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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만 자랑하리 (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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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만 자랑하리 (갈 6:14)


코카콜라 사장은 코카콜라의 사람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핏줄속에서 피를 빼고 콜라를 넣고 싶다. 내 심장은 피를 품어내게 하고 싶다.”
그는 늘 코카콜라만 자랑합니다.그러나 진정으로 코카콜라는 자랑할 만한 것일까요? 조금 마시는 것은 몰라도 많이 마시는 것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여자 집사님 한 분이 제게 간청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 바로 옆에 언니가 살고 있습니다. 교사입니다. 나 혼자 천국가면 안 되요. 같이 가고 싶어요. 전도해 주세요.”

그리고 언니 전화 번호와 주소를 주었습니다. 얼마나 언니 영혼을 사랑하는지 감동이 되었습니다. 돌아 와서 전화를 드리고 만났습니다. 조금 다니다가 지방으로 발영을 받아 전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네 잎 크로바의 사람이었습니다. 40년동안 네 잎 크로바만 모았습니다. 지금까지 3만개 이상을 모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기네스북에 자기 이름이 오르도록 신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겨울이면 여름을 기다렸고, 여름이면 발벗고 나서서 온통 네 잎 크로바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네 잎 크로바만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잎 크로바는 자랑할만한 것일까요? 기네스북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일가요?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가브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같이 편지를 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편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종은 어디를 쳐도 종소리만 내는 것처럼 바울은 어디를 쳐도 십자가 소리만 나왔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을 가요?

1. 십자가는 구원이기 때문에

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를 로마인들이 보면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들이 보면 우리를 구원시켜 주는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구원입니다.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래서 죄의 값은 사망이 되었습니다. 벌금형도, 감옥형도 아니었습니다. 사형이었습니다.그래서 모든 죄인은 죄의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짐승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이 된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중심에 우쭉 서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카나다 토론토 한 호수에서 오리 한 마리가 먹이를 먹다가 부리에 깡통따개가 씌워졌습니다. 그래서 부리를 벌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리는 먹지 못 하여 아사상태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리를 잡아 그것을 벗겨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리는 도무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사적으로 도망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드려서 큰 그물을 짰습니다. 그러나 어찌나 잽싸게 도망치는 지 그 오리를 잡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스카이 다이버를 동원시켜서 물속으로 들어가 땅으로 오리를 쫓아내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리 전문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오리들을 맛있는 먹이로 유인하였습니다. 그 호수에 있는 다른 오리들은 모두 모여 맛있는 것을 먹었는 데 유독 그 오리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오리를 한 마리를 잡으려고 수 억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얼마 후 그 오리는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살려 주려는 사람들의 진심을 조금도 알아 주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심을 알아 주지 못 하고 자꾸만 도망치다가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동물은 거북이입니다.

5천년 된 거북이를 신귀(神龜)라고 하고 1만년 된 거북이를 영귀(靈龜)라고 한답니다. 거북이가 그렇게 장수하는 이유는 그렇게 무겁고 딱딱한 등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다니며 긴장하고 운동하니까 제일 오래 사는 동물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하와이 바다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거북이를 발견하고 한참을 같이 놀았습니다. 정말 심청이가 거북이 등을 타고 바다에서 살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순한 동물이었습니다. 즐겁게 자기도 같이 놀아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평생 지고 사는 이에게는 장수의 축복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당당히 말한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 나면 영수증을 주고 받습니다. 사랑하는 남녀도 사랑한다는 표시로 사랑의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약혼식에 반지를 서로 끼워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십자가에서 아들을 주신 이가 무엇을 못 주시겠느냐고 바울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십만원을 줄 수 있다고 1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억을 줄 수 있는 이는 십만원을 줄 수 있습니다.
100개를 줄 수 있는 이는 하나 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줄 수 있다고 100개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이가 무엇을 주지 못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야.”
바울은 로마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30년 동안 성극을 하면서 예수역을 맡은 배우가 있습니다. 안톤 레이지입니다.
어느 날 그의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은 부부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연극에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한번 빌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가 물었습니다.
“연극인데 구태여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었습니까?”

안톤 레이지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못 한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물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일로일로에 갔을 때 강요한 선교사는 나에게 조그만 카드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곳 경찰서장이 써준 카드입니다. 교통경찰에 걸리면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카드를 가지고 있는 강 요한 선교사를 잡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강 선교사는 서장이 자기를 사랑하는 표시라면서 자랑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말씀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강 요한 목사가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목회하였던 춘천지방 발산교회가 있습니다. 나는 그 곳에 한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콘도같은 것을 여기 저기 강가에 만들어 놓고 분양하기도 하고 임대하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를 내려다 보이는 곳에 많은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을 결코 떠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홍수가 극심하던 어느 날 그 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혔습니다. 그 배에는 아들과 딸 그리고 자기 세 명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두 자녀를 양 손에 붙들고 급류에 휘말려 발버둥쳤습니다.둘 다 살리려고 하다가는 둘 다 죽일 것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를 놓아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를 놓겠습니까? 누구를 붙들겠습니까?

그는 아들을 붙들고 딸의 손목을 놓았습니다. 급류에 휘말리며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내 손을 놓으셨군요.”
아우성치며 떠내려가 죽은 딸의 모습 때문에 이 강가에서 넋을 잃고 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이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놓았으면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에게 늘 감사하면서 죽은 누나를 생각하면서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알려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석탄으로 알콜을 얻는 방법을 쓰시요.>
그 학생은 아무리 생각을 짜내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학공식이나 부호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썼습니다. 장난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석탄을 팔아서 알콜을 사면 됩니다.>
그 후 그 학생은 교수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낙제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는 그 학생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는 석탄으로 알콜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 냈다.”
그리고 웃으면서 충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그러움과 사랑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그 후 늘 그 교수의 사랑을 전하며 다녔습니다. 낙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교수님의 사랑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입니다.

3. 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에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요 지혜이십니다. 능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마귀로부터의 승리입니다. 마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무기인 사망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매어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마귀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승리라는 말은 전쟁이 있다는 말입니다. 전쟁없이 승리는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서구 영화 가운데 드라큐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피를 빨아 먹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귀신 이야기가 유럽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중에 하나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드라큐라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이면 그는 맥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여지게 된 것은 로마 황제 콘스탄틴 황제때부터입니다. 그가 전쟁에 나가려고 할 때 십자가를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가지고 나가 전쟁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 후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마크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국기는 십자가입니다.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지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아놀드 본 윙크라이드(Arnold Von Winklereid)는 스위스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적국이 스위스로 쳐들어 와서 한 도시 한 도시 점령하여 나갔습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군사수도 엄청나게 적었습니다. 스위스 군대는 아예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모두가 포기 상태일 때 아놀드는 십자가를 높이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며 말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오. 여기는 나의 집과 조국과 나의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 군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무서워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적을 물리치고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내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적진으로 쏜살같이 달리며 또 외쳤습니다.
“자유를 달라. 자유를 달라.”
적군이 아놀드의 가슴에 창을 댔습니다. 그리고 눌렀습니다. 피를 토하며 죽었습니다. 그 때 온 스위스 군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 돌진하였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스위스를 위기에서 구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십자가가 스위스 국기에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어렵고 힘들때마다 십자가에 의지하며 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회자들의 무덤’이라 일컫는 곳이었습니다. 처음 테드 해거드 목사가 이곳에 갔을 때는, 칼로 찌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마다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이 들끓어 죽은 개나 고양이의 머리를 소포로 부쳐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테드 해거드는 물러서지 않고 영적 전쟁을 벌였습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전화번호부를 5명 단위로 오려 그 이름을 불러가며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동산 매물이 나오면,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많은 선교단체가 이곳으로 이사 오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는 많은 선교단체의 본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윌리암 헨리워드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업적이 있으면 댓가가 있다.
목표가 있으면 적대자가 있다.
승리가 있으면 문제가 있다.
성공이 있으면 희생이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우주 법칙은 저항의 법칙이다. 비행기의 원리는 저항으로 인하여 물체가 뜬다는 것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다. 높이 나르려고 할수록 공기의 저항이 크고, 공기의 저항이 클수록 비행기 부력은 커져서 높이 나를 수 있다.”
  
구약의 최고 사역의 사람은 모세입니다. 신약의 최고 복음의 사람은 바울입니다.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일을 하였고 방해하는 막힘이 가장 많았던 사람입니다.
가다보면 막힘이 있고 막히면 뚫고 나가고, 가다보면 또 막히고 그러면 또 기도하고 매달려 뚫고 나가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나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비판자들은 일생 안디옥에서 마케도니아 해안까지, 소아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평생 그가 가는 곳마다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바울에게는 평생 반대자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하였는 데 정말 십자가는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십자가는 구원이기 때문에
2.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3. 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화상으로 얼굴이 귀신처럼 이그러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하여 누구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건강하였습니다. 마음도 예뻤습니다. 어느 날 맹인을 만났습니다. 어느 처녀도 맹인과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흉한 처녀는 맹인이 너무나 불쌍하여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서로 사이에 사랑이 싹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둘만 사는 것처럼 행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맹인에게 눈을 주겠다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수술하게 되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내일이면 수술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왜그런지 모르게 우울한 것을 남편이 느꼈습니다.

“여보! 내가 눈을 뜨게 된다는 데 당신은 왜 그렇게 우울해요.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느끼지 못 하겠어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요. 내 얼굴은 화상으로 흉측해요. 당신이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덜 할 것만 같아요. 우리의 사랑이 식어질 것만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며 살았지요. 내가 눈을 뜬 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할 것을 당신이 두려워하는 군요. 나는 내일 수술받는 것을 포기할 거예요. 당신을 이대로 사랑하고, 당신의 사랑을 이대로 받고 싶어요.”
맹인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평생 수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맹인 남편은 눈을 뜨지 않고 평생 아내만 사랑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우리는 평생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사랑하며 나가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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