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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인의 정신질환과 믿음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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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정신질환과 믿음 (막 4:35-41)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첫째로 질병은 치유해야 될 대상이라는 사상을 낳았습니다. 질병은 숙명이 아니요 굴복의 대상이 아니요 질병은 고쳐야 될 존재라는 사상입니다. 사람은 건강할 수 있고 건강할 권리가 있고 질병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고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이 의학의 발전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 영향은 건강한 인간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영적인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건강한 몸 · 건강한 인생 · 건강한 마음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극복하셨습니다. 영혼은 잘되어야 되지만 육신은 고생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한 가지 부작용을 낳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병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인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인가? 왜 병이 낫지 않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셨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니 내가 좀 더 잘 믿으면 나을 것인가? 이것은 억지를 낳습니다. 고쳐 주실 테니까 이런 식으로 상식을 초월한 억지를 낳는 경우가 많고 많은 부작용을 낳고 상처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제는 천국 갈 때가 됐으니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되는데 끝까지 나으려고만 애를 쓰다보니까 정작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믿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인 그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돕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앙을 헤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병이 낫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병이 낫지 않는다. 신앙을 돕는 것이 아닌 신앙을 헤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축사 사역을 하셨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노출시키셨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있고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크나큰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예수님에게는 이와 같은 귀신을 내쫓을 권세가 있다는 사실, 예수님의 권세가 이처럼 크다는 사실, 이전에 어느 누구도 보유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권세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정신질환은 귀신에 의한 것인가. 오랜 세월동안 정신질환자는 귀신 들린 것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정신의학이 제대로 발달하는데 방해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병이 들면 그 병이 든 것도 괴로운데 병이 들은 책임까지 묻습니다. 예컨대 눈이 나빠지면, 애가 근시가 되면 엄마가 대번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거봐라. 어두운 데서 책보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지?’ 눈이 나빠진 것도 괴로운데 본인의 책임이 되는 것이지요. 성인병이 걸리면 사람들이 ‘거봐라. 그만 먹고 운동하라고 했지?’ 암에 걸리면 ‘스트레스를 관리하라고 했지?’ 병이 걸리는 것도 괴로운데 병이 걸린 책임까지 묻습니다. 

정신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해서 병이 걸리는 게 아닌 것처럼 자기가 원해서 정신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데 마치 본인의 탓인 것처럼 자기를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이렇지. 내가 기도와 말씀만 있으면 나을 수 있을 텐데….’ 

성경에는 정신질환이라는 인식이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합니다. 구약에 사울 왕이 하나님이 그에게 악령을 보내셔서 괴로워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울의 질병은 오늘날 말로 하면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악신을 보내셔서 사울이 괴로워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성경구절은 있지만 정신질환자를 고쳤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인간의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 당시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질환 뿐만이 아니고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라든가 예술에 대해서라든가 경제에 대해서라든가 금융에 대해서도 성경은 별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인류가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성경의 연구와 해석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인의 삶과 상황에 성경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서로 멀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해석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이전에 먼저 성경말씀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말씀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은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몸은 더 편해졌습니다. 우리의 몸은 더 건강해졌습니다. 더 오래 삽니다. 삶이 더 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더 불안하고 우울하고 괴롭습니다. 실제로 정신질환이 더 증가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도 있었는데 과거에는 그것을 쉬쉬했던 것인지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숨기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질병에 따른 수치심 때문입니다. 마치 미친 사람 취급받을까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면 미친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을까봐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이미 인구의 2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정신질환이 더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귀신들림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런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그래서 나으려고 애를 씁니다. 귀신을 쫓아내면 나을까 애를 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문제만 더 복잡해집니다. 내가 마음이 괴롭다는 사실도 괴로운데 귀신까지 들었다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엄청난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괴로운 것도 괴로워 죽겠는데 믿음이 없다고, 그리고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그리고 귀신이 들려서 그렇다고…. 

정말로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해서 말한다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섣부른 신앙적인 지식으로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돕지 못하고 그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하여 좀 더 긍휼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리고 이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가 좀 더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있어서 권위 있는 말씀을 드릴 자격도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에는 광풍이 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경험은 제자들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경험입니다. 늘 밤에 광풍이 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날 저물 때에’ 저녁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낮에 일어났다면 좀 더 이해를 하겠는데 해가 진 이후에 두려움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나이와 상관하지 않고 성별에 상관하지 않고 신앙의 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이들의 경험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 남자이고 예수님의 사도들이고 어른이고 바다에서 뼈가 굵은 어부들이지만 광풍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에요. 

왜 인간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불안이 있느냐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피로사회>라는 책을 쓴 한병철 교수가 말하기를 ‘현대인이 바깥의 문제를 해결했더니 안의 문제가 부각되었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외부의 문제와 싸울 때가 더 편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질병 이런 문제는 외부적인 문제입니다. 외부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사람이 이제는 자기 속에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제일 혹독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나에게 제일 혹독한 주인이 되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일 만족하지 못합니다.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제일 부끄러워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푸쉬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피로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병은 불면을 가져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고물에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깨어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다면 예수님처럼 잤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밤에 자지 못하고 광풍에 시달립니다. 두려워합니다. 누군가 깨울 대상이 있는 것이 다행이에요. 사람이 밤에 자지 못할 때 누구를 깨울 수 있습니까. 배우자를 깨우겠습니까. 친구를 깨우겠습니까.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유일한 벗은 TV와 인터넷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평소에 봐야 재미있지 밤에 남들이 잘 때 보는 TV나 인터넷은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한 가지 치유책을 제시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너희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예수님이 ‘무서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게 아니고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열린 질문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예수님도 물어보신 거예요. 

‘Why are you afraid?’ 이것은 인간에게 주님이 물으시는 질문이에요. 예수님도 궁금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왜 인간은 이처럼 두려워하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두고두고 찾아야 될 부분입니다. 왜 우리는 이처럼 두려워하는가. 왜 우리는 불안해하는가? 왜 우리는 홀로 있지 못하는가? 정신과 상담이 다 그 이유를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되지만 이유를 찾는 것만이 치유를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의 병의 원인을 아는 것이 병 자체를 치료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재발을 방지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병이 발생한 다음에는 원인을 아는 것이 그 병 자체를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마음의 질병의 원인을 아는 것도 그 자체가 치유를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에요. 어렸을 때의 상처 · 충격 · 아픔 · 고독함 그리고 어떤 경우는 우리 뇌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호르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아직 밝혀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면 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두려워하느냐’의 답변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인 치료는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예수님은 의학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약물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병원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기도와 상담과 말씀을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만나를 먹었지만 만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요 궁극적인 해결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 풍성히 수확을 거두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대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게 바람이든 바다든 귀신이든 어두움이든 예수님은 그것을 꾸짖으셨어요. 그랬더니 잠잠해졌어요. 

인간은 마음의 평강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을 예수님이 가져오셨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배를 타고 가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배를 타고 계십니다. 우리는 같이 가고 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깨우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깨우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람을 꾸짖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광풍, 문자 그대로 미친바람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이름 앞에 광풍은 잠잠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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