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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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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5-6)
    
성경일독의 순서를 따라 이번 주간 잠언을 읽는 중입니다.  잠언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잠언, 전도서를 읽으며 믿음의 선배요 지혜의 사람이었던 분들의 인생고백과 신앙고백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이 우리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되고 우리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잠언에는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아버지의 훈계, 도리, 명령 등과 같은 용어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잠4:1-4) 하였습니다.  

교우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목사의 바램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믿음이 무르익어가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성장하여 건강한 믿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어찌하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며 때로는 책망을 듣기도 하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 한 권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는 잠언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걷는 인생걸음을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잠언에 나오는 금언들 중에 오늘 읽은‘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구절은 귀에 익숙한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지도하십니다. 아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잠16:9). 

도를 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드라마에서는 그런 장면이 자주 등장하던데 영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없습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진리를 뜻하는 도(道)라는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길‘道’자를 액자나 도복에 새겨둔 것을 흔히 봅니다.  태권도, 검도, 유도 등 무술의 세계에도 나름 터득해 나가야 할 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짐승은 짐승으로서 사는 방식이 있고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도리가 있습니다.  숲속의 동물들도 길이 있다고 무작정 들어서지 않고 제 살길을 찾아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이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이 무작정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주의깊게 살핀 후에야 목표를 향한 바른 길로 들어섭니다.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사는 방법이며 사람의 도리 혹은 인생의 길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길을 나열해 볼까요?  출근길, 퇴근길, 밥먹으러 가던 길, 친구 만나러 가는 길,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여행길을 떠나며, 큰 뜻을 품고 유학길을 떠나고 고향길과 귀국길에 오르기도 합니다.  고생길에 접어들고 성공가도를 달리며 망명길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길은 이처럼 방향성, 목표지점을 내포합니다.  퇴근길은 회사에서 집을 향한 이동이고, 고향길은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집을 향한 발걸음입니다.  생명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사망길은 사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향하고 있습니까?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많이 있으니 고속도로를 타든 지방도로를 타든 지름길로 가든 멀리 돌아가든 서울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됩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목적만 선하면 방법은 문제가 안되고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시작해도 문제 없고 올라가는 길이 각각 다르지만 결국에는 모든 길이 정상을 향해 있다.   어떤 종교든지 나름 진리가 있고 그 가르침의 길을 따르다 보면 결국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니 진리는 하나로 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하며 존중하자는 말은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한 자리에 앉아 평화를 논의하고 더 좋은 세상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서로 공감하는 공동선이 있고 일반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하고 도덕적인 인간, 사회정의와 세상의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 등은 모든 종교와 철학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르침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인도하는 진리이고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다른 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나홀로 진리를 주장하는 배타적인 자세를 고집하는가?  묻는다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고상하고 선한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생의 근본 문제요 해결되어야만 하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얻는 길이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람이 도덕적인 삶을 부지런히 살고 죄짓는 자리를 멀리하며 선한 행위를 많이 쌓은 공력의 댓가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와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도리에 나의 인생을 걸고 영원한 삶을 맡길 수 없어 동의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도덕종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최고선에 이르고 신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학문적, 육체적, 정신적인 고도의 수련과 수행이 따릅니다.  이런 가르침의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기대와 희망과 신뢰가 깔려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에 희망을 걸고 인간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구원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죄 아래 있어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외침으로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의롭고 선하지 못함을 선언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죄로부터 구별되어 사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죄인으로 판명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하셨다는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롬3:20).  

그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자력구원이라 하고, 그 구원이 밖으로부터 사람 속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타력구원이라 합니다.   다른 도덕종교들과 기독교의 도가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력구원은 인간 자신에게 믿음과 기대를 두지만 기독교의 구원관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 의지적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미워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목사와 장로, 고도의 학문과 수행과정을 통과하여 불교계의 지도자 자리에 앉은 분들이 한심한 시정잡배들처럼 성적인 타락과 공금횡령에 뇌물수수 그리고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연일 뉴스거리로 폭로되고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괜찮다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왜 이처럼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용감하게 못된 짓을 할까요?  양심이 불로 지져진 것처럼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는데 사람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 다된줄 알고 방심하다가 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명철을 더 의지하는 목사와 장로, 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그대신 자신의 수행과 공력을 의지하는 인간적인 교만으로 가득한 스님과 불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약한 우리 인생을 향해 오늘 말씀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너의 길을 하나님께서 지도하시리라’교훈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길을 바르게 인도하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가 무엇입니까?   이웃에게 도를 전하는 것이니 그 도는 그리스도의 도, 다시 말해 그분의 가르침과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다른 말로 복음이며 다른 종교나 철학의 길과 다른 점입니다.   이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길을 보여주며 따라오라 명하십니다.  어느 길로 걸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경에는 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다윗의 길, 여로보암의 길, 좁은 길, 넓은 길, 시온의 대로…,  잠언에 반복되어 나오는 길들을 봅니다.  공평의 길, 성도들의 길,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 악한 자의 길, 어두운 길, 사망으로 기울어진 길, 생명길, 선한 자의 길, 의인의 길, 즐거운 길,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 사특한 자의 첩경,  생명의 평탄한 길… 등 이 모든 길을 사람의 길이라 부르며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잠5:21)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종류의  생명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던 예수님께 촛점이 모아집니다.   주님만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엑소더스(Exodus)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엑소더스를 출구(Exit)라는 말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에 가면 고속도로에서 나가는 도로 표지판이나 건물 출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 엑소더스라는 책 이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이 ‘출애굽기’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밖으로’,‘나온다’,‘떠난다’는 뜻의 헬라어 전치사 ‘에크’와 길이라는 단어 ‘호도스’가 결합하여 ‘에크호도스’ 즉‘엑소도스’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제목은 출애굽기의 중심내용(출19:1)을 근거로 이름한 것이며 그 뜻은 ‘나감’, ‘출발’, ‘탈출’입니다.  그리고 70인역의 명칭은 이후 라틴 벌게이트와 영어성경에서도 그대로 채용하여 ‘엑소더스’(Exodus)로 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보다 의역하여 애굽을 떠난 이야기라는 뜻으로 출애굽기라 했습니다. <호크마 종합주석 출애굽기 서론 참고>

엑소도스는 이처럼 길과 연관이 있는 이름입니다.  출애굽은 길을 떠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400여 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그곳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이며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선민의 탄생이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출애굽과 관련한 유월절, 홍해를 건넘과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과 성막 그리고 반석의 생수 사건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사건들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어 가나안을 향한 길을 떠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셨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혈통으로 난 유대인들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구원 사역의 모형이며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로 향한 길에 접어들었을 때 구름과 불기둥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과 불기둥은 그들이 광야여행을 마치는 날까지 40년간 그들의 여행길에 함께 하며 길을 밝히고 안내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었으며 그 어떤 네비게이션보다 완벽하게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지난 번 휴가 때 프랑스의 몽셀미셀을 자동차로 왕복하였는데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잘해줘서 길 찾는 수고를 덜어 여행을 수월하게 다녀왔습니다.   정보 입력이 잘못된 어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먼길을 돌게 하고 꼬불거리는 작은길로 안내하여 운전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을 안내한 불과 구름기둥은 그렇게 엉터리 네비게이션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쉽고 편안한 길로 안내하지 않는다 여겨 불평할 때도 있었지만 40년 여행 길에 한 번도 오작동을 한 적이 없는 정확한 길 안내자였습니다.  

초행길을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가면 시간은 걸릴지라도 제대로 가지만 지시를 무시하고 내 판단으로 가면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네비게이션이 귀가 따갑게 ‘turn around if possible!’을 반복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돌아서라 명령하면 그대로 따라야 안전한데 어기고 내 고집으로 운전하면 고생길이 열립니다.   자동차에 이렇게 성능 좋은 네비게이션을 장착하고 길을 떠나는데 여러분의 인생길을 바르게 안내하는 네비게이션도 잘 활용하고 있습니까?   

지금 걷고 있는 인생길에 하나님 말씀이라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능숙합니까?   너무 잘 아는 길이라 경험을 따라 나 혼자 자신 있게 갈 수 있는 길일까요?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길을 걷는 나그네들입니다.  이런 나그네들에게 구름과 불기둥 같은 주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과 내 길에 빛이라(시119:105) 하였습니다.   우리는 밤길을 걷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것도 별빛과 달빛도 없이 온통 깜깜한 밤길을 걷습니다.   지혜로운 선인들과 어른들의 조언이라는 작은 빛을 의지하여 더듬거리고 걷고 있지만 그 어떤 빛보다 밝고 영원한 빛을 우리에게 주시고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등불의 전원을 켜고 앞을 비추며 네비게이션을 켜고 안내를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라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4:14, 15)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서는 안 되는 길, 피하고 돌아가야 할 길을 예고하시고 선하고 정직한 길을 걷도록 지도하십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의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 19)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을 들었던 아들들이 이 말씀을 따라 살았다면 모두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은 이 가르침을 거절하고 결국 사망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신하들이 충심으로 조언한 것은 거절하고 젊은 신하들의 악한 부추김을 선택하여 결국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조상 다윗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던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합시다.    주의 말씀을 항상 곁에 두고 읽고 들으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말씀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서라는 곳에 멈추는 말씀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안전한 길, 의로운 길, 생명의 길로 이끄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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