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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들의 재회 (창 43: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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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재회 (창 43:16-34)

애굽에 도착한 그들은, 가져간 선물을 요셉에게 바쳤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자기 집으로 그들을 초대하자, 무슨 일인지 몰라서 두려워하고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드디어 친동생 베냐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 요셉의 초대와 형들의 두려움 

① 요셉이 형들을 자기 집으로 모시다. 

ㄱ. 요셉은 종에게 형들을 자기 집으로 모시라고 일러두었다(16). 

ㄴ. 종은, 요셉의 지시대로, 가축을 잡아 점심을 준비했다(17). 

② 형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서 두려워하고 걱정하다. 

ㄱ. 요셉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자, 형들은 두려워했다(18). 

ㄴ. 형들은 자루 속에 있던 돈 때문인 줄로 알고 걱정했다(18). 

③ 자루 속에 있던 돈 때문인 줄로 알고, 형들이 이를 해명하다. 

ㄱ. 그들은 요셉의 종에게, 곡식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었다는 것과, 그 돈을 도루 다시 가져왔노라고 말했다(21). 

ㄴ. 형들은 걱정이 되어서, "돈을 누가 집어넣었는지 혹시 아느냐?"고, 종에게 애원하다시피 물어보았다(22). 

ㄷ. 종은 형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자루 속에 돈을 넣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23). 


2. 친동생 베냐민과의 만남 

① 형들이 요셉을 만나자, 거듭 무릎 꿇고 절하다. 

ㄱ. 형들은 요셉에게 선물을 내놓으며 엎드려 절을 했다(26). 

ㄴ. 요셉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자, "부친은 생존해 계시고 몸도 건강하다"고 하 면서, 형들은 다시금 무릎 꿇고 절했다(28). 

② 요셉이 형들과 음식을 나눌 때, 친동생 베냐민을 만나다. 

ㄱ. 요셉이 자기 동생을 보자, 북받쳐 오르는 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 방에 가서 한참 울었다(30). 

ㄴ. 요셉이 형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게 하자, 형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33) 

ㄷ. 요셉은 형들과 음식을 나누면서,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더 많이 주었다(34) 


피해의식과 불안, 그 신앙적 의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일에 부딪쳤을 때, 좋은 쪽으로 보다 나쁜 쪽으로 최악의 상태를 가상하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피해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아무 일도 없고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에는 좋아하면서도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공연히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자기들의 동생 요셉인줄은 모르고 있었지만,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 때문에, 자신들이 요셉을 팔아먹고 죽었다고 하여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슬퍼하였던 사실을 생각하며 죄책감이 살아났을 것입니다. 

이미 자기들 중에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있고, 또 다시 양식이 떨어져서 야곱을 간신히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데려오게 하고 식사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곡식 사 가지고 올 때 곡식 자루에 돈이 들어있었던 일도 우리를 억류하고 노예를 삼으려 함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약대까지 빼앗을 거라는 가상까지 하니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이 당도하기 전에, 청지기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장황히 변명했더니, 청지기가 말하기를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준 것이라"고 말하고 시므온도 풀어주고 그들과 함께 발을 씻게 했습니다. 요셉이 당도하여 함께 식사를 하는데, 좌석을 연령순으로 배치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보고 격정을 참지 못해서 다른 곳으로 가 울고 들어옵니다. 많은 음식으로 형들에게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형들보다 5배나 주었으나 형들이 베냐민을 질투하지 아니하고 함께 즐거워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먼저 피해의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초대된 상황에서, "이것이 위장된 친절일 것이다. 이제 배반한 우리를 억류하고 노예로 삼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못 믿을 사람이다. 우리의 약대들도 다 빼앗기고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직접적으로는 일차 곡물 매입 시에 그들의 곡물자루에 들어 있던 돈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더 깊은 것은 20년 전 도단에서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노예상인에게 팔았던 죄책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 일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혹시 저 인간이 나를 해하지 않을까 하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많이 비난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이 나를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왜 인간관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악화되는지 아십니까?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을뿐더러 점심식사 대접을 잘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노예로 삼고 모든 소유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거리가 먼 피해망상입니까? 

워낙 신분차이가 크고 힘이 없어서 어떤 방어행동을 못했지만, 조금만 힘이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는지 모릅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하여 과대한 방어 심리가 또 다시 공격적으로 되어서 사태를 점점 더 악화시키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왜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이 약합니까? 자기가 지은 죄책감이 피해의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리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신다 해도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하여 자신이 없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분,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일이 있는지 살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심으로 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마음의 죄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항복하면, 그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무고히 의심하지 않고, 피해의식이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불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 전에 요셉이 "너희 아버지가 안녕하시냐?" 물었을 때 그들은 요셉을 주라고 호칭하여 자신들을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절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여서 최대의 존칭을 쓰고 절했던 것입니다. 

또 잔치자리를 연령별로 배석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식탁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는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직접 누구를 해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아담으로부터 유전하고 있는 원죄로 인하여, 인간 존재 자체가 불안합니다. 세상은 빨리 나가는데 나는 낙오되는 것이 아닐까?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 혹시 암이 발생할는지도 모른다. 어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해도 자기자신의 한계와 무력감에서부터 오는 불안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약함을 인하여 불안을 느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행 1:8).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권능을 얻어서 약한 자가 변하여 강한 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권능을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안은 약자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마다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불안에 떠는 자마다 성령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 많고 어려운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이 동생 베냐민에게 다른 이들 보다 음식을 5배나 더 준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단지 동생을 만난 기쁨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일찍이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여 그 질투심으로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시험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음식을 5배나 주고 형들의 반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전혀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어라". 

요셉은 형들이 아버지와 동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대우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심으로 믿음의 형제들의 사이가 어떻게 되는지 보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요셉이 베푼 식탁은 풍성했습니다. 

흉년으로 고통당하던 그들에게 애굽의 산해진미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베냐민에게 5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 형들은 전혀 베냐민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음식이란 많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유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다고 사람이 그것을 다 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많다고 그것을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먹을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되고,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물질을 주께서 내게 주신다면 다른 사람 많은 것 가지고 부러워 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먹고 입고 쓰는 비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많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질투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형들은 동생 베냐민을 질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늙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동생이 죽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좋은 점도 있으나 부자라고 그 돈을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돈 때문에 불행이 올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5배나 많은 음식을 동생이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 먹으면 배탈이 날것입니다. 

일산에 동화를 쓰는 한 여류작가가 있습니다. 남편이 건축설계사이기 때문에 남들 사는 것만큼은 살아가고 있으나,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보람을 느낄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한 선배로부터 어린이들의 문화공간으로서 책 빌려주는 집을 운영해 보라고 하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잘 아는 선배의 충고를 따라서 남편에게 설계를 부탁하고 시작한 집이 "웃는 책"이라는 집입니다. 한 달에 회비 5000원을 내면 원하는 대로 책을 빌려주는 이 집은 일산지역 어린이들의 종합 문화공간이 되었습니다. 돈은 별로 많이 벌지 못해도 그 공간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 보람있고 행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하셨을 때 솔로몬은 부자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자기 맡은 일을 잘하고 그 역할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니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결과적으로 구하지 아니하는 부귀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회개하고 성령 충만 받으면 피해의식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이 5배를 가졌던지 50배 500배를 가졌던지 시비하지 말고, 내가 맡은 일을 하고, 내가 필요한 만큼의 분량을 주께 구하고 살다 가십시다. 하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물질문제로 싸우거나 넘어지지 않고 더욱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몫의 일에 충실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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