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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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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22-4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22-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25-30)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4-38)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10:40-42)


수전절

오늘 말씀의 배경은 수전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22)  수전절은 히브리 말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는 성전에 헌신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전에 헌신한 날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스룹바벨 시대, 헬라 시대, 헤롯 시대 등 여러 차례 봉헌 한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수전절은 그중에서 마카비 시대에 성전에 헌신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제국은 넷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중 유대 땅에 영향을 미친 세력은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와 수리아 의 안디오쿠스 왕조였습니다.  
  
안디오쿠스의 아들 에피파네스 왕은 애굽 세력을 정벌하여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군을 이끌고 애굽 원정에 나섰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도중에 예루살렘에 들러 분풀이를 하듯 유대 민족을 사정없이 짓밟았습니다.  당시에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에 내린 칙령을 보면 이런 조항들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예식을 행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마카비상1:44-50)  

그리고 주전 167년(기슬레우월 십 오일)에 에피파네스 왕은 번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우상을 세웠습니다.  유다 지방의 여러 도시에 이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 앞에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습니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고,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어미는 사형시키고, 젖먹이도 목매달아 죽였습니다.  
  
이러한 학정에 견디다 못해 항거하고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딘의 제사장이었던 마따디아와 그 아들들입니다.  그 중에도 유다 마카베오는 열렬한 율법의 신봉자로 앞장서서 군대를 모집하고 조직적으로 에피파네스 군대와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성전에서 이방 제단과 모든 부정한 것들을 몰아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기슬레우월 25일(12월 초)부터 8일간을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에는 8개의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을 중심으로 행사를 벌였기 때문에 빛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는 장막절과 흡사하게 지켜졌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에서 교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23)  솔로몬 행각은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 동편에 남아 있던 솔로몬 성전의 일부인데, 기둥들이 늘어서 있고 지붕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서기관들이 가르치던 교육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때가 겨울이고 날이 차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각에 모였고 주님은 거기서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을 회복한 수전절이라고 하는 절기나, 차가운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이 본문에서 상당히 암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궁금하게 만들 작정이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시오.”(23)  이 질문을 했던 유대인들의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긍정적인 입장에서 ‘예수여 당신은 정말 메시야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나사렛 시골 출신의 예수란 자가 나타나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면서 대중들의 지도자가 되는데 대해서 반신반의 했습니다.  배척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번이고 예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과연 구세주인가 하는 질문은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순교하기 전에 사람들을 예수께 보내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예수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마태나, 세례 요한이나, 사도 요한이 밝히려 한 것이고, 주님 자신이 전하신 핵심적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의 질문을 통해서 여러 차례 반복해 온 주제, 즉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요한복음의 주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당신이 메시야라면 왜 유대주의를 무시하고 있소?’ 하는 공격적인 질문입니다.  정말 예수가 메시야인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에 도전하는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서 질문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고, 유대인의 계율을 폐하려는 당신이 무슨 메시야요?’ 하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아끼는 성전을 헐어버리면 사흘에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철저히 지키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밀 이삭을 잘라 먹고 여행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지극히 비판적인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나, 세리나, 간음자나, 거지나, 불구자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유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여러 가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교권에 대한 위기의식, 율법에 대한 위기의식, 성전 지배권에 대한 위기의식 등.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차가운 겨울 날씨처럼 얼어붙은 마음으로 예수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합니다.  기독교 윤리가 제아무리 고상하고 높아도 내가 가진 전통을 깨트리지는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두 가지 증거를 기억하라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야냐?’ 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그래 내가 메시야다’하는 확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적을 보여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수가성 여인에게 ‘지금 네게 말하는 내가 메시야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나, 베데스다 연못 가의 38년 된 병자, 혹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고 그에게 ‘지금 네게 말하는 내가 메시야다’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주님은 왜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메시야’라고 확정적인 말씀을 하시고, ‘당신이 메시야냐’고 질문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런 확답도 아니 하셨을까?  그 까닭은 오직 한가집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5-26)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댈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증거 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이미 다 증거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미 두 가지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이미 수 없이 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25)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하면서 주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하시니까, ‘네 나이가 몇인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하면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신 수 많은 증거의 말씀들이 다 마이동풍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무슨 새로운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듣지 않는 자에게 새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주신 말씀만으로도 족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만  믿으면 됩니다.  어떤 인간의 새로운 소리를 듣고 싶어서 오락가락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이 자꾸만 새로운 소리를 하라고 요구하는 법이지,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둘째로, 말씀이 믿어지지 않거든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믿으라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5-26)  유대인들은 이미 무수한 주님의 이적들을 보아 왔습니다.  귀신이 쫓겨 가고, 날 때부터 병든 자가 일어나고, 맹인이 눈을 뜨고, 오병 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안식일 규칙을 내세우든지 아니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예수를 불신했습니다.  예수의 이적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이나 삶도 메시야가 아니면 불가능한 모습들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처럼 깨끗하고, 철저하게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사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행적은 바로 메시야의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른 증거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행하신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을 가지기에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자 한다면 증거는 충분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6-27) 


내가 영생을 주노니

예수가 메시야라는 최대의 증거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데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   

이 세상에서 권세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권세 있는 사람도 보잘 것 없는 새 한 마리의 생명은 줄 수 없습니다.  제갈공명도 초패왕도 자기 목숨이 떠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난 자 중에 남에게 생명을 주겠다는 말은, 농담 중에라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제아무리 사랑해도 목숨만은 주지 못합니다.  성인군자가 아무리 높은 뜻을 가르칠지라도 목숨을 주겠다는 소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 뭡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생명,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미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가끔 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말씀을 위주로 하셨습니다.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 행동의 초점도 죽음과 부활, 즉 생명 문제에 모아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든지 아니면 전적으로 믿고 영생을 얻든지, 양단간의 결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다.   믿고 영접하시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신 가장 큰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전절을 큰 명절로 지켰습니다.  수전절은 예루살렘 성전 회복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과연 유대인들이 하는 만큼 아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몸에 비유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예수님은 성전의 본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아껴야 될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로부터 회복된 날을 기뻐하면서 8일간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벌여야 될 잔치는 에피파네스에게 회복한 예루살렘 성전을 기념하는 축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찢기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 성전 본체 회복을 기뻐하는 부활의 축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무너지고, 헬라 왕에게 무너지고, 수리아 왕에게 무너지고, 로마군대에게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워졌던 헤롯 성전도 주후 70년 로마군에게 초토화 돼버렸습니다.  이 성전이 왜 자꾸만 무너져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성전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성전은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입니다.  돌집은 무너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는 다 생명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집이 다시 세워진 것은 기념하면서 성전 본체이신 메시야는 배척했습니다.  수전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제 예수님의 신분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에서 가장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귀절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가 몸이 하나라는 말인가요?  마음이 하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서로 닮았다는 뜻일까요?  이 말씀은 다음의 몇 가지를 확정하는 말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지니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상징적으로, 혹은 形而上學的으로 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만일 이러한 의미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한 말을 고쳤을 겁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말을 잘 못 하였노라고 바로잡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오해 했다고 고쳐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의 의미를 예수님도 바로 사용하셨고, 유대인들도 바로 알아들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면으로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베풀었는데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치려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한 것뿐, 돌에 맞을 일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대답합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이다.”(33)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신성모독을 했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를 가리켜서 감히 ‘나는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 할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신성 모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더 강한 어조로 유대인들에게 반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을 가리켜서 ‘神들’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 보내신 분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첫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신성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가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에 어떤 상표가 붙었는지 확인합니다.  유명 메이커의 것이라면 돈에 상관 않고 그 이름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어떤 세속적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생명이요 가장 가치 있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보세요.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행동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그 일이라도 믿어라”(38)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고, 소경이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일들, 나아가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이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주신 구원의 신성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8)  
  
둘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견고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 不死(immortality)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  주님이 지키시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는 사실이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을 견고하게 합니다.  


참 성전에 헌신하는 수전절이 되게 하라

수전절에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에게서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된 것을 기념해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등장을 유대주의의 위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유대주의 멸망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남으로 구원 기회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것을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이 변하는 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위기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서 마지막 고별사를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반대자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39-42)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 생명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떠나가지 않도록 굳게 믿고 영접하세요.  구원의 신성함에 참여하시고, 확고부동한 영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세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품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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