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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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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3)
  

들어가는 말

창세기 35장 16~20절에는 야곱의 아들 베냐민의 출생 기사가 기록돼 있습니다.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은 난산 끝에 숨을 거두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러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베노니’란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가 죽어가면서 남긴 부탁이었지만 그는 자기 아들을 '베노니'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베냐민'으로 불렀습니다.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 아들은 슬픔의 아들임에 분명합니다. 
핏덩이로 세상에 태어나던 날,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삶이 축복되거나 환영받을 리 없었습니다. 
“쟤는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야!”

떠나버린 아내의 시신 곁에서 핏덩이 아들을 안고 있는 야곱도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베노니가 맞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를 ‘베냐민’으로 불렀고, 이것이 그 아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슬픈 운명 속에 태어난 불쌍한 아이지만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시는 축복된 아이임을 본 것입니다. 
같은 아이를 두고 어머니는 베노니로, 아버지는 베냐민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심리학회장을 지낸 바 있는 셀리그먼 교수는 “한 개인을 볼 때 내면에 있는 우울, 분노, 좌절, 상처 등 부정적인 요소에 주목하기보다 사랑, 절제, 겸손, 열정 등 긍정적인 요소에 주목하면 그 사람은 훨씬 더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베노니로 부르지 말고, 베냐민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우들을 바라볼 때 긍정적인 요소를 바라보고 격려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 빌립보교회의 문제점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사도행전 16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전도하러 갔을 때 거기서 루디아란 여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루디아는 기꺼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정교회이지요.

빌립보 교회가 이처럼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빌립보 교회는 여성 주도적인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주도적인 교회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장점의 하나는, 여성 특유의 따스함과 사랑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옥중에 있는 사도바울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베풀고 위로금을 보냈다는 것은 여성주도적인 빌립보교회의 특성이기도 했습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들이기에 시기와 질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본문에 두 여인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이 교회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우리 교회는 여성이 주도하는 교회가 아니고, 다툼이 있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서 교회를 세워가야 될 줄 믿습니다.

2.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의 원리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라도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복음전파에 유리한가?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바울 사도가 두 여인의 다툼의 문제를 다루면서 ‘복음전파’를 들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모든 일을 판단할 때 우선 고려할 사항이 복음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전하는 일, 선교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변함없는 교회관이며, 신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교회는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자신도 모르게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의 절망적인 실태를 고발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은 ‘어떤 선택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리하느냐’에 있습니다.

수요예배 때 드린 이야기입니다.
어느 바닷가에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등대를 밝히기 위해서 매달 일정량의 기름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가정의 외아들이 큰 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었습니다.
부모는 등대지기에게 달려가 기름을 좀 팔아 수술비를 마련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착한 등대지기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날에는 아들의 등록금을 위해서, 또 한 날에는 끼니를 거르는 할머니의 양식을 위해서 착한 등대지기는 기름을 조금씩 팔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마을에 사는 장정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망망대해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뱃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등대의 불을 지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등대의 불빛을 보지 못한 동네 장정들은 결국 암초에 부딪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가 무엇을 위해 기름(역량)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그 우선순위를 바로 결정하지 않으면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예배드리겠습니까?
전도하지 않으면 누구를 양육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봉사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성도의 교제를 하겠습니까?
‘복음전파에 유리한가?’를 따져서 그 방향으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2)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가?

2절을 읽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 사도는 늘 이 기준으로 호소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일어난 작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명예를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주를 위해 해결할 것을 권유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친히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가 교회의 가장 높은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생기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 관계 속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떤 것이 주님을 위한 길일까?’
우리가 이 점에 주의하기만 해도 대부분의 어려움은 해결될 것입니다.
‘어떤 선택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가?’를 따져서 그 방향으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3)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가?

2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는 외부적인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향한 핍박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부의 분열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외부적인 핍박을 받았을 때에는 교우들이 똘똘 뭉쳐 교회가 강해졌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순수해지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내부의 분열을 겪을 때에는 교회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조심해야할 일은 내부의 분열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두 여자 사이에 분열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습니다.
서로 불평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가 전도를 망치고, 교회를 번 아웉(burn out) 시킵니다.
전도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희들이나 싸움박질하지 말고 잘하시오.”

여기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말은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멘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중동지역에서 쟁기질을 할 때 두 마리의 소가 한 멍에를 메고 일을 합니다.
멍에를 멘 소들이 쟁기질을 잘 하려면 서로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걸음도 같은 속도로, 방향도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한 소는 빨리 가고 다른 소는 천천히 간다면, 한 소는 왼쪽으로 가고 다른 소는 오른쪽으로 간다면 쟁기질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균형을 잡지 못하면 둘 다 똑같이 힘이 듭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 쪽도 무너집니다.
같이 죽는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의식으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간에 다투고 불화하면 누가 슬퍼할까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형이 잘못했다, 동생이 잘못했다.’ 라고 서로 비난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선 ‘왜들 싸우느냐?’일 뿐입니다.
‘동생이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형도 내 아들이요, ‘형이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동생도 내 아들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교우들 간에 다투고 불화하면 누가 슬퍼할까요?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십니다. 
서로 비난하고 다툴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왜들 이러느냐?”입니다.
그들 모두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소중한 자녀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에 좋은 기억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그것만 생각하면 숨을 못 쉴 정도로 가슴이 딱 막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인들 간의 다툼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교우들에게 화목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정주하느냐? 탈주하느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주한다는 것은 ‘머무른다.’는 말이고, 탈주한다는 것은 ‘떠난다.’는 말입니다.
신앙공동체는 정주 공동체가 아니라 탈주 공동체라는 것이지요.
모세와 출애굽 공동체의 이야기는 탈주 스토리입니다. 
출애굽기는 탈주기입니다. 
탈주하지 않으면 변질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정주하는 순간부터 오염과 변질, 타락의 지루한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았습니까? 

이따금씩 교회가 민낯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탈주하지 않고 정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긁어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천국을 외치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축적하고 확장하며 정주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주자가 아닌 탈주자입니다! 

히11:13절을 보십시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정주할 천국을 바라보는 탈주자,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 사도의 마지막 호소는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4절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이요, 가장 큰 특권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한다면 이 세상에서 섭섭할 일도, 다툴 일도, 서로 얼굴을 안 쳐다볼 일도, 서로 말을 안 섞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천국가면 서로 만나야할 사이입니다.
천국 가서도 한사람은 앞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은 뒷자리에 앉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다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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