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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니 (창 47:27-31)

첨부 1


아버지! 
이 가득한 계절에 그리움도 가득합니다.
당신의 이름에다 붙이고 싶은
호(號)가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높고 아름다운 편운(片雲)입니다. 
자식들 보기에는 
아버지 당신은 낭만을 노래하는 여유 있는 편운(片雲)입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는 자식들에게 항상 미안한 편운(片雲)입니다. 
구름이라면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막아주고 
구름이 되었으면 
때를 따라 갈한 대지를 적셔주어야… 
아버지 당신의 아들과 딸들은 운명처럼 편운(片雲) 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내 인생의 지표(指標)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내 인생의 그리움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내 인생의 자랑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내 인생의 존경입니다.
누가 감히 묻는 이 없겠지만… 
아버지 당신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통곡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자식을 위하여는 무한의 능력인양 사셨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아버지 당신은 외로운 편운(片雲)이었습니다.
아버지 전설 같은 당신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
(G. W. Gahng).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사랑의 사람 이삭, 소망의 사람 야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시작됩니다. 이들 계보의 믿음, 사랑, 소망의 특성을 대표할 만한 자손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무대에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는 이기는 자"란 뜻입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예표론적 삶입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로 시작해서 축복의 꿈을 꾸는 아들이었습니다. 
이복형제들에 의하여 그는 고난당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합니다. 요셉은 본의 아니게 아버지 야곱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양심 때문에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받은 요셉은 승리의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흉년 만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축복의 아들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축복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만난 흉년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요셉의 생애 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묵시적인 교훈과 신, 망, 애에 빛나는 그의 삶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진정한 효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고 오는 세대에 약속 있는 첫 계명에 대한 영원한 효(孝)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채색 옷은 고운 옷으로 손이나 발까지 내려오는 겉옷을 말합니다(삼하 13:18,19). 제사장들이 입던 옷입니다(출 28:4; 레 8:7).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의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절에 『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스가랴 3장 3-4절에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18절에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7장 14절에 『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16장 15절에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세상이 미워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요일 3:13). 


Ⅱ. 아버지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37장 13절에 『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양을 치는 자식들을 염려하여 요셉을 시켜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세겜에서 불상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다시 세겜으로 간 것은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35:5). 

그 이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위험을 무릅쓴 담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도 불구하고 이복형제들과의 우애를 존중히 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형들과의 우애가 좋지 아니했다면 낯선 세겜 땅으로 가라는 야곱의 명령을 불순종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시기하고 있는 형들에게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부여된 아버지 야곱의 부탁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요셉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된 인물입니다(빌2:8). 
부모에 대한 순종은 효의 근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절대적, 무조건적 순종은 아닙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은 오히려 불효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 주 안에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22절에 『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밀톤(Milton)이나 부러스(Brace)같은 사람은 이교도 부모가 아닌 그리스도 부모를 전제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소극적이고 완곡한 표현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부모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 주 안에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곧 그의 복된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순종은 교회가 받은 사명과의 관계에서 찬란한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Ⅲ. 아버지에 대한 사모의 정이 있는 사람 입니다. 

1) 아버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창세기 43장 27절에 『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라고 했습니다. 흉년이 든 가나안에서 애굽에 곡식 사러 온 형들로부터 고향의 소식을 듣고 울었습니다(창 42:24).

두 번째 곡식을 사러왔을 때 보고 싶었던 베냐민을 보고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숨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관심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흉년이 든 땅에서 아버지가 혹시나 어떻게 되었는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2)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9-10절에 『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3) 아버지를 섬길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11절에 『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4) 아버지를 모셔 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19절에 『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비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고 했습니다. 

5) 아버지를 극진히 맞이하여 모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46장 29절에 『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 땅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라고 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오랜 줄로만 알았던 22년 만의 부자 간의 상봉입니다. 요셉을 잃고 얼마나 울었던가 그러나 요셉이 이렇게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으랴. 야곱은 『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라는 말로 이 감격을 대신했습니다. 
지금 죽어도 좋을만큼 여한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표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같은가 봅니다. 


Ⅳ. 아버지가 이 세상 사는 날 동안까지 공경 한 자입니다. 

1) 부친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본문 47장 29-30절에 『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라고 했습니다.

2) 요셉은 부친의 사는 날 동안 변함이 없는 부권을 인정했습니다.
창세기 48장 10절에 『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무릎 사이에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48:12). 요셉이 아버지의 우수를 장자 므낫세를 향하게 하고 좌수를 차자 에브라임에게 향하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생각과는 달리 야곱은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어긋맞게 얹었습니다(48:14). 
요셉이 이것을 보고 자기가 원한대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48:19). 

여기서 얻는 교훈은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자가 아닐지라도 축복의 계승자는 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이, 에서보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우선권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에브라임지파는 왕국 분열 후 북왕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야곱의 예언적인 축복은 성취되었습니다. 

3) 눈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창세기 50장 1-3절에 『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 요셉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장사하고 올 것을 바로 왕에게 고했습니다. 바로 왕은 기꺼이 요셉에게 부친의 장례를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장례는 거창했습니다.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궐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이 장례에 참예했습니다.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요셉은 부친을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초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가 늙어도 여전히 부모로 인정하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부모가 죽었을 때 그 얼굴에 입 맞추고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견마지양(犬馬之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지부모를 부양(기르는 짐승)할 뿐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부모들은 그 반대가 좋을 것입니다. 
효의 기회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효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은 자식은 효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역시 살아 있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금세와 내세에 약속 있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시니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다 형통함을 입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우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의 흉년 때문에 굶어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요셉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버렸던 원수 같은 형제들도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요셉의 아버지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온갖 흉년들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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