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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염려하느냐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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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염려하느냐 (마 6:25-34)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의 단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청 공무원이 실수를 해서 시장의 구두를 밟고 말았습니다. 즉시 사과를 했지만 시장이 다른 직원과 대화에 열중하느라고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시장이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해고 될텐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잠을 설친 그는 다음 날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잘못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를 본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장이 화가 나서 자신을 모른 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음날도 출근하자마자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시장이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모르고 그랬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장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굴기 때문입니다. “당신 정신 나간 것 아니야!” 고함을 치며 나무라자 그는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꼼짝없이 해고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뻣뻣한 시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장은 구두를 밟은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는데, 그는 시장이 자신을 해고하지 않을까 계속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염려가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걱정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염려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지 염려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염려는 영어로 ‘worr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worry’의 어원은 ‘물어 뜯는다’ 로서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 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사람을 질식시켜 버립니다. 영혼과 육체를 서서히 죽어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염려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하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염려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당시에는 먹을 것이 심각했습니다.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마실 것인가는 생존과 직결된 염려였습니다. 겉옷 하나로 생활하던 시대에 무엇을 입을 것인가의 염려 역시 사느냐 죽느냐의 염려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살다보면 굶을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옷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보다 귀한 목숨을 잃어버리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소용이 없나니 

아서 랭크 (Arthur Rank)는 주야로 사업에 대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서 랭크에게 지혜가 떠올랐었습니다. 매일 매일 염려에 붙잡혀 지내기보는 일주일 중 하루만 염려하는 날로 택하여 염려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중히 생각한 끝에 수요일을 염려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수요일 염려상자’ 를 만들어 염려가 생길 때마다 메모지에 염려의 내용과 날짜를 기입하여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수요일에 개봉하는 것입니다. 

어느 수요일엔가 랭크는 메모지를 뒤적이며 정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메모지에 기입하여 상자에 넣을 때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꺼내어 보았을 때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랭크는 수요일 염려상자를 통하여 시간이 지나고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염려들이 희미해지고 염려할 이유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요일 염려상자가 제시하는 결론은 염려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무익합니다. 염려해서 주어지는 이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여기의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는 ‘생명’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네가 염려한다고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염려는 건강을 해치는 무서운 독소가 됩니다.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염려한들 소용이 없는데 어찌 염려하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염려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건강만 상하고,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는 이와 같이 요란하게 만듭니다. 에너지만 소모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익하고 아무 소용없는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나니

J. C. 페니 (James Cash Penney)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재정난을 겪으면서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페니는 패틀크릭 병원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더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는데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염려를 몰아내었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페니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쳤습니다. 저를 도와주 십시요”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으며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 그 방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를 이긴 것입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를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도 돌보아주십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들의 백합화를 가꾸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냥 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 힘든 상황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준비 단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지 뮬러 (George Muller)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염려는 믿음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믿고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는 내일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염려한다고 오늘의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염려한다고 내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앞당겨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도를 하나니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싸우다가 저녁이 되면 창가로 다가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요,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을 친히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거운 짐을 혼자 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의 제목들은 하나님이 대신 져 주실 것입니다. 

염려를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복음성가를 아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본문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가 산더미 같아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염려가 생기면 고민합니다. 낙심합니다. 염려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으로 기도를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없는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고, 염려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도 티테디오스 바울, 요한도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 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 를 붙이시기 바랍니다. 티테디오스 즉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기도하며 물리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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