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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난의 예고와 성전세 (마 1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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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예고와 성전세 (마 17:22-27)

1부 수난의 예고(:22-23)

사순절이란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4순, 즉 40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간으로 하면 6주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여행을 하셨지만 이 기간은 특별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여행기간에 예수님이 몇 차례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거의 없었던 말씀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옆에 있던 제자들이 근심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수난을 말씀하셔야 했는지 그 필요성을 모두가 뜻밖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이것을 알려야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 의미를 여기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난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 닥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수난이 없기를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1.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 말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시고,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결코 사람들의 손에 있으면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계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 충만의 능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할 수 없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적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요, 로마의 정치가들입니다. 넓게 말하면 모든 군중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법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항상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구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면에서 자신을 세상에게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류구속의 대사명을 위하여 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이 와서 체포하려고 할 때도 베드로에게 하신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셨습니다. 


2.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넘겨진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려 보려고 재판과정에서도 바라바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한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에 위험이 올 것을 알고 얼른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가장 잔인한 사형법 이었습니다. 즉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나 외국인에게 주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시민도 아니요, 식민지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표면적인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 내면적인 뜻을 살피게 됩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가가였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그의 구속의 희생이었으며, 한번에 드리는 속죄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는 인간의 승리로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기독교의 가장 깊은 교리이며 믿음을 가진 각 개인에게는 감격입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던들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인생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인하여 오늘 믿음을 소유한 영원한 천국의 사람으로 희망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살도록 십자가를 명상하는 생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 삼일 후에 살아나십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실패요, 절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수난의 예고에서 반드시 따라 나오는 말씀이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입니다(16 :21, 20: 19, 27 .63).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있으므로 빛이 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여기서 최대한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무덤을 돌로 막고 그 곳에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그 돌을 굴려낼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굴려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보장을 하나님이 허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십니다. 부활은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도 그 자리를 지키다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나는 데 그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를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에 갔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는 들어갔었지만 요한은 무서워서 무덤 안에 들어갈 용기를 갖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인류의 근본역사를 변화시켰으며,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희망이 무엇인가를 본질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것은 자신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반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러한 반대에 부딪치는 젓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어느 정도의 각오인가를 타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확고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그러나 각오가 실천될 때까지는 여러 차례의 결단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자리에 서야 할 때는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같은 제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정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수난은 예수님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도 수난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찬식에서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깊은 자리에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을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 뿐입니다. 


2부 성전세 문제(:24-27절)

오늘 본문은 세금받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성전 세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우리들에게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란 말은 유대인들의 예배중심지인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20세 이상된 남자들에게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반 세겔씩 내게되어 있었습니다.(출30:11-16)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전통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바치던 자치세였습니다. 고로 이 세금을 받는 자들은 순수한 유대인들이었으며, 로마에 바치는 국세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다분히 시비쪼로 베드로에게 너와 선생은 성전세인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말했고 그들의 말에 베드로가 성급하게 대답을 했으며, 예수님은 그 문제를 처리하셨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성전 세를 안내도 되는 분이셨습니다.(25-26절)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들이 관세나 정세를 타인에게 받지않느냐고 가르치시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성전에 대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이 곧 성전의 주인이시며, 친히 성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이끄시는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바로아시기 바랍니다. 고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27절상)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며, 성전을 친히 만들게 하셨고 그 성전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이시며,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도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아시고 성전세를 내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생겨서 예수님이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함으로 시끄러워져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장애가 될 것 같아서 예방적 조치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배워야할 사항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고 우리가 모든 것을 믿음으로만 한다고 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지 말고 겸손하게 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의 실족함을 막기 위해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영혼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이며, 내가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자유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배려하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5절상)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인 성전세를 내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지도 않고 “내신다”하고 집에 들어 갔는데 예수님께서 벌써 아시고 베드로에게 먼저 성전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하신 예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말씀드리기 전에 벌써 우리 주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벌써 알고 계십니다.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시지만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신 예수님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필요한 것과 어려운 문제를 아뢰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4. 전능하신 예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7절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풍랑을 잔잔하게도 하셨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불치의 병을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들은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한가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르시길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한마디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처음 물고기의 입을 열면 돈이 나올 것이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려면 처음에, 빨리, 즉시 이루어 주시기도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미리 아신 예수님이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즉시 이루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받을 교훈이 무엇입니까? 

1)우리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주님이 원하지 않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의 신앙인이 됩시다. 

2)예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을 보시고 아십니다. 고로 거룩하며 하나님에게 부요한 마음을 가집시다. 

3)그런 사람들에게 전능하신 주님은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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