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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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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누가복음 4:16-21)

지난 번 설교에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없고 사람이 가진 재물이나 지위와 재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변하여 의인이 되게 하십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처럼 세상에서 버림 받은 자들을 불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어느 안식일에 어려서부터 출입했던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전하신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13살이 되면 회당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모임에 참석하여 기도문과 성경을 낭송할 기회를 가집니다.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은 전에 하시던 대로 회당 모임에 참석하셨고 회당 책임자는 예수님께 성경을 낭독할 기회를 드렸습니다.   성경을 맡은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자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읽으신 주님은 책을 덮어 성경을 맡은 자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지방에 자자하였으니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이 나올까 기대하며 주목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의 오심과 그가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이 사람이 어찌 우리의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도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며‘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하셨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지방에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보여주신 특별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각종 병자들과 지체장애자들을 치료하신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물론이고 제때에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되어 더 심한 질병을 앓고 끝내는 불구자가 되거나 생명을 잃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주님은 치료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금방 각 지역으로 퍼져갔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은혜로운 말씀이 있었고 병고침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삶을 살던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들려주시며 그 말씀이 오늘 나를 통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전하신 천국복음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선포된 희망의 복음이며, 치유와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난한 자들, 포로된 자와 눈먼 자들과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이 은혜의 해는 모세의 율법에 정해주신 희년이었습니다.  희년은 매 50년마다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들이 해방되며 땅이 경작을 멈추고 휴식하며 이웃에게 팔았던 땅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라고 정해주신 해방의 해였습니다.   

희년이 오기만 목을 빼고 기다리며 그해가 되면 가장 기뻐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사회의 약자 계층입니다.  경제적인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 빚을 갚으려고 땅을 팔았던 사람들,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던 사람들이 자유와 주권을 되찾는회복의 해였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잃은 사람들이 가난을 대물림하여 자손대대로 종노릇하는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희년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하심으로 새출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기억하고 온 백성이 함께 자유와 죄사함의 기쁨을 나누었으니 희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였습니다.   

구약에 선포된 은혜의 해, 희년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가난한 자에게 선포된 복음은 바로 희년의 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사회적인 의미로는 경제적인 약자들을 의미합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문에 배당된 땅을 이웃에게 팔아 경작할 토지가 없는 사람은 소작 농민이 되었고 쌓여가는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아 남의 집의 종으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계층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보호자를 잃었고 땅을 잃은 사람이며 전쟁과 재난의 시기에 제일 먼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난한 사람들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바로 소경과 앉은뱅이,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귀신이 들린 사람, 문둥병에 걸린 사람 등 신체 불구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선진 서구사회에서는 지체 장애자들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이 제도적으로 잘 정착되었지만 아직도 더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는 장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차가운 시선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고대 유대 사회에서 신체 불구자들이 겪는 차별과 서러움은 그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모든 질병과 신체 장애를 죄의 결과로 이해하던 사회에서 불치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신체적인 고통과 함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야 했고 심한 경우는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고아와 과부들은 입양이나 재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새가정을 가짐으로 다시 회복할 기회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함과는 다른 차원의 가난이며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와 불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비를 베푸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사역을 알리며‘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습니다.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 이것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하신 예수님의 복음이었으며 모든 포로된 상태와 억눌린 상태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육체가 회복되는 것을 왜 자유함이라 하셨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질병과 신체 불구는 사회적인 차별의 이유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느나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정결하지 못하다 판정을 받은 병자들과 불구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성전출입을 금지당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런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지만 몸이 상하고 결함이 있기 때문에 성전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체장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조차 거절당했다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만 했던 가장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 가면 문둥병도 고침받고 눈을 뜨며 귀가 열려 정상적인 몸으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들려지는 아름다운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상태로 바꾸시는 것, 질병과 가난으로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가 자유함을 얻으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여라’ 하시며 그들이 질병과 죄의 눌림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버림당한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이 복음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시고,  재 대신 화관을 씌우시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이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61:3).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비를 구할 때 사도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며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켰을 때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걸으며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행3:8).   

일평생 성전 문 앞에 엎드려 구걸하여 살던 그 사람이 드디어 자기 발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여 자비를 구하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을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던 그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받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못되어 일평생 성전 문 앞에 엎드려 성전을 드나드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야야 했던 사람입니다.   나의 인생은 정말 이 상태로 마치고 마는가?   나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뵐 수도 없는 버려진 인생이란 말인가? 하며 평생을 절망 속에 살던 이 사람이 드디어 제발로 일어서 걷고 뛰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분을 새롭게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돈이 없는 것보다 집이 없는 것보다 더 혹독한 가난함은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좌절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을 고쳐 정상적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피하고 버리며 내쫓았던 문둥병자와 혈루증 환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만나주시고 만져주시며 고쳐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불구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단순히 병고침의 기적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에 짓눌려 질병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백성들을 구하여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신 주님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 자유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정상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의 주인이셨으며 주님이 곧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심령을 고쳐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받고 주의 이름으로 변하여 새사람이 된 성도는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맛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복이 있을지어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는 말로 순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지어다’ 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지극히 조심스러워했던 유대인들은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축복을 대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향해 열려있고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입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가난해진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런 가난한 마음에 충만히 담겨지고 예수님은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갈급하고 깨끗하게 비워진 사람은 복을 얻으리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그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또한 자신의 불의와 세상의 죄악을 보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그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뵙고 이웃과 화평을 도모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주님은 고관대작의 지위나 부자의 신분을 가지고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며 가진 것 중의 일부를 나누는 자선가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고 가난을 몸으로 체험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세상에 오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 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성장, 경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습니까?   그렇게 하여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 또한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조차 더 많은 돈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고, 그리고 돈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 믿고 구하며 더 많이 얻으려다 하나님의 의와 신뢰와 사랑을 잃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잃고 그 속에 너무 많은 것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돈이 없어도 감사하며 살고 권세가 없어도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돈도 있고 학위도 있으며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아직도 만족을 얻지 못하여 불안과 염려로 지낸다면 그 마음 속에 가장 소중한 것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함께 하면 좋은 친구 혹은 후원자처럼 마음이 편하고 든든하지만 없어도 크게 불편하거나 아쉽지 않는 그런 대상입니까?   그분이 아니고는 내가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분이십니까?   어쩌다 생각 나고 필요할 때만 불러보는 이름입니까?  항상 내 마음과 생각 가운데 계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의식하고 경외하며 수시로 상담하고 대화를 나누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힘들고 부족하고 고생스러울 때만 찾아가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곁에 계시고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 복음은 오늘도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풍성하게 내려옵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이 가리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시고, 어그러진 길로 가던 우리의 저는 다리를 회복시켜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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