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대상 21:7-22:1)

첨부 1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대상 21:7-22:1)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좀 잘 되면 절로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자라나는 호박에 말뚝 박는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냥 속으로 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잘 되어가는 남의 일에 반드시 훼방을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그처럼 남이 잘 되는 꼴을 절대로 그냥 보지 못하고 반드시 방해를 해야 속이 시원해지는 못된 성격으로 말하자면, 사단이야말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동의 1위입니다.
본문 1절 이하에 보면 바로 그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함으로써 다윗 인생의 말기에 최대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앞의 몇 장들에 보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하면서 많은 금은과 놋을 모음으로써 장차 자기 아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22장에서는 다윗이 그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이제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그 성전 건축의 과업을 완수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 사이에 '사단이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지도 아래 온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마음과 힘을 모아 준비하고 이제 그것이 솔로몬을 통해 곧 실현되려 하는 마당에 사단은 그것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까닭에 그 사이에 끼어들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단의 방해공작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계수하도록" 즉 인구조사를 하도록 격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사실 왕이 자기 나라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처럼만 보이겠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아주 중대한 영적 문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 인구조사는 5절에서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만한 자"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 휘하의 사람들을 의지하는 불신앙을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군대장관 요압은 바로 그 심각한 문제점을 알아차리고 다윗에게 간했지만, 이미 사단의 시험에 걸린 다윗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고 결국 그 인구조사는 강행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한창 잘 나가던 중에 큰 시험에 빠지고 하나님 앞에서 중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종 다윗이 그 '실족'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선'하게 버려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실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처럼 다윗은 그 시험으로 인하여 결국에 가서는 더욱 성화되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단이 일어나'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성도는 과연 어떤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시험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7절부터 14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7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9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10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11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12혹 삼 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13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14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 인구조사는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여기신, 실로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반응으로 그 노하심을 즉각 나타내셨을 때에 다윗은 당장 자기 잘못을 알아차리고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제가 정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깨끗하게 자복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다윗의 죄는 이미 용서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그에 대한 죄값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그 벌은 이 세상에서 받게 하실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삼 년의 기근'이나 '석 달 동안의 패전과 도망'이나 아니면 '삼일 간의 온역' - 이 셋 중에 하나를 다윗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어느 것이라 해도 다윗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 가지 선택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게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벌 역시 그처럼 중하게 내리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해 볼 때 다윗이 얼마나 난처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죄는 이미 저질러 놓았으니 그야말로 '엎지른 물'이었습니다.
용서는 받았지만 벌은 여전히 마땅히 받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 벌도 그저 자기 혼자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화가 미칠 일을 세 가지 정해 놓으시고 그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13절에서 다윗이 "내가 곤경에 있도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렵고 괴로운 진퇴양난 중에서도 다윗은 실로 놀라운 탈출구를 발견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그 셋 중에 하나를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바른 판단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도저히 무슨 결정이란 것을 내릴 수 없는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다'라는 사실에서 한 줄기의 빛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어렵고 괴로운 와중에서도 최소한 '사람의 손에 빠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벌을 받아도 하나님의 손에 빠져서 벌을 받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무슨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죄값을 치러야 할지 몰라서 가슴이 꽉 막힐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손 안에 확실히 있는 중에 그런 것이라면, 그 하나님은 본성이 어쩔 수 없이 긍휼하신 분이니 내게는 희망이 있겠다.'라는 것이 다윗이 상기해낸, 그리고 끝까지 붙잡았던 신앙고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런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정답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저를 이렇게까지 정죄하십니까?"라는 따위의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제게 내리시는 벌이 너무 중합니다."하고 하나님께 대들지도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저 나름대로 양심에 괴롭기 짝이 없는데 그런 어려운 선택을 주시다니 너무하십니다."라는 말조차 입에서 내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이라면, '가인' 같은 사람이라면 열 번 백 번도 더 항의했을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그저 자신의 범죄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오직 긍휼의 하나님께만 더 바짝 달라붙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에게 매를 맞는 아이가 그 와중에도 오히려 아빠의 바지자락이나 엄마의 치마폭을 꼭 붙잡으면서 달라붙는 모습과 같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비록 지금 자기를 때리는 사람도 부모이지만 그렇게 맞고 있는 자기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도 바로 그 부모뿐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자녀에게 징벌을 내리실 때에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비록 벌은 주고 계시지만 그처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야말로 그 자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단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완전히 파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끝까지 의지하고 믿는 신자는 비록 벌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하나님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간절히 사모하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자칫 범죄한 후에도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따끔한 매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만을 붙잡게 되고 그 결과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제는 '맛보아 알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런 신자는 사단이 좀 집적거려서 잠시 넘어지게는 할 수 있을지라도, 당장 벌떡 일어나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복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칠전팔기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세상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벌어지게 하시는 시험이 도저히 수긍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아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이 진퇴양난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지 그저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할 때를 당할지라도, 바로 그럴 때일수록 절대로 '사람의 손에 빠지지' 말고 오직 '긍휼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만을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이전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시험을 통과한 후에 교회를 더욱 귀히 여기게 됩니다.

21장 18절 이하 22장 1절에 "18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19다윗이 이에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올라가니라 20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 21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매 오르난이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마당에서 나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매 

22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23오르난이 다윗에게 고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24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고 

25그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26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28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29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30다윗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함이라 1다윗이 가로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제게 대한 처분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맡기겠습니다.'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벌 중에 제일 마지막 것을 스스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14절에 기록된 대로 "온역"을 3일 동안 이스라엘 땅에 내리셨고 그 결과 "칠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사무엘하 15장에서 20장에 나타나 있는 대로, 이 사건 조금 전에 있었던 '압살롬의 반역'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과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그 반역에 가담했던 그들 자신의 죄값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삼 년이나 석 달 동안 나라가 황폐되고 전쟁통의 난리를 겪는 것보다는 이 세 번째 벌이 가장 자비로운 처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그 징벌을 수행했던 하나님의 사자가 예루살렘을 향해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보시고 뉘우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시행착오를 행하셨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대로 하나님을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묘사한 표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재앙의 징벌을 그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그 하나님의 사자는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란 곳에 있었습니다.
16절 이하에 보면 그때 다윗은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를 입고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그 재앙을 그쳐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그 징벌의 손을 멈추고 계셨지만, 다윗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에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멈추고 차라리 자기를 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진심으로 회개를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아니 오히려 그 전부터 이미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용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훨씬 더 큰 은혜를 다윗을 위하여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쳐 주시기를 간구했던 바로 그 장소, 즉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타작마당은 옛날에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모리아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후에 바로 그곳에다 다윗은 자기로서는 전혀 계획하지도 않았고 예상치도 못했던 제단을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쌓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타작마당을 공짜로 제공해 드리겠다는 오르난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그 땅과 제물과 화목으로 쓸 나무까지 다 넉넉한 값을 지불하여 정식으로 구매한 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이 방금 저지른 죄에 대한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 년 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실로 놀라운 '여호와이레'의 은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곧 다윗이 그 특별제사를 드린 후에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고 깨닫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즉 다윗은 자기가 지금 막 제사를 올린 그 장소가 장차 솔로몬을 통하여 지어질 성전의 터가 될 것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한량없는 큰 은혜를 체험했었습니다.
'범죄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니 제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라고 통회자복하면서 베옷을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자기의 지은 그 중한 죄를 두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집에 꽂는" 모습을 보게 됨으로써, 이제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하여 깨끗하고 완전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로 그 장소야말로, 다윗이 깨닫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전 부지'로 내려 주신 곳이 틀림없었습니다.
성전을 짓기에는 그 곳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신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장막과 번제단이 있던 기브온 산당은 이제 다윗에게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다윗에게는 그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 지어질 터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 세워질 곳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사단이 방해하려 했던 일은 그 사단이 획책한 시험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빠졌던 다윗에게 용서의 은혜와 소생의 새 힘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성전 건축'의 사명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추진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곳에 우리의 참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곳에서 '바로 여기가 내게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구나. 이 자리가 곧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할 번제단이구나.'라는 확신이 들겠습니까?
과연 어떤 곳에서 우리의 마음에 '이 교회야말로 내가 섬길 교회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예배생활과 충성된 봉사생활을 해야 할 교회임에 틀림없다.'라는 결단이 불 일 듯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성전이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받는 감격의 체험을 하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바로 그런 인자하신 아버지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하게 될 때, 그 심령은 그 순간부터 진짜로 '성령을 모시는 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는 눈물을 흘리고 속죄함을 받은 기쁨이 나누어지는 '산 제사'를 드리게 될 때에, 바로 이 경향교회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정말 '내가 예배 드려야 할 교회', '내가 섬겨야 할 교회'로 의심 없이 확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는,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그 본인과 그 교회의 성도에게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요 최고로 은혜로운 제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멋있고 화려한 건물의 성전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의 제사를 올리고 있는 한 성도의 '심령의 성전'의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많이 모이는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예배로 모일 때마다 모든 성도들이 죄용서의 기쁨과 구원의 확신을 충만히 누리는 그런 '교회의 영광'과는 도무지 상대조차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대속의 은총'이 각 성도의 심령을 통하여 체험되고 공감되는 교회만이 이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각자의 인격을 통하여 들을 줄 아는 예배 시간만이 오늘의 '모리아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 죄를 범했을 때, 또한 그 때문에 중한 징벌을 받게 되었을 때일수록 이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제단'이 있는 교회를 더욱 사모하며 그 '제단 뿔'을 잡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사죄의 은총과 소생의 기쁨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평소에 아주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학생이 있는데 무슨 사기꾼이나 폭력배가 그 아이를 꾀어서 범죄 소굴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부모가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부모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라도 그 자녀의 실족을 막을 뿐 아니라, 다시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 사랑하는 아들딸을 지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가 사단에게 꾀임을 당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사단은 자기 딴에는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어서 다윗을 시험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단이 감히 필적도 할 수 없는 고수이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녀 된 다윗, 당신의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택해 놓으신 다윗을 그따위 사단에게 빼앗기실 분이 절대로 아니셨습니다.
  
아니, 다윗을 그냥 원상복귀만 시켜 주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매달리게 하고 이전보다 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성도로 하여금 이처럼 사단의 시험을 당했을 때에도 오히려 그것까지도 다 합력하여 결국에는 선이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우리는 그저 감사 찬양을 올릴 뿐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를 걸어 넘어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을 대적하려는' 사단의 잔꾀는 '하늘 아버지의 긍휼'을 끝까지 의지하며 '그의 손에 빠지기'를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어나 다윗을 격동시키는' 마귀의 시험은 '주의 제단 앞'에 나아와 엎드리는 성도에게는 오히려 '그 풍랑 인하여 더 빨리' 주님께로 나아가고 그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는' 성화의 역전승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까지 미혹케 하려는 사단의 온갖 시험 가운데서도, 성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암탉이 제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끝까지 보전하는 주님의 은총을 늘 확신하고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