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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이름을 부른다 (롬 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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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을 부른다 (롬 10:9-15)

아덴을 지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이 고린도입니다. 
실패한 곳에서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축복과 사역의 축복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고린도에서 우리가 함께 감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 할렐루야 교회 김승욱 목사님과 문자를 주고받는데, 저에게 이렇게 왔더군요. 
“목사님 감사 팝니다.”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죠? 그래서 제가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타가 왔는데 아주 좋은 설교 예화가 왔네요."
답장이 오기를, "ㅋㅋㅋ"

아레오바고 광장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증한 곳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 헬라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려던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여주던 곳이죠. 그런데 아덴에서의 사역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 바울의 노력에 비하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돕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사도행전 18장 5-11절에서 보게 되는데 오늘 본문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고린도를 기점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몇 가지 변화를 보게 됩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이전에는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헬라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찾은 것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유대인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을 당했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거나 비방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무래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냥 추측해 보아도 가능하지요.
첫째는, 그들이 생전 들어보지 못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문화 가운데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죠.
둘째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주’라고 선포하는 것이 반역일 수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녹녹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상처를 입었지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5-6절입니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진재혁 목사님이 쓰신 언어의 영성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가 새로운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목사에 대한 소문이 교회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목사가 사모를 때려서 사모가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소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몇 달 후 목사는 기회를 봐서 교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제 아내를 때려서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말을 하는데, 거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저는 아내를 때린 적이 없습니다. 둘째, 제 아내는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셋째, 저는 아직 결혼도 안 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잘 설명하려고 했으나 결과는 초라했습니다(행 17:34).
그런데 고린도에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격려하십니다. 먼저는 좋은 사람을 동역자로 만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네 입을 열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으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지요.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런 열매로 오늘 본문의 고백을 합니다.


복음의 능력 vs. 나의 능력

사도 바울에게서 오늘 말씀은 그의 사역에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고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복음 전도자는 아니지만, 같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목회자로서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지만, 정작 나에게 임한 복음의 능력을 믿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복음을 전하며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을 전하는 그에게 정작 복음의 능력이 없던 때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전하면서도 늘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복음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복음의 능력 앞에 사로잡히지 못한 우리의 재능은 기술적 유희가 될 수 있을지언정 복음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아덴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린도로 옮겨가 다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이제는 네가 가진 기술로가 아니라 그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9-11절의 고백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제가 구독하는 잡지 [Christianity Today 1월호]에 실린 기사가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외손자이기도 한 튤리안 차비진은 자신이 개척한 뉴시티 교회에서 착실하게 성장하는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2009년 미국 플로리다의 유명한 코럴 릿지 교회의 후임자가 됩니다. 아니, 쇠퇴해가는 그 교회를 살릴 적임자로 두 교회를 합치게 된 것이죠. 제임스 케네디가 목회하던 코럴 릿지 교회는 “전도폭발”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미국의 대형교회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7개월 후 케네디 목사의 딸을 비롯한 교인들로부터 퇴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받고, 해임을 결정하는 투표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 그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골로새서 1장을 묵상하다 깨닫습니다. 
“코럴 릿지 교회에서 뜨거운 논란에 휘말리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용납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그것들을 의지했는지 깨달았다. 그동안 속했던 교회에서, 나는 늘 인정과 용납을 받았다. 그런데 난생처음 사람들에게 미움과 불신을 받는 불편한 처지에 놓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예수님이 이미 베푸신 인정과 용납과 사랑은 제쳐놓은 채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2010년 1월부터 그는 골로새서 말씀을 가지고 새로운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됩니다. 제목이 “예수님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겪던 문제, 개인적인 문제, 가족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에게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와 현대적인 교회가 합쳐졌기에 예배를 두 가지 형식으로 드렸는데 과감하게 통합된 예배를 선포합니다.

모든 인간의 염려와 두려움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의 능력 이외에는 없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것이 아닐까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복음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종종 청년 예배 설교하면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회하지 않도록 고백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본문 10절에 있는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마음은 밭과 같은 것으로, 마음으로 믿을 때 의의 밭, 옥토를 이루고 그다음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씨를 심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믿어도 시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살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죠.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확신이 있다면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말의 유희로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만 하면 되나요? 우리가 입으로 시인만 한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해결될까요? 
아니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믿지도 않는없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입으로 시인한 것 때문에 수치를 당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집사, 권사, 장로, 목사로서의 직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밝히고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For it is with your heart that you believe and are justified, and it is with your mouth that you 
confess and are saved."(NIV)

한국 성경이나 영어 성경이나 같은 의미인데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영어에는 계속해서 'and'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고백의 연속선상에서 ‘복음의 능력’과 ‘나의 능력’이 같은 능력을 나타내게 되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본문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반복해서 강조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미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했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했는데, 다시 한 번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고 상상하기는 이런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당한 자의 삶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전까지는 능력을 받기 위한 고백이었는지 모르지만, 13절에서는 능력을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이제 용기가 생겼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은 자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끈을 놓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때마다 놓지 못했던 죄의 끈을 과감하게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변명을 듣습니까? 믿는 자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환경적인 요인에 대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결심이 무너짐에 대하여 얼마나 핑계거리가 많습니까?

술과 담배가 구원과 연관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안하지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까요? 세상의 유혹, 돈과 명예, 권력 앞에서 우리는 수없이 믿음의 절개를 버려야 하는 이유를 볼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니, 이제 사도 바울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그 능력의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누군가가 이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신의 발걸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은 바로 그런 사도 바울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을 선교하기 위해 그 땅을 밟았던 짐 엘리엇이 무참하게, 허무하게 살해당했을 때,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젊은이가 아깝게 죽었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신앙의 유산은 허무함이 아닙니다. 
그가 학창시절 책상 위에 써 놓았던 글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가 그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면 아우카 족은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복음은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무하게 죽어간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인지, 사도 바울이 밟았던 그 발자국들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습니까?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찰스 알렌 박사가 교인들을 상대로 신앙생활을 조사한 통계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충격적입니다. 교인 중에 20%는 거의 주일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25%는 거의 기도하지 않는답니다. 또 35%의 성도들은 가정에서 거의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40%의 교인들은 거의 교회를 다니면서 헌금을 드리지도 않습니다. 75%의 교인들은 거의 교회에서 무슨 책임이나 사명을 맡지 않고 다니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85%의 교인들이 거의 교회를 다니면서 지금까지 한 명도 전도해본 경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신자들이 모두 100%가 천국에 가기를 절대적으로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외모와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속은 전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면 구원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먼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런데 그런 결과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통해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과 “실천”을 통해 반복되는 생산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다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좀 상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정말 너의 발걸음이 아름답구나!”

그 좋은 소식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험한 삶들을 다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리,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수고가 다 보상을 받는 것이죠.

BTD 영성훈련을 하면서 참석한 사람들이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것은 저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말없이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격스러운 것은 은혜 받은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순간입니다. 나흘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수고한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누군가를 섬기기에는 어려운 환경을 이긴 사람일수록 감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벌써 12년 째 영성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장소를 옮기며 했습니다. 그 중의 가장 열악했던 곳이 있습니다. 정말 추웠고, 냄새가 났고, 씻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노심초사하며 마쳤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흘것은 그 기수에서 가장 헌신적인 사람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죠.

그렇게 힘들게 봉사하고 나면 이런 말을 합니다. “다시는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김없이 또 섬기기 위해 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삶이 변화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
아직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의 말씀이지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듣는 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변화와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복음을 듣게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단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 능력을 믿는 것이죠.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온 백성이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느 8:5) 
놀라운 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6절의 말씀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느니라.”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잘 풀어서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다 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격과 은혜에 사무쳐서 우는 겁니다.

8절과 9절에 보면,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우니까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오늘은 주의 성일이니 울지 마시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증거 했습니다(느 8:10).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하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말리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숫양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게 하셨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그의 순종을 보시고 숫양을 준비해 두셨다고요? 아니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숫양을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행동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늘 앞서 있습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모르고 살아가죠. 그래서 우리는 늘 행동으로 보상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사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며 노력합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람에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 있습니다. 시편 92편으로 만든 곡인데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복음을 들은 자가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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