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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벌레 하나 때문에 (욘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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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벌레 하나 때문에 (욘 4:5-9)
  
지난 10일 미국의 과학전문 인터넷 신문인 ‘라이브 사이언스’(Live Science)가 ‘사람을 해치는 치명적인 동물 다섯 가지’를 발표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상자해파리(Box Jellyfish)입니다. 이 해파리는 크기가 축구공만 하지만, 약 4.6m에 달하는 60여개의 촉수를 갖고 있습니다. 그 촉수 하나에는 5천개의 독침 세포가 있는데, 60여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독을 품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연간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상자해파리에게 쏘여 죽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시아 코브라’라는 뱀입니다. 이 뱀이 가장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뱀은 아니지만, 워낙 널리 퍼져 있고 몰래 움직이는 습성 때문에 매년 약 천 여명의 사람을 죽입니다. 매년 뱀에 물려 죽는 사람은 대략 2만 명에서 12만 명 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전갈입니다. 전갈은 매년 3,250여명의 사람을 120만 번이나 쏘아서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갈의 종류만도 25종이나 되는데, 대부분 열대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는 1년 동안 전 세계를 통틀어 500여명이 넘는 사람을 죽입니다. 몸무게 7천kg을 육박하는 코끼리는 별다른 꾀를 쓰지 않고 발로 찍거나 날카로운 송곳니로 들이받아 사람을 죽입니다.
  
다섯 번째는 모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기가 여름에 우리를 괴롭히는 해충쯤으로 여기지만, 어떤 모기들은 말라리아균을 옮기는데, 그 말라리아로 인해서 한 해 약 50만 명에서 90만 명의 사람이 죽게 됩니다. 말라리아로 인해서 죽는 그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사는 5세 이하 어린이라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모기를 제외하고는 우리 주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사는 동물들이 모두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이거나 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벌은 침으로 우리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벌이 없으면 우리가 여러 가지 과일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과일나무에 꽃이 피었을 때 벌이 수술에 있는 꽃가루를 암술머리로 옮겨주어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채소 대부분은 이런 벌의 도움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기에 벌은 우리에게 아주 이로운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 이로운 동물인 벌일지라도, 때로는 그 벌에 쏘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제나 이로움만을 주는 동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고, 반대로 언제나 우리에게 해만 끼치는 동물도 없습니다.

여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 작은 벌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작은 벌레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내가 그 먼 길을 가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진 않으시고 ‘너만 가는 것이 아니라 요나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요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 갈 수 있지만 자신은 느릿느릿 가야 하기 때문에 그 먼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인지라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니느웨로 가던 도중에 들러오는 소식은 자신보다 더 빨리 니느웨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이라면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왜 요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그리고는 묵묵히 니느웨를 향해 갑니다. 니느웨로 가던 중에 그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었고, 이유도 모른 채 니느웨로 가야한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니느웨에 도착했습니다. 자신이 니느웨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다가 죽을 뻔한 요나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요나에게 있었던 지난 일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니느웨로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먼 길을 온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그 하나님을 명령을 그저 순종해서 그 먼 길을 왔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는 것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를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실 계획이라는 것을 요나는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그 도시는 그대로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 풍랑이 요나 때문임이 드러나자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시고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캄캄하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꼬박 지내야 했습니다. 요나는 거기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어리석음을 회개하게 되었고, 마지못해 느니웨로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상했습니다. 니느웨가 지난 날 자기 나라에 어떤 일을 행했는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애써 땀흘려 키워놓은 곡식과 짐승들을 다 빼앗아가버렸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니느웨 백성들이 너무너무 미웠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셨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그리하셨던 것처럼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켜버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0일 후면 이 도시가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하고 말 것이오!’ 요나의 그 외침을 듣고 니느웨 성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났습니다. 그 40일 동안 니느웨 성안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벌레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니느웨 성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작은 벌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떠나올 때에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니느웨 백성들은 포악하고 죄짓기를 밥 먹듯 하는 못된 놈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 운동일 일어나다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작은 벌레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이곳까지 오라고 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 명령하십니다. ‘저 앞에 보이는 동쪽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그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보니 요나가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초막을 하나 지어놓고는 거기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며 니느웨 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초막으로 인해 뜨거운 태양 볕은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에 요나는 그 초막 안에 앉아서 니느웨 성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더운 바람만 아니라면 니느웨 성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곳은 경치가 제법 좋은 곳이었습니다. 요나에게 다가가 반갑다고 인사를 하려 하는데 요나의 얼굴은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아는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벌레는 왜 요나가 그렇게 짜증이 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 싫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억지로 여기로 보내셨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심판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심판하실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요나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아직도 이 니느웨 성과 그 백성들이 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회개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는 백성을 심판하시거나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잔뜩 짜증난 얼굴로 ‘그래도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빨리 멸망시켜버리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니느웨 성을 바라보면서 언제쯤 망할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이는 낮이면 숨쉬기조차 힘든 니느웨의 날씨에도 요나는 초라한 초막 아래 앉아서 니느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작은 벌레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요나를 바라보면서 작은 벌레는 요나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신다고 하시면 반드시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니느웨까지 오면서 작은 벌레가 철저하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생각 역시 변함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니느웨 성이 멸망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이는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 앉아서 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나의 얼굴은 태양 볕으로 인해 검게 그을렸습니다. 비록 초막을 지어 그 아래 앉아있긴 하지만, 그 초막이 뜨거운 태양을 다 막아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오기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쓸데없는 떼를 쓰는 것처럼, 요나가 하나님께 쓸데없는 떼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요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날 것 같지 않은 그 메마른 땅에서 박넝쿨 새싹이 돋기 시작하더니, 요나가 지어놓은 초막의 기둥을 타고 금새 커다랗게 자랐습니다. 그리고는 요나의 초막 지붕을 큰 잎사귀로 가려주었습니다. 그제서야 잔뜩 찌푸렸던 요나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그 박넝쿨로 인해서 너무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작은 벌레도 그런 요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로 인해 힘들었는데, 그 박넝쿨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작은 벌레도 요나 몰래 박넝쿨 그늘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벌레도 이제야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서 또 작은 벌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박넝쿨 밑동을 갉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박넝쿨로 인해서 요나가 얼마나 기뻐했는데, 그 박넝쿨을 갉아먹어버리면 곧 박넝쿨을 시들어버릴 것이고, 그리고 곧 태양이 떠오르면 요나는 또 짜증을 낼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벌레는 박넝쿨을 갉아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커다란 박넝쿨을 갉아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맛이 어떨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작은 벌레는 박넝쿨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밑동을 갉아먹으라 하시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런데 막 잠에서 깨어난 박넝쿨은 쿨하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하나님께서 여기서 자라라고 하셔서 이렇게 큰 거야.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 생명도 여기서 끝나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갉아 먹으렴.’  
  
작은 벌레는 열심히 박넝쿨의 밑동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작은 벌레는 기대를 가지고 박넝쿨을 갉아 먹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니 이렇게 맛이 있구나!’ 한참을 포식하자 박넝쿨 밑동을 다 먹어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박넝쿨은 금새 시들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곤 곧 해가 떠올랐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시들해진 박넝쿨이 곧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동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벌레는 두려웠습니다. 그 동풍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시로코’라고 불리는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입니다. 이 시로코가 불면 기온은 급상승합니다.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고 대낮과 같이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공기 중에 습도를 다 빨아먹어버리기 때문에 사람의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바람입니다. 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들시들해진 박넝쿨은 이미 바짝 말라 먼지처럼 되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요나의 얼굴에 그대로 내리쬐었습니다. 

작은 벌레는 요나의 초막 기둥 아래 바짝 엎드리고서 요나가 어떻게 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요나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그 기뻐했던 모습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또 떼를 씁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작은 벌레가 곁에서 생각해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요나의 모습 가운데, 박넝쿨이 햇볕을 가려줄 때 기뻐하던 것을 빼면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그러자 요나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꾸했습니다. ‘내가 화를 내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박넝쿨을 하루만에 죽이시고는 이런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십니까?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더니, 어찌 제게는 그런 자비 하나 베풀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작은 벌레는 요나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로코라는 동풍이 불어와서 요나가 지은 초막을 날려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박넝쿨 하나만 사라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박넝쿨도 요나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이 자라도록 물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쑥쑥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가 애써서 키운 것을 빼앗긴 것인 양 하나님께 짜증을 부립니다. 심지어 박넝쿨을 가져가시려면 자신의 생명도 가져가버리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짜증을 부리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박넝쿨을 주신 것은 요나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박넝쿨을 주셨다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없습니다. 박넝쿨이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습니다. 
  
작은 벌레는 비단 요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애벌레에서 깨어난 이후 만난 사람 가운데, 그리고 니느웨까지 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한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온 세계가 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신을 위해서 늘 일하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박넝쿨을 준비해서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셨다면,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할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에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감사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남이 누리고 있는 것은 배 아파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작은 벌레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박넝쿨이 주어질 때에는 그렇게도 기뻐하더니, 니느웨에 살고 있는 수십만 명의 생명에게 구원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못된 심성임도 작은 벌레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가 조금이나마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안달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벌레는 오래 전에 들었던 욥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 엄청난 재산을 침략자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수천마리의 양들은 자연재해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쁘게 자라던 10명의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죽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가슴 아프지만 그런 상황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작은 벌레는 욥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요나의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먼 길을 왔습니다. 그 길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그러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박넝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늘 네 생명이 끝난다.’ 그러시면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였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움켜쥐고서 내 것이라고 고집 피울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내 손에 쥐어졌다고 다 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애쓰지 않았음에도 자기 것인 양 착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빌려주어 쓰게 하신 것을 되가져 가실 때에 인간은 그걸 놓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발버둥을 칩니다. 아무리 움켜쥐려고 해도 내 손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작은 벌레가 생각할 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습니다.
  
자신도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지만, 박넝쿨처럼 ‘이제 됐다. 거기가 네 무덤이다.’ 그러면 그런 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을 생각하니 작은 벌레의 마음이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그런 인간들 중에 그래도 욥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욥이 참으로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건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잊고 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산다면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불평할 것이 아닌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손에 쥐어진 것만을 바라보니까 그것이 사라지면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인 양 억울해하고 아까워합니다. 

니느웨에서 요나를 바라보면서 작은 벌레는 참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데,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인 양 움켜쥐고 살려 합니다. 그렇다고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내 것도 아닌 박넝쿨은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수십만 명의 생명은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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