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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감사가 넘치는 교회와 성도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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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넘치는 교회와 성도 (빌 1:3-11)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전반기 동안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감사가 무엇입니까? 감사는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감사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감사라는 단어가 366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윤년까지 염두에 두고 일 년에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하는 삶이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일어나는 변화중의 하나는 감사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시고 계심을 발견하고 감사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감사는 단순한 예절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준 높은 신앙입니다.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어느 경우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그 감사를 어떻게 표현하고 드리는지 보는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통하여 성숙한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개인적으로도 감사의 내용이 많겠지만 빌립보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특별히 교회적인 감사의 내용을 찾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의 맨 앞부분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서두에 이렇게 시작합니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아주 극적인 사도 바울의 애정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 4:1절에서는 빌립보교회에 대한 더 적극적인 사랑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고, 이 교회를 통해 기쁨과 감사를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제일 먼저 세운 교회입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바울은 처음에는 아시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밤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중에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고발을 당해 맞고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결국은 쫓기듯 빌립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에서도 힘써 전도를 했기 때문에 빌립보에 구원받는 영혼이 생기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이 자랐고, 성도들이 굳게 믿음을 지키면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고생을 한다고 해서 다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을 아닙니다. 어떤 일은 시간낭비, 정력낭비, 재물낭비로 끝나는 헛된 수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빌립보에서의 고생은 큰 보람을 느끼게 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의 감사가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봅니다. 감사해야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교회를 돌아보면 역시 감사할 이유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107년 전에 이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교회초창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6,25전쟁 때에는 교회가 포격으로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단의 분열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교회적인 어려움으로 어지러운 교회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격과 감사를 올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지켜 주셨고,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믿음과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건강한 교회, 균형 잡힌 교회가 되고, 무엇보다 이 지역에 좋은 소문나는 교회가 된 줄로 확신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과 믿음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고 앞으로도 계속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 감사뿐만이 아니라 항상 기쁨이 넘쳤습니다. 

빌립보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쁨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전체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기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빌립보교회를 통해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5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의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동시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여에 있었습니다. 본문 7절 하반절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참여’ 라는 말은 ‘교제’ 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면서도 조금 다른 말입니다. 

‘교제’는 가벼운 만남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식사나 차 한 번 같이 마시고 그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인사 몇 번 하고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여’는 좀 더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서로 깊이 나누는 교제를 의미하고, 어떤 일을 함께 하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즉 시간과 물질과 몸과 생명을 드려서 전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봉사하는 일 등을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과 은혜 안에서 교제했고, 바울의 고난과 선교 사역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교제와 참여는 교회 생활에 있어서,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배운 것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주 안 있으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데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이 용서의 경험 때문에 우리는 주안에서 서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연령을 초월합니다. 소유의 정도를 초월합니다. 누구와도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교제는 유유상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끼리끼리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과 교제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있는 사람과 교제를 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과 교제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이것을 초월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 나아가 복음 안에서, 믿음 안에서 봉사와 전도와 헌신의 삶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도 간의 관계로서의 교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함을 통한 진정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교회처럼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깊은 관계를 가져야하고, 그 깊은 관계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으로 넓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에는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것을 얻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때문에 이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즉 예수 때문에 여러분이 있고, 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알지 못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때문에 우리가 형제자매가 되고 이런 교제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교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로 맺어준 이 중요한 관계인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가 소중한 분들입니다. 한 번 앞, 뒤, 좌우로 인사하세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6절을 보세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착한 일은 남을 돕는 일입니다. 교회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참여한 것을 가리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교제와 참여가 진하게 될 때 교제와 참여는 사랑의 봉사로 나타납니다. 참여는 곧 봉사입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을 바쳐서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곧 봉사요, 섬김이요, 착함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가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 빌립보교회가 구제헌금에 참여했던 사실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후 8: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과 시련과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자원하여 성도를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일회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우릴 교회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지역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랑의 섬김이 풍성한 교회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지역복지프로그램이 전반기를 마무리하고 종강을 했습니다. 늘푸른대학과 사랑의 급식, 그리고 구역경로당방문, 다문화 한글학교, 토요문화체험교실, 국가유공자 초정예배, 선한 사마리아 봉사 등을 통해 전반기 동안 지역을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이러한 복지프로그램이 우리 교회의 자랑은 아닙니다. 당연히 교회가 해야 하고 또 많은 교회들도 다 감당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교회도 이처럼 여러 복지 프로그램을 통하여 지역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믿을 때부터 착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면서 마지막 때까지 착한 일을 계속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오실 때까지 이 귀한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감사는 우리의 삶을 능력 있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감사가 넘치면 인생이 행복하게 바뀝니다. 반면에 불평으로 시작하면 더 큰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로 시작하면 더 큰 감사로 이어집니다. 

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며 살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헤아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는 별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축복과 은혜를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헤아리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불평을 헤아리는 데는 탁월합니다. 축복을 헤아리기 보다는 불행을 헤아리고 감사의 요소를 헤아리기 보다는 불평의 요소를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감사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받은 축복을 헤아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 감사합니다. 무능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크고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셀 수 있는 사람만이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는 곧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또한 감사하는 만큼 능력을 받습니다. 

오늘 전반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받은 은혜를 빠트리지 말고, 잘 헤아려 구체적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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