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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눅 1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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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눅 18:18-30)

어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와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 청년이라 했으니 (마19:22)  부유한 집안 출신에다 재주도 비상하여 남보다 빨리 안정된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율법이 요구하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런 젊은이가 예수께 영생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으니 사람에게는 선한 선생님이란 호칭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여 하고 불렀으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존경하는 태도로 질문하였을까요? 이 사람이 정말 영생에 대한 관심과 간절한 소망으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의 질문이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속셈에서 나왔다는 것은 질문하는 태도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한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그 부자 청년은 애시당초 선한 선생님으로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라 불렀을 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대답하는 실력이 얼마나 될까 슬쩍 떠보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인기가 높은 고명한 랍비로부터 칭찬하는 말을 유도해 내어 사람들 앞에서 자기 명예를 한층 더 높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이 젊은 부자 관원을 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하며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연하게 칭찬하고 당신은 이미 영생을 얻기에 충분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으로 이 젊은이의 헛점을 찔렀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는 그 동안 가진 재물로 너 하고픈 일을 맘껏 하며 살았다.  그러나 네가 그렇게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물질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와 함께 다닐 수 있느냐? 그것 없이도 나를 따라 천국 백성으로 살 각오가 되었느냐?’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나눠주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도 문제는 없습니다.그에게 있는 큰 물질이 영생을 얻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중점을 두면 물질 대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마음이 있느냐는 물음이 됩니다. 네가 물질의 힘으로 살고 위로를 얻으며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을 마음이 있느냐 물으신겁니다.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돈의 보호와 지원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당장 그것을 포기하려니 돈 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아니었을까요?결국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이 그의 하나님이었고 그의 보호자였습니다. 그는 삶의 중심에 돈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그 중심이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재물 대신 하나님을 모셔야 했기 때문에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그것들을 버리고 네가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영생을 주시는 선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들이 천국이 있다고 믿기나 할까?  천국이 있다 한들 가고 싶어할까? 부자들도 나름 고민이 있고 두려움도 있겠지만 돈으로 사람의 마음도 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부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 여기가 바로 천국인데 이런 세상을 두고 또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이 좋은 것들을 버리고 가본 적도 없고 알 수 없는 세상으로는 가는 것을  솔직히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그 나라로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그 나라의 왕이 오셨을 때 두 손 들고 환영하며 맞이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변만 맴돌며 구경꾼으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지혜롭게 대답했던 어떤 서기관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칭찬을 하셨습니다(막12:34).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17:20, 21)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믿으며 받드는 사람에게는 그 나라가 이미 마음과 삶 가운데 들어와 있고 그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그 나라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부자이기 때문에 심히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을 보시고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바늘귀라는 성문이 있는데 야간에는 보안을 위해 큰 문을 막고 바늘귀라고 불리는 작은 문으로 통행하게 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몸을 낮추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으니 애써 노력을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라 설명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선하게 살아라. 진실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니 결국은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면 통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불가능’을 강조하시려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저 경건한 부자 관원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나같은 존재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란 도대체 어디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말인가 놀라며 절망합니다.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옛날 유대인들은 부자 청년이 누리는 것과 같은 물질의 복을 하나님이 주신 복의 표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재물이 늘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상급으로 받은 복이라 여깁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또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물질의 복으로 나타나야 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믿음을 더 키우든지 부자가 되어 큰 믿음을 보이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집도 없고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예수님 자신부터 복을 받지 못한 분이며 평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제자들도 모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큰 부자와 재벌이 되어 떵떵거리고 삽니다. 결국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측정하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아닙니다.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람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을 때 주님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사람들이 보는 눈과 하나님이 보시는 눈은 정말 다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능력을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 나라로 부르시기 위함이었으니 그 사명을 완성하시러 가는 순간까지 가는 곳마다 자기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과 19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 길가에서 만난 거지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것, 여리고 성에서 만난 죄많은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그 소경이 눈을 떠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게 되리라 상상이나 하였을까요? 여리고 성에 살던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세리장 삭개오 같은 인간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찬을 들으리라 생각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영생을 논하던 부자 관원은 그가 소유한 물질을 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만했던 영생의 문제마저 물질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고 여겼던 물질만능주의 신자였고 물질숭배자였을 뿐입니다.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으니 혹시라도 가던 도중에 혹은 더 나중에라도 깨달았을지도 모르니 소망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끝내 물질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주님 말씀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그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웠을 것입니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부자는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 힘으로 살다보니 그것이 없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금세 힘을 잃고 걱정과 염려로 밤을 지새웁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물질을 선하게 사용해 볼 용기도 나지 않고 그냥 한 달란트를 맡은 종처럼 땅에 묻어두고 닳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며 삽니다. 내가 가진 물질을 계산하고 또 확인하는 즐거움으로 삽니다.혹시라도 신상에 어려움이 생기면 이것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믿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물질숭배라고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집으로 모셔드린 이후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물질을 나누고  풀기로 작정했습니다. 삭개오 역시 그의 인생을 지켜주고 자존심을 지탱하게 한 것은 물질의 힘이라 믿고 살아왔습니다. 동족들에게 죄인과 매국노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위로를 받았던 힘은 손에 쥔 물질과 세리장이라는 권력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오신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들어왔을 때 그 마음이 감동되었고 그 나라 백성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관하여 질문하던 부자 관원에게는 그가 자부하며 자랑하는 율법의 계명들과 그가 믿고 의지하는 물질의 문제로 물으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모셔들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영생의 문제는 그냥 종교적인 습관으로 던져 본 질문에 불과했고 절실하게 바라던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 명예를 한층 높이고 싶었던 그는 철저하게 이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렸고 예수님도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얼른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들어가 머물고 싶다’  뜻밖의 청을 받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예수님은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가진 재물에 대하여 언급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열린 삭개오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만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쭐댔던 부자 관원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이 물질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바뀐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욕심쟁이 부자 삭개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금쟁이의 우두머리 세리장 삭개오를 이렇게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절망하며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도무지 개선의 희망이 없다’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은 포기하지만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그 사람을 부르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찾아 온 부자 관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 신자였고 하나님 나라의 일등석에 앉을 사람이라 자신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누가 봐도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버림 받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분을 보고 싶어하는 순간 그는 그 나라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이고 섬기며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되어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이미 그 나라 백성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셨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아니라 거역하겠습니까? 
  
큰 도시 여리고 성에는 삭개오보다 훨씬 더 의롭고 존경 받는 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삭개오를 택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 아래 멈추고 그를 부르셨던 주님은 나의 인생 속에 찾아오셨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버려진 인생 세리장 삭개오를 바꾸신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시고 나의 인생관을 새롭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고 나를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가시도록 기쁨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은 나의 능력과 나의 선함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물론 삭개오가 주님 얼굴 한 번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이와 지위와 체면 같은 것 생각할 겨를 없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만나면 내 인생에 무엇인가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주님은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조롱당하며 버림받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찾아주시고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시며 한 인간으로 존중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세리장 삭개오는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버려진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으로 고치셨습니다. 정말 불치의 환자는 자기 만족과 의로움에 젖어 살았던 부자 관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지만 그가 고민하고 떠나는 순간 그 나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부자 관원과 바디매오나 삭개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만나고도 변화를 거절한 사람들은 그 능력을 체험할 기회를 잃었지만 예수께 나와 고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처럼(눅5:32) 우리 주님은 사람의 힘으로 구원받기 불가능한 죄인을 불러 완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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