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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막 4: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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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막 4:24-25)  

 
17C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이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마음이 천국을 지옥으로 바꾼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의식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지옥 같은 환경에서 산다하더라도 마음만 고쳐먹으면 천국이 됩니다. 
아무리 천국 같은 환경에서 산다하더라도 의식이 비뚤어지면 지옥이 됩니다.
우리의 의식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빈곤의식과 부요의식입니다. 
빈곤의식이란 남과 비교하여 자기에게 ‘없는 것’을 보고 늘 ‘가난하다’, ‘부족하다’, ‘모자란다.’라는 생각에 젖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에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빈곤의식을 ‘거지의식’이라고도 합니다. 
거지는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아무리 밥통에 밥이 가득차도, 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배고픔을 느낍니다.
부요의식이란 남과 비교하여 ‘있는 것’을 보고 늘 ‘풍성하다’, ‘여유 있다’, ‘만족하다.’라는 생각에 젖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여러분께 많이 한 이야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어느 가정에 딸 다섯이 있습니다. 
(지금은 남아 선호사상이 약화되었습니다.)
빈곤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자나 깨나 없는 아들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저 녀석들 중에 하나만이라도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네 집에 갔더니 아들이 인사를 하는데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더라. 참 복도 없는 놈이지. 바깥에 나가면 천지에 사내놈들인데 내 품 안에는 하나도 없으니.......’ 
밤낮 없는 아들 타령만 하고 있다면 이 가정이 천국 되겠습니까? 지옥 되겠습니까? 
그래서 빈곤의식에 사로잡히면 배운 것, 있는 것, 누리는 것에 상관없이 지옥에 살게 됩니다.

반면 부요의식으로 사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딸들을 공주라고 부릅니다. 
“첫째공주는 공부를 잘하니 학자가 되려나? 둘째 공주는 살림을 잘하니 비행기 태워 주려나? 셋째공주는 예쁘니 미스코리아가 되려나? 넷째공주는 운동을 잘하니 금메달을 따려나? 막내공주는 재롱을 잘 피우니 아빠하고 살려나?” 
딸들이 공주니까 아버지는 뭡니까? 
왕이지요! 

부요의식을 가지고 넉넉하게 왕처럼 살아갑니다. 
이 가정이 천국 되겠습니까? 지옥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인가?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잘 헤아리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24절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여기서 ‘헤아린다.’는 것은 계산을 잘 한다는 말이 아니라 평가를 잘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란 내용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한 군데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마7: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생각한 그대로, 행동한 그대로, 말한 그대로, 평가한 대로 돌려받는다는 것입니다!

고인이 된 후라이보이 곽규석 목사님이 ‘부메랑의 원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잇습니다.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갖고 있기에 서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자칫 미움과 질시와 갈등 속에서 살기 쉽습니다. 내가 만일 누군가를 저주한다고 했을 때 그 저주는 일차적으로 그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무언가 그가 저주 받을 짓을 당신에게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부메랑처럼 반드시 나에게도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밉고 싫은 사람에게라도 저주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내가 만일 누군가를 위해 축복해준다고 가정합시다. 그 축복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축복해주었을 때 그 축복은 반드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저주나 축복은 부메랑의 원리를 갖고 언제나 그것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우리 인간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하고 했는데, 누구로부터 헤아림을 받는단 말입니까? 
눅 6: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보답과 보상을 기다리고 사랑합니다. 
수재의연금을 낼 때 TV 앞에 줄 서있는 것 보셨지요? 
TV에 잠깐 비치든지 신문귀퉁이에 이름이 나오든지 해야만 보람을 느끼고 사랑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보상하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을 통해서든지 어떤 일을 통해서든지 틀림없이 값진 것으로 갚아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실망하지도, 낙심하지도, 불평하지도, 섭섭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이나, 인정이나, 박수를 기대하면 흔들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장점을 발견하고, 후하게 점수를 주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2. 자기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면 없는 사람에게는 더 주어야지 어떻게 있는 것까지 빼앗습니까? 
이상하지요? 

그러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누구입니까? 
‘있는 자’란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인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없는 자’란 가난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그것을 천히 여기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말씀이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마25:14-30절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돈을 묻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 책망 후에 교훈으로 주신 말씀이 마25: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입니다. 

여러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땅을 파고 그 돈을 묻어 버렸을까요? 
이 사람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었다. 왜 나에게만 한 달란트를 주느냐?’ 이겁니다. 

작다는 거지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지요?
받은 게 없다는 거지요?
늘 빈곤의식에 시달립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의식입니다.
기쁜 날이 없습니다. 
좋은 날이 없습니다.
행복한 날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있는 것조차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것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인정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글 쓰는 재주가 있으면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데 봉사하면 그 재주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노래하는 재주가 있으면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데 봉사하면 그 재주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가르치는 재주가 있으면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데 봉사하면 그 재주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몇 년 전 고신대학교 안민(성악가) 부총장이 강북 지방회 행사에 와서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간증 내용 중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노래를 드렸더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우짜다 내가 이렇게 됐노!’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노래를 드렸더니 나를 교수로 세우셨고, 4만 명이 넘는 고등학생들 앞에 세우셨고, 세계 방방 곳곳 안간데 없이 세우셨다. 마치 어린 아이가 점심 도시락으로 싸온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더니 5천명을 먹이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듯이 내 삶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받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삶에서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역사를 경험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찾아내고 드리는 데에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전환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을 보게 함으로 원망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드림에 인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있는 것, 풍족한 것을 보게 함으로 감사하게 하고, 드림에 넉넉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감사하고, 드림에 넉넉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2012년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절을 지키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고, 드림에 넉넉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얻음’에 관심이 없고, ‘드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1995년 12월25일 천국에 가신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선생님을 아시지요? 
그에게 춘원 이광수가 던진 질문이 있답니다. 
“당신은 바보요, 아니면 성자요?”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의사로서의 명성을 지녔음에도 그가 천국에 가신 후 남겨 놓은 것이란 복음 병원 옥상의 옥탑 방뿐이었습니다. 

평생 모든 것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다 드렸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드리는 삶을 사니까 ‘바보입니까 성자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만하지요? 
그 분은 드리기만 한 것 같지만 결국 놀라운 ‘얻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바보 같았지만 그 보다 더 똑똑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뒤따르고 싶은 착한 사람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진짜 바보는 드리지 않고, 계속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드리는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드림에 넉넉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얻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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