다.


분쟁이 없이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세 번째 권면의 내용은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합하다[katartivzw/카탈티조]’는 말은 ‘수리하다’, ‘조정하다’, ‘회복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계의 부속품들을 조정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다’는 것입니다.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인간이 분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복을 시도해야 합니다. 회복을 시도해도 저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또 다른 분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 안에서 온전히 합하여야 합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복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같은 뜻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는 같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서는 예수님만이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3. 온전히 합하십시오.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교회가 가 가져야 할 같은 마음이자, 같은 뜻이며,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를 표현하는 다양한 표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들의 패거리를 내세우는 것이라면 반(反) 기독교적이며 반(反) 신앙적입니다.

미국의 종교 월간지 [무디] 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내용은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불평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등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집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래서 형제와 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때문에’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기 위하여 분쟁이 없이 온전히 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악 된 본성을 거스른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길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음에 길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고백하십시오.

“형제님, 자매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같은 성령님의 말을 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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