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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무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삼상 17:32-49, 막 4:35-41, 고후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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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삼상 17:32-49, 막 4:35-41, 고후 6:1-13)


<거센 풍랑 만난 인생 배>
   
오늘은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입니다. 먼저 오늘 읽은 마가복음을 함께 보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거센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37절을 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잔잔하던 바다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어나 무섭게 파도를 흔들어 놓습니다. 바닷물이 배 안에 가득 찹니다. 엄청난 위기가 닥친 것이지요!
   
우리 인생을 항해로 비유할 때 언제나 풍랑의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나 순풍에 돛을 달고 안전하게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한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고물, 즉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여기 예수님은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된 상황에서도 태연히 잠을 주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8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다급하게 깨우며 울부짖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의료선교를 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흑인들을 돌보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온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가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아주다가 현관에서 깜빡 낮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슈바이처 박사를 깨웁니다. “박사님, 제발 잠 좀 깨세요! 제가 아픕니다. 제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습니까?”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제자들이 했던 말과 너무 비슷하지요.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아주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빡 잠이 든 슈바이처에게 왜 자기를 돌보아주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다니. 예수님이 늘 돌보아주심에도 그것을 모르는 제자들이나, 이 흑인 형제나 사정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깨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명령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명령하셨더니 즉시 바람이 그치고 언제 그랬느냐 싶게도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이제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예수님은 호들갑을 떤 제자들에게 젊잖게 충고하십니다. 40절을 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왜 두려워 떠는가?>
   
풍랑을 만난 배는 제자들 홀로 탄 배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함께 타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배도 우리 홀로 탄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배의 선장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 배에 풍랑이 닥쳐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두려워 떱니다.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 떨며 다급하게 주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풍랑 한 가운데에서도 태연히 누워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난리가 났습니다.
   
‘잠자는 예수님’과 ‘두려워 떠는 제자들’! 여기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풍랑 한 가운데에서도 태평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풍랑 만난 배 안에서 자는 것과 두려워 떠는 것의 차이는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여기 4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서워’한다는 말은 헬라원어로 ‘delios’입니다. 반면에 41절에서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할 때의 두려움은 ‘phobos’입니다. 이 두 말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서움, 즉 ‘delios’는 내적인 결함 때문에 오는 무서움입니다. 예를 들면 용기가 부족해서 무서워 떨 때 이 ‘delios’라는 말을 씁니다. 소심하거나 겁이 많아서 무서워 할 때, 제자들의 경우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무서움을 느낄 때 ‘delios’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와 달리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해서 서로 말했을 때의 두려움 ‘phobos’는 외적인 상황 때문에 일어나는 두려움입니다.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 상황, 제자들에게는 사나운 풍랑이라는 외적 상황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때 이 ‘phobos’라는 표현을 씁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delios,’ 즉 내적 원인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을 지적하시는 반면에 제자들은 풍랑이라는 외적 상황 때문에 생기는 ‘phobos’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수님이 보실 때 두려움은 외적 상황 보다는 내적 결함, 즉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현상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문제는 2%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98%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40%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35%는 염려해봤자 바뀌지 않을 일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15%는 예상했던 것보다 얼마든지 더 좋은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그리고 8%는 아주 사소한,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나와 함께 배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풍랑을 무서워하고 파선을 걱정하십니까? 진정한 두려움은 외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적 요인, 즉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믿음과 용기가 부족해서 주변 사람들을 다 원수로 생각하면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들이 원수가 되고 맙니다. 반대로 여러분을 괴롭히는 원수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친구로 생각하면 원수가 친구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요, 내적 태도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품고 세상을 품으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안에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자!>
   
이 세상에는 분명히 시련이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찾아오고, 때로 배가 난파되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시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긴장하고 주님을 찾게 됩니다.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요. 노아가 탄 방주에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짐승들이 다 탔습니다. 노아 일가족이 어떻게 그 악취를 다 참아낼 수 있었을까요? 방주 바깥에 무섭게 몰아치는 풍랑에 신경을 쓰다 보니 악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요!(If it weren’t for the storm outside, we could not stand the stench within!)
   
무엇보다도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옳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주무시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 예수님이 주무시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 나라와 세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승하셔서 주무십니다. 우리는 풍랑을 만나든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사무엘상의 말씀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주무시고 계셨던 하나님을 깨운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숙적인 블레셋과 전투를 할 때 거인 장수 골리앗 때문에 옴짝달싹 하지 못합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온덴 간데없이 철저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2미터 80센티미터가 넘는 골리앗 장군에 기가 죽어서 누구 하나 입도 벙끗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골리앗이라는 외적 대상이 아님에도, 이스라엘은 이 골리앗 때문에 ‘phobos,’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위로 사울 임금으로부터 모든 장군들, 휘하의 병졸에 이르기까지 골리앗이라는 외적 대상으로 인해서 ‘phobos’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이 정말 두려워 떠는 이유는 골리앗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에 찾아온 ‘delios’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었기 때문에 찾아온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스라엘 온 진영에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이 입혀주는 왕의 놋투구와 갑옷을 마다하고 목동이 쓰는 지팡이 하나와 조약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갔습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완전무장한 거인 장수 골리앗에게 소년 다윗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45-47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나아간 다윗은 겨우 물맷돌 하나를 골리앗의 이마에 던져 쓰러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안에 주무시는 하나님을 순식간에 깨웠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가정 안에, 직장 안에, 아니 우리 교회 안에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깨운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깨우는 순간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이 사납게 뛰노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잠잠하라 명령하셨더니 바다가 이내 잔잔해졌습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 지방의 각종 신화에서 바다를 다스리는 신을 혼돈의 신으로 불렀습니다. 바다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잔잔하던 바다가 언제 미친 듯이 사나운 파도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도 바다를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을 깨울 때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던 바다를 주님은 순식간에 잠재우십니다. 그래서 막 4: 12절에 제자들도 다 깜짝 놀라 두려워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옳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깨우는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던 인생의 풍파가 이와 같이 잠잠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깨울 때, 약한 자 같으나 강하고>
   
저는 이제 오늘 봉독한 고린도후서 6장 말씀으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바울은 목회가 사람의 능력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약하고, 두렵고 떨 때 하나님의 능력은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한 목회자가 설교할 때 자신의 지혜나 말솜씨나 뽐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자신을 자랑하는 일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비롯한 모든 목회의 중점 사항은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자세는 세례 요한의 자세일 것입니다. “주님이 흥하기 위해서 나는 망해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나, 아니 여기 예배 시간에 기도하시는 장로님이나 권사님들, 성경봉독하시는 모든 분들, 심지어 찬양대원들까지 우리 안에 주무시는 주님을 끝없이 깨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능력이나 자랑거리가 아닌 주님의 능력, 주님의 영광만이 끝없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비하게도 내가 약해지고 두렵고 떨릴 때 주님의 능력은 더욱 더 놀랍게 역사하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고후 6: 9-10절을 봅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날마다 우리 안에 주무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깨우는 사람의 삶이 이와 같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42년 독일 전역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무서운 페스트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어린 딸 막달레네 역시 이 역병으로 죽었습니다. 한 해 전에 루터의 또 다른 딸 엘리자베스가 역병으로 죽은 뒤 연이어 두 딸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극한 슬픔을 딛고 일어선 루터의 모습을 그 유명한 ‘탁상담화’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루터의 어린 딸이 죽어서 관에 안치되었을 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어린 딸 막달레네야, 차라리 너에게 얼마니 잘 됐니. 너는 이제 다시 일어나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야. 그래 하늘의 해처럼 빛나겠지. 관이 너를 가둘 수는 없단다. 관은 너에게 너무 작단다.’ 장례식 때 조문객들이 찾아와 루터를 진심으로 위로했을 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오히려 기뻐하셔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잃은 제 딸 엘리자베스와 함께 또 하나의 천사를 천국에 보냅니다.” 
  
루터야 말로 사나운 풍랑이 불어와 그가 탄 배 전체가 난파하기 일보 직전에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던 사람입니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우리의 가정 깊은 곳에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우리의 직장과 사업체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나라 안에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웁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깨어나시는 순간,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물리쳤듯이, 사납게 울부짖던 파도가 잔잔해졌듯이 승리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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