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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다 (출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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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다 (출 7:14-25)

저는 서울의 금호동이라는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나서 2~3살 때 아버님이 금호동에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기에 그곳에서 30여년을 살았습니다. 집이 산동네에 있었기에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다른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고, 홍수가 나는 뉴스를 보면 가끔 생각이 납니다. 

언젠가 큰 홍수가 났을 때, 한강 둑 근처의 아랫동네가 물에 잠겨있어서 온통 물로 차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한강 둑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뉴스가 나올 때에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 집은 지대가 높은데 있어서 집이 잠길 걱정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자라난 집이 물에 잠기려면 ‘노아의 홍수’정도는 되어야 잠길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도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온 곳들이 있었습니다. 어제 밤부터 오늘까지도 많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비를 마치 물 폭탄을 터뜨리듯이 내리니 곳곳에 물난리가 납니다. 지대가 낮은 곳이나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태풍이라도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 삶의 장에서 경험하는 많은 재앙들이 있습니다. 그 재앙들의 대부분은 자연적인 재앙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북한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북한에는 산이 헐벗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개간할 수 있는 곳은 다 개간했기 때문에 울창한 산림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쓸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90년대 이후 자주 반복되어서 계속적인 재앙을 맞이하게 되어 회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그곳의 정치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만을 위해 백성을 억압하며 통치합니다. 

여러분, 재앙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재앙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이미지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출애굽기 7~11장에 나타나는 재앙들은 애굽 땅을 통치하고 있었던 당시의 바로와 바로를 추종하던 사람들, 또 바로의 뒤에서 역사하고 있던 사탄,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던 그 시대의 문화와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볼 것인데,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선 장면을 보았습니다.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고 하는 그 바로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불러 그들로 같은 마술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때에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그 마술사들의 뱀들을 삼켰습니다. 

애굽에서 뱀, 즉 코브라는 바로의 왕권을 상징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그 바로의 왕권을 상징하는 신적 존재인 코브라를 아론이 던진 하나님의 지팡이가 삼켰다는 것은 바로의 왕권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이 진짜 왕이시다!”, “바로보다 더 강하신 위대한 왕이시다!”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왕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누구입니까? 나라의 주인이고,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나라의 주인이고, 통치자입니다. 왜,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왕 되심을 선포하시려고 그 기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들은 어두움의 영이 왕노릇 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믿고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왕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애굽에 내려지는 10가지 재앙 중, 첫 번째 재앙에 대한 말씀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첫 번째 재앙은 ‘피’ 재앙입니다. (15절)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 ‘아침에 바로가 나일 강가에 나올 것이니, 그 때에 너는 그곳에서 바로를 만나라’, 

바로는 습관처럼 아침 일찍이 나일 강가로 나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 바로가 새벽잠을 설쳐가며 아침에 나일강가로 나갔을까요? 그것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먼저, 바로가 아침마다 나일 강가로 나가서 산책을 즐기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나일 강의 신을 숭배하는 아침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 그런데 현대에 발견된 고대 애굽의 파피루스(고문서)에는 나일 강 숭배 의식을 거행할 때 제사장들에 의해 불리워졌던 찬미가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애굽의 바로는 우상숭배에 열렬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일 강은 길이가 6700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그 강이 1년에 한 번씩 범람하는데, 이때 강 밑바닥에 있던 기름진 흙과 거름이 땅으로 올라와서 당을 옥토로 만들어 이집트에는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나일 강 하구에 있는 기름진 땅, 고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집트에는 일찍부터 나일 강을 신격화 시켜서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나일 강을 지키는 유명한 신이 셋이 있었습니다. 

1) ‘하피(Hapi)’라는 신인데, 나일 강을 다스리는 제일 유명한 남자 신입니다.  

2) ‘이시스(Isis)'인데, 나일 강의 여신입니다. 

사실 남신과 여신 사상은 원시적인 애니미즘(Animism, 정령신앙) 신관에서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끼친 무서운 영향 중에 하나는 카톨릭의 실수인데, ’어떻게 하나님만 있느냐, 하나님 하고 비슷한 여신이 있어야지‘ 해서 마리아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마리아가 존경과 축복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신의 자리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고대문화 속에는 항상 이런 남신과 여신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제천에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가 번창하고 있는데, 그들은 교주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3) ’크눔(Khnum)\'이라는 신으로 앞의 두 신보다 지위는 낮지만,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자로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하피’, ‘이시스’, ‘크눔’, 이렇게 나일 강을 지키는 세 신이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들이 나일 강을 보호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도 이 나일 강의 신들이 생명과 풍성함을 주관한다고 믿었기에 그 신들을 경배하려고 아침마다 나일 강을 찾은 것입니다. 

이 나일 강의 신들과의 영적전쟁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바로는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면에 나서신 것입니다. (17절)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그동안 바로와 애굽인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자기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일 강이 피가 되게 하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여호와가 우주만물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겠다는 것입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하게 되면, 죽음의 강이 되어 물고기가 죽고, 물에서 악취가 날 것이다’, 그러면서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주일 동안이나 ... 그래서 물속의 생명들이 죽고, 물을 이용할 수 없는 완전한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22절) “애굽의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애굽의 술사들이 어떻게 그런 요술을 행하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눈속임의 마술로 그런 것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은 왜 첫 번째 재앙으로 나일 강이 피가 되게 하셨을까요? 

1) 이집트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선물인 나일 강 때문에 물고기가 살고, 농사에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면 강물을 주신 참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나일 강을 우상으로, 신으로 섬겼음. 참으로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받은 축복에만 집착하고, 엉뚱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숭배하는 나일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들어서, 생명의 주인은 나일 강 신이 아닌 하나님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2)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일 강 신을 심판하는 것은 오랜 세월 나일 강 문화에 찌든 이스라엘의 사고전환을 위한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의 생사는 나일 강이 아닌 하나님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이방인들에게는 ‘피’라고 하면 죽음과 관계된 공포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애굽인들에게 나일 강이 피로 변한 사실은 곧 저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이 다른 신에게 패배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피의 의미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생명이 피 속에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희생 제사에서 피는 그 안에 있는 속죄의 능력과 생명적 신비의 요소를 연결시켜 죄를 대속하고, 새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다”, 무엇이 생명의 주인이라고요? ‘하나님’,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그 지배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왜 애굽인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당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일 강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받을 복에 집착하면 안 될 일입니다. 


2.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나일 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장난감과 과자를 갖다 주고 혼자 있게 해 보십시오. 조금 지나면 엉엉 웁니다. 왜요? 엄마가 안 보여서... 아이에게는 엄마가 전부입니다. 그 엄마가 안 보이는데, 장난감과 과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한번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나도 하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언제였나?’, ‘혹시 하나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나일 강에만 시선을 뺏기고 있지는 않았는가?’, 

제가 자랄 때, 저의 집에서는 늘 개를 키웠습니다. 주로 잡종 개(일명 똥개)를 키웠습니다. 한번 셰퍼드를 키웠는데, 제가 학교에 갔다 오는 길이면 반갑다고 큰 놈이 앞발을 들어서 제 교복을 콱 찍습니다. 그러면 옷이 더러워집니다. 또 개를 훈련시킨다고 가끔 끌고 나갑니다. 내가 개를 끌고 있는 이상, 누구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는 교회 사택이 개를 키울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못 키웠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을 합니다. 사택이 아파트니까 사택에서 개를 키울 수는 없고, 저 교회 주방 뒤 편 쯤에 개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표정들이 왜 그러세요? ... 저의 집에서 개는 항상 주인이 식사를 다 하고, 그 잔밥을 섞어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배고픈 상태에서 있다가 개 밥그릇에 밥을 주려고 가면 꼬리를 치면서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온 식구들이 저녁에 나가서 외식을 했습니다. 개가 굶주렸습니다. 식구들이 집으로 가는데, 벌써 멀리서 발자국 소리로 주인임을 알아차리고는 반갑게 짖는 것입니다. 주인을 애타게 기다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충성스러운 개가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러한 반응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뭐보다 못합니까? (개보다 못한 신앙... )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없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유다를 향한 아버지의 아픈 심정입니다. 오늘도 내가 하나님께 대해 갈급하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아버지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나 때문에 탄식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허무해집니다. 애굽의 바로와 그 신하들,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일 강 때문에 부족함이 없으니 찾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나일 강이 저주가 된 것입니다. 

바닷가 해변에 모래성을 아무리 잘 지어도 그 모래성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나일 강의 풍성함은 쉽게 허물어지고 사라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육신의 풍부함, 분주함, 누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안 찾는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부족하고 없는 게 낫습니다. 

(신11:10~12)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 

무슨 말씀입니까? 애굽 땅은 나일 강이 있어서 밭에 물대기가 쉬웠지만, 가나안 땅은 척박하기에 채워주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 한눈 팔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신앙생활에서의 문제는 나의 삶에 현재 얼마나 큰 나일 강이 흐르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만 잘 섬기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93장, “오 신실 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 같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내 필요)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 하신 주, 나의 구주”, 

여러분,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십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셔서 행복하고 풍성한 인생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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