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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제자가 되려면? (눅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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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제자가 되려면? (눅14:25-33)

지난주간 Z국에 가서 신학교 졸업식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10년이 되어 벌써 제 7회 졸업생이 배출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창세기 22장은 창세기 중에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듯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리아 땅의 산으로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고 새벽에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갑니다. 

성도 여러분! 왜 3일 길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 자리가 아닌 3일 길이나 되는 그 먼 길을 가라 하셨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입니다. 

그러기에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어찌 주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길을 가다가 주저앉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회의를 품고 의심도 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께 따질 것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 인신 제물을 원하시나요?” “왜 하필이면 이 아들입니까?” “주실 때는 언제고 왜 이제 달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이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목적지까지 갑니다. 그리고 종들을 산 아래 머물게 합니다. 방해될 것이 뻔하기에 방해할 요인을 미리 제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질문에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아버지 번제할 나무는 있는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신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들이 제물인데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대로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아들을 결박하여 올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쳐들어 내리 치려할 때 하나님이 Stop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엄청난 복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22:16~18를 보세요.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스톱시켰을까요? 
그리고 왜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을까요? 그가 순종했기 때문에? 맞습니다.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리아 제단에 이들을 받친 아브라함의 마음과 골고다 언덕에 독생자 예수님을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일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코드가 맞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쓰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서 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주님 보시기에 누구십니까? 많고 많은 성도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을 누구라고 인정해 주실까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많은데 주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가 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이키시면서 “내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몇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따른다고 다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냐, 제자냐의 구별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나이나 외모나 학벌이나 출신이나 능력이나 그런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던 “허다한 무리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병을 치료하거나 먹을 것을 찾거나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가운데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허다하게 많은 신자 중에 하나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인정하는 제자로 살아가십니까? 예수께서 찾고 계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떤 자가 되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이 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찾으시는 참 제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주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합니다. 

26절을 보세요,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의 제자가 됩니까?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만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부모 형제를 미워하라 하셨겠습니까?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미워함이 아닌 사랑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정말 주님의 제자라면 누구를 가장 사랑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최우선 순위가 사람이 아닌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보다 자신의 체면을 더 사랑하고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면서도 찬송가 94장은 아무런 가책 없이 부릅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나는 여러분이 정말로 이 찬송가 가사처럼 “주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이유로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며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않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나요? 
먼저는 시간의 씀씀이와 돈의 씀씀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축구의 황제 ‘펠레’에게 물었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가 말하기를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공을 차는 시간이고요, 공을 안 차면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요, 축구에 대해 이야기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한 꿈만 꿉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오로지 축구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지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예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세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기뻐하는 일에 믿음으로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예배하고, 사랑하기에 섬기고, 사랑하기에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예배 여러분의 봉사, 여러분의 헌신이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정말 신앙생활하시기 힘드실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다른 것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왜죠? 진정한 제자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최고의 사랑, 제일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고, 구주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허다한 무리,” 즉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납니다. 주님보다 자식을 다 사랑합니다. 주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보다 자기 집과 직장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위해서는 온갖 물질과 마음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전부 사랑의 우선순위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24를 보세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뭡니까? 그것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접는다”는 것입니다.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하실 때 흔히 치르시는 시험이 “사랑시험”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아브라함 시험은 사랑시험입니다. 

여기에 합격하면 모든 것이 통과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후 아무런 시험을 받지 않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냐 아니냐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면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분에게 여러분의 자식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습니까? 아니 자식은 그만두고 여러분의 생명을 드릴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생명을 드렸습니다. 현재의 그들의 보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모두가 다 주를 위해 목을 내어놓은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대한 제자 삼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가 올바로 세워진 주님의 제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2.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27절을 봅니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서 특별히 관심 가져야 할 단어는 남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 십자가”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위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꿈과 비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밤잠을 자지 않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성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지불 없이 거져 얻는 것을 바라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많이 내게 하려면 과원지기가 그만 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 주님의 제자는 ‘자기 성’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왕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이 ‘부인하고’ 라는 부분을 ‘버리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버린다”는 뜻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2:20절에서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때부터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가 내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버리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 욕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부귀영화’ ‘명예 권세’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이 변합니다.   

적당히 인생을 즐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사람은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도 믿고 교회도 다니되 적당히 믿고 적당히 섬기려 한다면 사단은 그런 사람을 꽉 붙잡고 주님을 닮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보세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사신 삶은 전적인 자기 부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셨으면서도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지 않으셨고 오히려 베들레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 촌에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나 여리고 같은 대도시에서 살지 않고 변방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대가지불”을 통해서 제자로서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보세요.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어떻게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나요? 우리가 주님의 제가가 되려면 집이고 재산이고 다 버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전에는 귀하게 여기던 것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천하게 보이고 예전에는 헛된 것으로 보이던 것이 예수님 믿고 나서 귀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는 예배가 별 볼 일 없는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니 변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 믿고 나니 중요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도저히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가롯 유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은 하지만 이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국 변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따라 다니려니 이해가 안 되고 그러다보니 막판에 은30에 배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가치관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고 미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멘? 

어느 교회 집사님 남편이 교회를 안다녔답니다. 그런데 부인과 늘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헌금도 아깝고 아내가 늘 새벽 기도 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더랍니다. 

도대체 뭘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 막아보기도 하고 싸워보기도 했는데 포기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에는 아내가 교회를 가기에 슬그머니 따라가 보았답니다. 교회를 가서 도대체 뭘하는가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멀찍이 따라 가보니 교회로 들어가는데 자기도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좀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좀 크니 눈치를 못 챈 것입니다. 

예배 후 불을 꺼서 약간 어둡게 해놓고 기도를 시작하자 살그머니 부인 가까이 와서 뒷자리에서 기도를 하는척하고 기도를 엿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남편 건강을 위해, 직장을 위해, 가족들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고 거룩해 보였답니다. 

그 남편은 먼저 일어나 집에 들어와 자는 척 하는데 잠이 안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맘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일 교회 가려고 준비하는 아내에게 ‘나도 가도 되느냐’ 하고는 따라 왔답니다. 그 후 그는 불같은 믿음을 갖고 성경을 배우게 되었고 교회에 각 부서에서 봉사하다가 장로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새벽제단 쌓는 것도 보통 힘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치를 알면 하지 말라 해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어려운가요? 가치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가치관의 변화가 없이는 신앙생활은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변하면 우리 인생이 변합니다.   

“무리”로 표현되는 신자는 자기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질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는 것을 손해로 봅니다. 그러기에 적당히 믿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순간순간 타협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가치관이 변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주님만 바라보고 갑니다. 물론 넘어질 때 있습니다. 잠시 흔들릴 때도 있고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갑니다. 
왜죠? 그 길이 남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이 제자가 되길 원합니까? 주님은 지금 많은 무리 속에서 제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에 속하지 마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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