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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솔로몬의 의는 무엇인가? (왕하 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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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의는 무엇인가? (왕하 3:4-15)


내 용 

솔로몬에 대해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모두 잘 압니다. 아마 이 세상을 살다간 유명하고 영광스러운 인물들 중에 몇 번째 안 되는 사람으로 다 인정을 합니다. 우리가 솔로몬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는 영화를 많이 누린 왕이고 지혜로운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솔로몬의 영광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설교에도 솔로몬이 그렇게 인용되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살아온 민족 역사가 항상 전쟁, 고난,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 역사 가운데 가장 평화롭고 좋았던 시절이 언제입니까? 모두 다윗과 솔로몬 통치 시절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 통치 40년과 솔로몬 통치 40년은 아주 굉장한 영화와 부귀, 평화, 안정된 생활권,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다윗이나 솔로몬에게 잘 보이려고 조공을 바쳐야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사생활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죄가 많고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약을 초점 없이 잘못 읽으면 윤리관의 시행착오가 많은 갈등을 줄 때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사생활은 성경에 나옵니다. 공식적으로 궁중에 데리고 사는 여인만 700명이 넘는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 나라, 이웃 나라 할 것 없이 욕심나는 미인은 모조리 데려다가 후궁을 삼아서 데리고 살았고, 솔로몬 왕의 왕후 자리에 앉은 여자는 애굽 바로의 딸입니다. 그 다음에는 암몬 족속의 딸 라마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실 상대도 안했는데 솔로몬이 이상하게 상대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나라 여자들을 데려다가 왕비를 삼았습니다. 시바 여왕이 찾아왔을 때는 여기서 나와 살자며 데리고 살 정도로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여인을 많이 데리고 살았어도 우리나라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님은 3천 궁녀를 데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말년은 그 이방 여인들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막 성화를 부려서 우상 숭배까지 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윤리관을 평가하면 솔로몬은 파렴치한 탕자같이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그 나라에서 사생활이 제일 타락성 있게 산 사람은 솔로몬이었다고 말해도 괜찮을 만한 생활을 보낸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솔로몬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쁜 평가를 안 하려고 합니다. 좋은 평가만 열심히 합니다. 설교자들도 솔로몬의 나쁜 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좋은 지혜나 영광 이렇게 좋은 면만 자꾸 설교하려고 하고 부러워는 해도 욕은 안 하는 문화가 완전히 형성되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다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오히려 그를 본받으려는 문화가 형성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솔로몬 재판이라고 하는 정의 기구가 생겼지 않습니까?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선전은 온 세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솔로몬 저축 은행도 생겼습니다. 제 동기생 한명은 서울 굉장한 번화가에 개업을 한다며 동기생들을 오라고 해서 무슨 개업을 하나 하고 찾아갔더니 술집을 냈습니다. 그런데 간판이 “솔로몬”입니다. 왜 술집에 “솔로몬”이라고 간판을 걸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목사는 목사면서 그것도 몰라? 솔로몬이 술을 얼마나 잘 먹었는데?” 대답했습니다. 솔로몬은 너무 말년에 향락에만 취하다가 죄를 많이 짓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를 그렇게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솔로몬은 인생 초기가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 인생 초기에 그와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솔로몬의 말년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신실성이 나타난 것이 솔로몬입니다. 사람들의 판단 기준으로는 이해가 좀 힘든 부분인데 인생 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들었는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주신 신실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 초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면 됩니다. 먼저, 솔로몬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는가? 다윗의 대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다윗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공식적으로 9명의 왕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19명의 아들이 생겼습니다. 공식적인 아들들 말고 그 외에 얼마나 있었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복잡한 가족 인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본처의 아들들이 아주 가득합니다. 

암논, 아도니야, 압살롬 이 사람들이 다 대권 후보자들입니다. 솔로몬은 엄격히 말하면 사생아입니다. 밧세바가 자기 부인입니까? 남의 부인을 빼앗아다가 살아서 거기서 낳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솔로몬이 왕이 된다는 것은 원치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이도 제일 어립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세워주셨는가? 우리 상식으로는 판단이 안 됩니다. 이렇게 몇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 어린 시절에 다윗 왕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를 자는 솔로몬으로 하옵소서.” 서원 기도했습니다. 

그 서원을 옆에서 들은 사람이 그 어머니 밧세바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약속하고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킨 것입니다. 18명의 왕 후보자들이 있었는데 그 나이 많은 넉넉한 후보자들을 다 물리치고 21살 가장 어린 솔로몬을 왕에 굳건하게 앉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서원했고 너와도 서원했다. 그 약속을 내가 지킨 것이다.” 그래서 왕이 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이제 나이가 많아서 늙었기 때문에 이제는 통치자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바깥출입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다윗 왕의 제일 신임을 받고 있고 용무도 준수하고 통솔력이 있고 국민의 신임을 얻고 있는 아들이 아도니야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윗 왕이 너무 늙어서 자기 혼자 생활도 어려워진 그 때가 되었을 때 이 아도니야는 틀림없이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또 온 국민도 그렇게 원했고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일이라서 아도니야는 왕위 취임식을 스스로 했습니다. 어느 날 국민의 존경과 부왕의 신임과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기가 왕이 되면 함께 일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실력자들을 다 초대해서 왕 취임식을 스스로 한 사람입니다. 소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왕위 계승을 선포했습니다. 

이 소식이 늙은 다윗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부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게 있다. 너와도 약속한 게 있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나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그것을 시행하노라. 아도니야가 왕위 취임식을 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아주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과 사람과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오늘 말씀 열왕기상 3장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서 한 일을 굉장히 감동 있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두 가지 큰 것을 했습니다. 하나는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때는 솔로몬이 흠과 티가 없을 만큼 깨끗한데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던 그 시절입니다. 그런데 21살에 왕이 되고 나니까, 지금 뛰어다니면서 공이나 차고 연애나 할 나이에 국민을 다스리라니 이게 얼마나 벅찬 책임감입니까? 

그러나 안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 일을 잘하기 위해 그는 제일 먼저 한 일이 산당이 있는 기브온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번제 한번 드리려면 양 한 마리를 죽여야 합니다. 또, 왕이 번제를 드리기 때문에 군중 신하들이 다 따라가야 합니다. 아마 그때 그 번제에 참석하는 신하들은 질력이 났을 것입니다. “번제를 한번만 드리면 되는 것이지 일천 번을 계속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예배만 날마다 드리고 있으면 무엇이 되나? 오늘 양을 잡아서 또 제사 드리나?” 이렇게 당연히 생각했을 거 아닙니까? 

여러분! 똑같은 번제를 10번만 드려도 질력이 나는데 일천 번을 계속하고 있으니 얼마나 질력이 났겠습니까? 지금은 번제가 구약 방법대로 드려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영광을 돌립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사명을 받은 후에 하루에 두 번 이상 설교를 하지 않으면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365일 중 하루에 두 번 이상 내가 설교를 해야지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게을리 해서 내가 설교도 하지 않고 무엇을 했나?” 회개했다고 루터의 기록에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예배가 이렇게 많아? 일주일에 몇 번씩 교회를 가야 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고 했습니다. 

번제 드리듯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교회 오실 때는 미리미리 집에서부터 기도로 준비를 하시고 몸도 깨끗하게 정리하시고 제일 깨끗하게 마련된 옷을 입으시고 헌금은 정성껏 봉투에 넣어서 가지고 오시고 제발 헌금 시간에 주머니 이쪽 주머니 저쪽 주머니 찾지 마십시오. 예배 시간 전에 오셔서 일주일 동안 살아온 과정의 잘못된 부분을 다 고백 기도로 마음을 다 정리하십시오. 그래야 영적으로 말씀이 들어오고 아멘으로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사람은 솔로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지구상에 한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900번을 드리고도 얘가 쉬지를 않는구나.”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에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아!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그리고 소원을 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왕들은 자신의 말이 법입니다. 

옛날에는 국가 재산도 “이거 너 가져라.” 그러면 그냥 갖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분당리 이 동쪽에 위치한 이 산들은 네가 가져라.” 그래서 양녕대군, 효령대군 자손들이 나눠 가져서 살고 종중 재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임금님이 주시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면서 뒷걸음질만 잘 쳐서 나오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줄 수 있는 자가 여러분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무엇을 달라고 하실 겁니까? 

이솝의 이야기 가운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전능자가 어느 날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늙은 부부를 불러서 “소원 세 가지를 말하라. 내가 세 가지를 다 들어주겠다.” 그런데 할머니가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찰떡이 너무나 먹고 싶어서 “찰떡 좀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급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느냐? 찰떡이 소원이냐? 들어주겠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찰떡을 주니까 할아버지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이 할망구가 찰떡이 소원이냐? 우리가 세 가지 소원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까짓 찰떡이나 달라고 하다니! 내가 말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찰떡 소리를 하냐?” 그래서 둘째 소원으로 “이 찰떡 좀 할망구 이마에 붙어라!” 그랬더니 찰떡이 이마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끝났습니다.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지만 찰떡을 이마에 붙이고 어떻게 삽니까? 할 수 없이 세 번째 소원은 “찰떡을 이마에서 떼어주세요.” 그래서 소원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21살입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달라고 할 게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솔로몬의 큰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행함으로 주께서 우리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나도 그렇게 해주옵소서. 내가 오늘 이렇게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방진 소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왕 될 사람인 내 형들이 18명이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중에 작은 아이이기 때문에 이 궁중 문을 출입하기에도 벅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내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왕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것이 또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어서 온 세상이 빛나게 하옵소서.” 그러지도 아니하고 “경제 대국이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적어도 내가 50년 동안, 100년 동안 이 나라 왕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런 걸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를 주셔서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랬더니 성경에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또 한 번 감동하셨습니다. 욕심 따라서 구하지 아니함이 솔로몬의 지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그로부터 40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주변의 나라가 모두 솔로몬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일은 B.C 962년에 이루어진 일이니까 3천 년 전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온 세상의 문화는 지혜를 말할 때는 솔로몬을 비유하지 않습니까? “너와 같은 자 없을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솔로몬이 먼저 행했습니다. 

우리 개인도 교회도 나라도 어떤 일을 할 때 계획에 있어서 ‘이 일이 내 마음에 드는가? 내 소원인가?’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인가?’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다른 것은 그냥 따라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역이 성전 건축입니다. “너희 아버지 다윗이 하고 싶어 했으나 내가 허락지 아니했다. 이것은 너에게 주겠다.” 여러분! 우리 갈보리교회가 성전 건축을 세계에 많이 하지 않습니까?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명의 완수를 솔로몬이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나 다윗 같은 사람은 우리 보통 평민보다도 훨씬 죄가 많은데 오늘 제 설교 제목 “솔로몬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솔로몬의 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은 뭐냐?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28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 이루어야 할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도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 만약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이요 소득의 십일조를 평생 반드시 드리겠나이다.” 피차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지켰습니까?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어디다 성전을 건축합니까? 십일조를 어디에 냅니까? 외삼촌 라반의 재산을 다 빼먹고 사기만 칩니다. 하나님의 일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지키셨습니다. “네가 벧엘에서 하란을 떠나 갈 때 나에게 뭐라고 했지? 먹을 양식 입을 옷을 달라고 했지? 준다고 했지?”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그 당시의 재산 거기서 돌아올 때 규모를 보십시오. 현대 21세기 사회에서도 그 만큼 가진 사람 큰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주시고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떠나고 모를 때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셔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곧 야곱의 의가 되고 솔로몬의 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다 제외하고 나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내 의는 무엇인가? 주님의 의가 내 의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주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뛰쳐나갑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을 때 이것이 양자택일이 되었을 때 얼마든지 뛰쳐나가서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떡하십니까? 택한 백성을 안 놓치십니다.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그게 곧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인생 초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그가 하나님이 잊어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며 온갖 타락의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고 끝까지 솔로몬을 붙들고 일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제가 이 곡을 반주 없이 불렀지만 반주 들으면서 다 같이 불러봅시다. 

“1.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2.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할렐루야!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품을 떠나서 어둠에 행할 때도 주님을 약속을 지키셔서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사 탕자처럼이라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나이다. 오늘 거룩한 주일도 우리의 마음은 수없이 다른 곳을 향했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주의 전에 인도를 받았나이다. 왜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을 끝까지 붙드셨고 야곱을 열두 지파 조상으로 삼으셨을까? 그 이유를 저희들이 성령 안에서 해석하면서 주어진 한주간의 생활도 승리하며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주의 택한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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