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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막.중.심 (눅 10: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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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중.심 (눅 10:30-36)

장애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 어렵게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병원 정밀검사 결과 아이에게서 심각한 장애가 발견되었습니다. 설령 아이가 죽지 않고 태어난다 할지라도 15분도 채 살기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의사의 인공유산 제안을 거절하고, 그날부터 태중의 아이를 위해 살았습니다. 부부는 이 아이에게 루카스(Lucas)라는 태명을 붙였습니다. 무엇보다 루카스를 놓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부부는 그렇게도 바라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 루카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15분, 30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아니 하루가 지나도록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위 사람들이 이런 루카스를 바라보고 환호하고 축복하며, 위로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루카스는 그렇게 17일을 살아냈습니다. 

17일 후, 작디작은 관 안에 루카스의 어여쁜 시신이 뉘어졌습니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또 슬퍼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 장애인 부부가 루카스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아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내 아들 루카스에게 감사합니다. 그가 태어났기에 내가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 실화는 장애인을 섬기는 공동체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 위치한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은 헨리 나우웬이란 영성신학자가 저명한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들과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예외 없이 그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루카스 이야기를 듣고,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루카스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은 모두 장애인입니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난 루카스들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가 있었듯이 우리 인생이 걸어가는, 아니 걸어가야만 하는 길에는 예외없이 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엄마의 태중에도 강도가 있지 않았습니까! 특히 죽음이란 강도를 피할 자가 있습니까? 

강도를 만나니 모두 다 피하고, 지나가고, 멀리합니다(눅 10:31-32). 강도를 만나 깊은 상처를 입고 길가에 내던져진 상태가 되니 모두가 부담스러워합니다. 드디어 나는 점점 혼자 고립됩니다. 죽음이라는 강도 앞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런 운명적 존재가 인생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다가오는 분이 계십니다. 치명적 장애로 소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태중에서부터 이름을 지어 불러주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이, 인생길에서 이런 저런 강도를 만나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나보다 더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내게 다가와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십니다(눅 10:34). 

주막이란 어떤 곳입니까? 주막은 먼 거리를 걸어온 나그네, 길손들이 쉼을 얻는 곳입니다. 그냥 평상(平床) 같은 곳에 함께 앉아 처음 본 길손들이지만 마치 죽마고우들처럼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고 있기에 강도가 쉽게 달려들지 못합니다. 화려하거나 문턱이 높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쉽게, 부담 없이 분위기에 젖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막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주막(pandocei'on,판도케이온)이란 이 단어는 ‘공중, 다함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그 어디로부터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설명이 아닙니까! 에클레시아(ejkklhsiva)와 그 의미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란 원래 있는 곳, 처소에서 이끌려나온,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인데, 이것이 나중에 교회로 번역되었습니다.(마 16:18, 엡1:22, 몬1:2, 행10:28). 

때문에 ‘주막’은 ‘교회’와 가장 가까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판도케이온을 ‘여관, 객실’로 번역하지 않고, ‘주막’이라고 한 것은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강도 만난 자들이 쉼을 얻고, 캄캄한 밤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또 가시면서 이 교회를 사역자들에게 맡겨 치리하게 하셨습니다(눅 10:35). 여기 ‘주막주인’은 사실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제가 이 ‘충정주막’에서 만나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1989년 6월 4일, 저는 이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이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강도 만난 자들을 이곳으로 이끄시고, 돌보아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짧지 않는 세월, 저의 젊음, 청춘을 이곳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목사인 제가 여러분들을 돌보았다기보다는 여러분들이 저를 돌봐주고, 섬겨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교회를 옮길 때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었습니다. 일산의 많은 분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온 맘으로 교회를 섬겨주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고, 교회가 있는 줄 알고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지상 교회, 주막입니다. 주막은 결코 완벽하지 않습니다. 구멍도 송송 나고, 벽도 헐었습니다. 서까래도 휘어졌습니다. 호텔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라 그야말로 주막입니다. 목사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모여 있기에 이런 저런 냄새도 풍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강도 만난 우리를 친히 이곳, 주막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걸어가며 항상 성막중심이었듯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항상 교회중심이어야 합니다. 치명적인 장애로 태어나 17일 만에 부모의 가슴을 못을 박고 떠난 아이 루카스와 같은 나를 향해 아버지가 어떻게, 뭐라고 하십니까? ‘아버지가 되게 해줘서 고맙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 앞에 어떤 고백을 드릴 때 그분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우리 아버지로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강도 만난 내 곁에, 철저히 혼자 내던져진 내 곁에 아버지로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고백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가장 귀한 고백입니다. 모쪼록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 이 주막에서 이 고백을 그분께 올려드리는 신실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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