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 양 예수 II (계 6:1-6, 21:21-25)

첨부 1


어린 양 예수 II (계 6:1-6, 21:21-25)
  

수주 전에 어린 양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어린 양의 양(羊)은 헬라어로 'apviov' 이다. 영어로는 'Lamb' 이다.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을 가리켜 요1:2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다. 어린 양이란 뜻은 세상 죄를 지고 갈 때 말하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울지 않고 온유하게 갔다는 뜻으로 사53:7의 고난 받는 종과 어린 양을 일치시키고 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어린 양 예수는 계5: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분으로 보여졌다. 계5:1 “내가 보매...”, 계5:2 “또 보매...”, 계5:6 “내가 또 보니...” 등 보고 또 본 목격자로서의 요한은 예수를 보았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구속 주로 보았다. 

어린 양은 구속 주이시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으로 어린 양은 보여졌다. 

1.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는 어린 양이시다. (계6:1)

계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라고 하였다. 요한은 일곱 인을 떼시는 어린 양을 본 것이다. 인을 뗄 수 있는 이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 계5:3을 보면 요한은 크게 운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뗄 수 있는 분은 유대 지파의 사사로 온 예수다. 계6:1의 말씀대로 하면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 이것은 어린 양 예수가 정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신 섭리자이며 심판자라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죽음으로 걸어가신 온유하신 예수님이 심판자라는 것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7년 환난의 전 3년 환난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①계6:2 첫째 인을 떼니 백마의 환상,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②계6:3 둘째 인을 떼니 전쟁이 일어난다. 붉은 말은 화평을 제하며 서로 죽이게 되는 전쟁 환란의 상징이다.

③계6:5 셋째 인을 떼니 경제 공황의 환난이 나타난다. 검은 말의 환상의 뜻이다.

④계6:7 넷째 인을 떼니 기근의 환난이 일어난다. 청황색 말의 상진은 기근과 사망이다.

⑤계6:9 다섯째 인을 떼니 순교의 환난이 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것은 순교자의 핏소리를 뜻한다.

⑥계6:12 여섯째 인을 떼니 천재지변의 환난이 있다. 해, 달이 빛을 잃고 지진으로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는 것은 무서운 자연 재난을 뜻한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계6:16~17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하였다. 

보라.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의 진노의 날이라고 하였다. 그 진노의 혼란이 심판이며 각종 환난을 주관하시는 이가 어린 양이신 것이다.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신다는 것은 심판자 예수님이 분명하다. 그저 오직 사랑, 오직 용서, 오직 온유, 오직 겸손만 생각하기에 진노의 예수, 심판의 예수, 환난을 가져오는 예수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어린 양은 심판의 맷돌을 돌린다. 계1:18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살아계신 그 분은 심판자 예수이시다. 

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왜 주님이 더디오시는가? 다시 오신다는 주님은 왜 지연하고 계시는가? 그것은 약속을 안지키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에 오시지 않는 것이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인을 떼시면 환난이 시작된다. 전 3년 반의 환난의 시작이 두루마리 책을 인봉한 인을 떼므로 출발한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우리가 환난을 피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심판자이신 어린 양께서 인을 떼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서, 조금만 더 기다려서 해가 검은 빛이 되지 않고 달이 온통 피같이 되지 않고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열매처럼 떨어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 정해진 정사의 과정이기에, 성경의 예언이기에 운명적으로 진행하시는건가? 요한계시록 7장을 보니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들에 인을 친다. 

인침 받은 역사가 마칠 때까지 땅이나, 나무나, 바다를 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인침 받고 구원 받은 자로 흰 옷을 입은 자가 되면 어린 양 앞에 선다.(계7:9) 흰 옷 입은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회개한 이들이다.(계7:14)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친다.(계7:15) 그러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심판주이신 어린 양, 그 어린 양이 보좌 가운데 계시는데 그 어린 양이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인침을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심판주 주님이 인을 지금 떼시던, 천 년후에 떼시던 인침을 받자. 이 인침은 물세례, 성령세례다. 주님의 것으로 표시하는 인침을 받으면 환난 속에서 나올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의 귀함이여, 나의 예수가 심판주인데 나는 예수의 것으로 인쳐졌다. 세례를 귀히 여기자.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거듭나라.

2. 성전을 필요없게 하는 어린 양이시다. (계21:22~23)

요한계시록 21장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당이 창조된다. 하나님께로 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묘사된다. 이 새 창조를 기존 세계의 갱신과 구조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새 창조다. 그리고 거룩한 예루살렘의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예루살렘!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이 구원 받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곽의 국묘나 예루살렘의 동서남북으로 난 문, 그 재료가 정금과 각종 보석이라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만 더 놀라는 것은 계21:22의 말씀이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는 말씀이다. 이 성곽에는 성전이 필요없다. 아니 성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성전이시다.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은 절대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시편 84편을 보라.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어머니 품이다. 그리움의 대상이다.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여 쇠약하다고 노래한다. 성전은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곳으로 가면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이다. 성전 신앙은 포로 생활을 하여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였다. 참새, 제비가 성전에 집 짓고 사는 것을 부러워했다. 이처럼 유대인의 성전 신앙은 독특해서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낫다고 하였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런데 성전이 보이지 않는다. 왜인가? 

이것은 어린 양이 계시기에, 어린 양으로 구원 받은 우리에겐 더 이상 벽돌이나, 의전이나, 제식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니 주님이 직접 성전이 되어주시기에 연결하는 형식과 틀도 필요하지 않다. 직접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니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 인해 새 예루살렘의 삶이란 용서와 감격, 화평이 넘치는 천국의 삶이다. 에덴 동산의 본래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다. 성전이 없었다. 예배 의복이나 예배의 의식이 없었다. 직접 소통하고 교제하며 대화하는 곳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삶, 본래 창조의 원형으로 되돌아간 회복과 새 창조의 삶이 시작된다. 어린 양 때문이다. 

3. 등을 필요없게 하는 어린 양이다. (계21:23)

계21:23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이 새 예루살렘, 거룩한 성에는 자연계의 어떤 빛도 필요없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어린 양이 등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21:25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사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민족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않는 나라다. 

밤이 없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다. 밤이란 악한 자가 날뛰고 도둑들이 활개치며 추악한 범죄들이 난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밤은 사탄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어린 양이 등이 되어 비추이는 예루살렘은 밤이 없다. 밤이 없다는 것은 거룩을 의미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 

아! 어린 양, 그 거룩한 빛 되심이여. 밤이 없다는 것은 거룩함의 뜻이며 빼앗김이 없다는 뜻이다. 생명이 더 풍성하며 생명이 침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린 양의 보좌로 흘러나오는 강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매를 맺는다. 

등이 되어 등이 필요없는 어린 양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다. 심판주가 되시고 성전 자체가 되시는 이 어린 양 예수가 나의 신랑이시다. 

계14:1에 그 어린 양 예수가 시온 산에서 우뚝 서서 14만 4천의 노래소리를 듣고 계신 대장 그리스도다. 영웅 그리스도다. 그러나 나의 님이신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른다. 어떤 유혹을 받아도 더럽히지 않는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따른다. 그 분을 위해 드리는 것이 기쁘고 희생하는 것이 기쁘다. 

나는 어린 양에게 속하였다. 그 분에게 멀어질 수 없다. 아! 이 믿는 생활의 기쁨과 찬란함이여. 예수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없다. 교회를 다니면서 시험에 들 수 없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의 가슴 벅찬 환희와 이 설레임으로 그분에게 나를 맡기는 위탁의 시간이 되라. 이 시간 “주님 마음대로 쓰세요. 가지세요.”라고 고백하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