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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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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눅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은 맥추 감사절입니다. 맥추 감사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한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히브리 원어로는 '하그 하카츠르'이며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은 곡물을 수확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추수 감사절의 하나입니다. 즉 이날은 보리와 모맥 추수 직후에 거행되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절기인 칠칠절과 관련을 갖는 날입니다. 칠칠절은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하기 전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유월절 후 첫 안식일 그 다음날인 초실절 절기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대의 종교력으로 이 날은 7주 전에 시작한 곡물 추수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로서, 엄숙한 가운데 하루 동안 행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곡물 추수 감사제를 맥추절이라고 하여 하나의 절기로 기념하였습니다.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된 것은 그들을 돌보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거둔 곡물의 처음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신 26:1-11).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땅에서 생산된 소산물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율법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드린 곡식단은 제사장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가 유대의 전통 절기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연례적인 순례 축제로 정착된 것은 그보다 뒤인 솔로몬 시대였습니다(대하 12-14장). 솔로몬은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곳에서 번제를 드렸으며, 모세가 명한 규례대로 무교절, 초막절과 함께 칠칠절, 즉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유대의 남자들은 이 절기에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도시의 경계까지 나와 있다가 예물을 드리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이 도시의 경계에 이르면 그들을 성전으로 안내했습니다. 

한편, 봉헌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첫 열매의 예물을 바칠 때 신 26:3-10의 말씀을 낭송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맥추절은 신약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인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이날은 성령 강림일로 기념하게 되었고, 교회에 있어 맥추절의 의미는 약화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가 일년의 전반부를 결산하는 의미에서 7월 첫 주일에 맥추 감사 절기를 지키는 전통을 지켜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감사 생활의 중요성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주의하여 봅시다.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았지만,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명 뿐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7-18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자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큰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 

감사할 줄 모르는 9명은 육체의 치유만을 경험했지만, 감사할 줄 아는 자는 육체의 병 뿐 아니라 구원의 복까지 받았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응답임과 동시에 더 큰 은혜를 받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받은 은혜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감사는 받은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전 마지막 순회 전도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한 촌에서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이 병은 저주의 상징으로서, 병에 걸린 자는 일반인과는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본문의 환자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2절) 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 이들의 믿음과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선생님(랍비)이라 부른 것은 예수님이 병 고칠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고,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놀랍게도 나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병환자들로서 그것도 10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와 사례한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은혜가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나 쉽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평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이 중요하고 공기도 중요하며 건강이 소중하지만 평소에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뭄의 고통을 당할 때에 비로소 물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공해로 오염된 공기를 경험해야 비로소 맑은 공기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육신에 병이 들어 신음하게 될 때 비로소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는 엄청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은 모두 무상(無償)입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공히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며 산과 바다의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더욱 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소망의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이제 영원한 나라를 상속케 해 주셨습니다. 찬송가 304장 3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우리 모두 받은 은혜의 엄청난 가치를 더욱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다.

16절=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다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한 자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자인지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한 자세로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마운 일을 만났다고 해서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진정으로 깨닫는 자만이 엎드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받았던 멸시와 천대를 잘 알고 있습니다. B.C. 722년에 사마리아성이 앗수르에 함락된 후 그 성의 유력한 자들은 살해당하거나 먼 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고, 남아있던 천민들은 타지에서부터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아마도 같은 나병환자로서 격리 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9명(유대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는 마음자세가 달랐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귀에는 주님의 통탄해 하시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말씀은 향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과 접촉하여 큰 은혜를 체험할 것이지만, 육적 차원에서만 이를 받아들이고 주님께 진정한 감사를 돌리지 않음으로써,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임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는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이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인격적 교류를 누리며 진정한 천국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나와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입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제법 크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실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나의 부모님도,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 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은 실로 큰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침돌입니다.  

병들고 늙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와 무가치함을 아는 자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 졌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즈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모르긴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이 적을 것 같아요.”

성도 여러분! 나의 의지와 욕망이 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공간은 좁아집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부족과 나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크게 됩니다.

주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은 굳이 이방인(알로게네스, 다른 혈통의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그토록 무가치하게 여기던 이방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을 깊이 깨닫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다. 

누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아는 자이고,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베푸신 수고와 희생을 깊이 깨닫는 자입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수고와 눈물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매우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는 서점으로 달려가 아들이 원하는 책을 사다주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소년이 밤중에 어머니의 머리를 풀어보니 머리카락이 몽땅 잘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팔아 아들의 책을 샀던 것입니다. 소년은 삭발모정(削髮母情)에 목을 놓아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이런 사랑을 알게 되는 자식은 부모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수고를 알면 알수록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도 이와 같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어찌 감사치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징계받으심, 그가 맞은 채찍의 고통은 모두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희생의 사랑을 생각하면 , 오직 감사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천에게는 사랑의 사건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의 시간은 전천후 사랑과 밀월의 시간입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유익함을 이룹니다.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서 주어지거나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마음 속에서 샘솟는 기쁨인 것입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닙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 사랑이 아닙니다.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자이고 지금도 끊임없이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상속시켜 주실 주님, 지금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

이런 은혜를 깨달아 아는 그리스도인은 감사의 능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가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늘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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