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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 (롬 1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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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롬 15:13-21)

막으셔도

로마는 사도 바울에게 특별한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던 곳이 로마였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라고 되어 있지요. 결국, 마지막에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서 2년여를 머물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소원하던 로마에는 가지 못했지만, 로마교회와 사도 바울 사이에 교제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쓰는데,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그곳에서 귀한 믿음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나죠, 그런데 그들을 로마에 보냅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보세요.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가장 사랑했던 동역자를 보내며 문안하게 했던 곳이 로마입니다. 로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틋한 사랑은, 어쩌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는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소망과 인내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 역시 교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는 A.D. 56~57년경으로 추측합니다. 가장 완숙한 그의 신학적 결정체를 담아내고 있고요.
로마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며 내걸었던 정책이 'pax Romana'이었습니다. 피지배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관용하는 것이죠, 단지 황제를 숭배한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42-54)때 전도를 금지합니다. 글라우디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한 듯합니다(행 18:2).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로마인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자들은 절대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죠.

그런데 몇 년 후 글라우디오는 감옥에 갇히고 그가 양자로 입양한 후계자 네로가 왕위를 차지합니다. 네로는 다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의 귀환을 허용합니다. 집을 되찾고 거주 구역을 재건한 유대인 공동체는 더 이상의 말썽을 피하려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 됩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상황이죠. 고린도와 아덴에서도 있었던 일들이 로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 중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로마는 당시 귀족과 특권층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노예들과 도시 빈민들에게 아주 비참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더더욱 그런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의 복음, 은혜의 복음, 의의 복음은 로마 교인들에게 무척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64년에 시작될 네로 황제의 큰 핍박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의 길이 막혀도 그의 사역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늘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린도와 아덴에서의 경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오늘 본문 16절을 보세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죠.
사도행전 17~18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겠습니까?
유대인들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로마에 갈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소원은 자신이 생각했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계속해서 진행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선을 행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나와 방법이 다를 뿐이죠.

얼마 전 어떤 교인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라는 것이죠. 친척들의 모임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 못살면 체면이 안 선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축복만을 누리면 영성이 떨어집니다. 고난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로마서의 복음이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복음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복음의 능력은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국의 한 청년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지망했습니다. 수속절차를 거의 끝내고 마지막으로 출발을 확인하려고 뉴욕에 갔는데, 거기서 그만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합격된 것입니다. 이유는 그의 부인이 아프리카의 기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체질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부인과 함께 고향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의 각오를 했는데 이루지 못하니 실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가지는 못하지만, 돈을 열심히 벌어서 선교사의 일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는데 부업으로 교회의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즙을 만드는 사업을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그 사업을 인계받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돈을 쓰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사업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심한 대로 사업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정성껏 헌금하였습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먼 이국에서 주님께 인도되는 것을 기뻐하며 거액의 선교비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바로 Welch이었고 그가 만든 포도즙이 그 유명한 Welch 포도즙입니다. 지금도 그의 가족들은 좋은 포도즙을 계속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참 멋진 고백이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에게서 ‘로마’는 막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역의 지평이었습니다.
그의 갈망과 하나님의 길이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막혔던 길이 뻥 뚫려 있음을 발견하는 것 말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3절)

“은혜”가 혔는엇인가요? 막혔지만, 더 이상 막히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에는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에게 그의 갈망이 막혀있으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위해 사역하고 있음을 간증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로마에 가지 못했지만,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 ‘소망’을 이야기하고, ‘인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랑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생의 수치를 자랑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지 못한 것,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버림을 받고 능욕을 당하며 매를 맞았던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19절 말씀을 보세요.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7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인생이 자랑스럽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은 내 꿈이 깨어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알지 못하면,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섬기는 일”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섬김이란 부리는 자의 능력이 드러나고, 부리는 자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초창기 BTD영성 훈련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섬기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영성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다른 community를 통해 훈련받고 온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섬긴다고 하는데 방법이 다른 것 때문에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꼭 이렇게 싸우면서 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 일을 계속하게 하였던 것은,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더라는 것이죠. 그것이 저로 하여금 멈출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영성훈련이 이제 13년이 됩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저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영성훈련을 통해, 중국, 사할린, 뉴질랜드, 제주도, 동경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CTS, CBS 직원들에게, 그리고 많은 한국교회 사모, 청년, 대학생,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BTD 영성훈련을 보면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팀멤버들의 봉사를 보면 철저한 순종과 섬김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갈등을 안고 싸우던 때, 힘들던 때도 자랑스럽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섬김과 신앙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루어 놓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 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움의 방식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지난 두 주를 통해 배웠지요.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그가 그렇게 열심히 변증했던 것은 그가 가졌던 학문 때문에 가능했고, 고린도에서 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회당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목회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시가 있는 것을 잘 용납할 수 없었죠. 그가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병이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그가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 역시, 그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봐도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의 영성과 그의 재능,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결과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이 그가 바로 살아 있고 사역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멋진 말인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건”을 보고 판단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사건”을 “과정”으로 봅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되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19절입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나놓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본질적인 것에는 부수적인 사건들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본질에 집착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린다는 것이죠.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기적을 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들을 통해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셨던 것이죠.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병이 나아야, 기적이 일어나야 복음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표적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그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내로 가서 설교를 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가 걸어 다니며 시장의 갖가지 모습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둘이서 나누고 또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도 대화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프란시스의 제자가 깜짝 놀라서 외쳤습니다.
"어쩌죠.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걸 깜빡 잊었어요." 

그러자 프란시스가 웃으며 제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시내를 걸어 다니던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설교를 한 것이요.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표정과 행동들을 보았을 거요. 그것이 바로 우서의 설교였소."
그리고 나서 프란시스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것을 기억해 두시오. 우리가 만일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설교의 참뜻을 잃어버리고 있는 거요."


사명

오늘 본문의 결론은 어쩌면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쉬운 길을 가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쉬운 길을 갈 것인지 어려운 길을 갈 것인지. 그런데 어려운 길을 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도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좋은 교인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교인이 되기까지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들었을 것이고,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는 과정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역사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를 키우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들어서 일대일 제자양육을 강조하고, 모든 목회자로 하여금 목양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양하지 않는 교인들, 생명을 잉태해 보지 않은 교인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가 생명을 얻은 기쁨은 늘, 생명에 빚진 자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아주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틴 니뮐라라는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라는 것을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대해 그는 히틀러를 비방하기보다는 독일 교회와 하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소리가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은. 그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에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뒤틀려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인생의 자리에서 악을 쓰고 있는 이웃들 그들이 느끼는 삶의 절망에 저와 당신은 책임이 없습니까?

사도 바울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듣지 못한 자가 듣게 되고, 보지 못한 자가 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 때문에 말입니다.

사명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당신에게 펼쳐진 모든 삶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음을 믿으며,
결코 놓지 못할 일이 있다는 것이죠.

지난주 교회 리모델링을 놓고 최종적인 회의를 했습니다. 
천장의 공조 시스템 공사를 다시 해야 하고, 3층의 로비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사각으로 되어 있는 성가대석, 2~3층 통로를 만드는 일,
영상장비, 음향장비를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 사용한다 해도 꽤 돈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리고 교회가 더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기로 선포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더는 교회를 짓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사명이 무엇인가요?
요즘 중국에서, 북한에서, 전국 각지에서 세계 곳곳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며, 우리 교회의 사명은 큰 건물을 가진 큰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영향력을 가진 큰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다시 고치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이 아직 알지 못하지만, 너무 사치하다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큰 본당과 3~8층 까지를 새롭게 고치는데 17억이 드는 것, 냉난방을 포함한 전체 공조 시스템을 고치는데 17억 정도가 소요되는 것,
음향과 영상, 조명 장비를 교체하고 보완하는데 37억 정도의 돈이 드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쓰실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했습니다. 
약 70억의 가까운 헌금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더 옳은 일은 아닐지,
제가 교인들과 함께 그 정도의 돈을 가지고 건물을 사서 나가면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을까도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 교회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교회가 여기에 세워진 이유, 무엇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지 말입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방송국과 배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 목회자 없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 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DVD로 드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에 주신 특별한 사명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사명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는 무엇인가요?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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