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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세상 만들기(6) : 사랑이 풍성한 세상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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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 만들기(6) : 사랑이 풍성한 세상 (막 12:28-34)

지난 주 제자 훈련반 숙제로 “사랑의 문자 보내기”를 내 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사랑하는 부부와 식구들에게 사랑의 문제를 보내라는 숙제였습니다. 이런 숙제를 내 주면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문자로 사랑의 고백을 하려고 하면 뭔가 쑥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60대 집사님께서 스마트폰을 사서 첫 문자를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방법을 몰랐답니다. 그래서 딸에게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워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했답니다. 먼저 목사님이 스마트폰을 사신 줄 알고 문자가 왔답니다. “스마트폰 구입을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주말 잘 보내세요.”라는 문자였답니다. 문자를 받고 집사님이 먼저 목사님에게 답신을 했답니다. '목사니도 주말 잘 보내세요' 서툴러‘님’을 ‘니’로 친 것입니다.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신이 나서 남편에게 ‘여보, 사랑해.’라는 짤막한 문자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답니다. “여보! 이게 뭐야?” 남편의 스마트폰에는 “여보 사랑해”를 잘 못 눌러 “여보 사망해”라고 찍혔답니다. 

어느 날 힘들고 고달픈데 아내에게 “힘내세요.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가 오면 어떻습니까? 힘이 날 것입니다. 살맛이 날 것입니다. 사랑은 그 무엇으로 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힘이 있습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연구팀에서 기혼남녀 만 명에게 "아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합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하여 건강의 척도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진 결과, '예'라고 답한 사람들은 협심증 발병 위험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정도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 예배드리는 아내들도 일찍 홀로 되지 않으려면 하루에 한 번쯤 남편에게 사랑의 문자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사랑의 표현이나 느낌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심장 전문의인 딘 오니시의 연구에 따르면 질병에 걸린 환자들 중 친한 친구들이 있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외로움과 고독감이 그 어떤 질병보다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건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건강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미래와 삶의 질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프로이트는 본능적 열정은 이성적 이익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인류의 문제는 문명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 즉 상호 공격적인 성향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이 공격 본능을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억지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생을 인간과 사건에 관해 연구한 월 듀란트는 "이 천년 동안의 역사가 지니는 교훈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서로 사랑하십시오. 역사에 관한 나의 최종적인 교훈은 예수의 교훈과 같습니다. 당신네들은 이 말을 막대에 달린 사탕 정도로 여기시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을 보존케 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의 본능이 생물계를 보존케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새끼를 사랑하는 어미 펭귄은 죽어가면서까지 새끼에게 먹이를 줍니다. 동물에게 이런 사랑의 본능이 없다면 종족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댕은 "사랑의 힘은 기적을 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죽음도, 원수도, 욕심도, 경쟁심도, 이기심도, 증오도, 가난도 수치도, 창피함도, 수모도 그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버립니다. 소포클레스는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체홉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세상이 좋아집니다. 

제가 4가지 질문은 던질 테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이 질문을 통해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진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① 진정으로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②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③ 기꺼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까? 
 ④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없다'이면 조기사망의 위험이 다섯 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좋은 세상은 사랑이 풍성한 세상입니다. 사랑의 홍수는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장을 통해 사랑이 풍성한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 중에는 적극적인 명령 248개와 소극적인 명령 365개 총 613개가 있었는데 당시 율법 중에 어떤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첫 계명을 제물과 희생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에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는 적절하고 온전한 제물에 달려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 나와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0절 이하를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고 최고의 계명입니다.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통치 이념이 되어야 하고 시공간을 초월한 지배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강력한 힘이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오늘은 좋은 세상 만들기 여섯 번째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에 대하여 본문을 통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고 있는 자신을 사랑함으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신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 중에 먼저 생각해 볼 말씀이 31절의 자신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은 수록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자기 사랑은 이기심과 탐욕에 근거한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자기 사랑입니다. 

네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성숙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근거한 사랑이 아닙니다(딤후3:2). 지극한 이기심에 근거하여 하나님도 몰라보고 이웃도 몰라보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진정한 자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멸시하고 미워합니다. 유연성이 결여되고 고정화된 관계 밖에 형성하지 못하고 친밀한 대인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늘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없습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 내가 나인 기쁨, 내가 나를 기뻐할 내적 이유, 내가 나여서 매우 행복하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나 자기도취와는 반대입니다. 이기심은 자기 사랑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고 자기도취는 자기 사랑의 결여에 대한 하나의 과잉보상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나 사랑스러움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면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허풍이나 과장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자기의 가치를 높아진 것처럼 보이게 할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까지 과장하여 믿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매사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어 꼬집어 남을 비판함으로써 회피하려고 합니다. 자기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가치감도 느낄 수 없으며 유일하게 자기 가치감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일을 해결하는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일을 실수했을 경우 즉각 변명과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해 버립니다. 늘 완벽성을 추구하고 자신을 사랑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소극적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을 평가 절하해 버립니다. 외톨이가 되고 의심을 잘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됩니다. 2살 이전까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런 형상이 나타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풍성한 사랑을 받으면 사랑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습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습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었습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습니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습니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사랑을 풍성이 받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랑만 풍성이 받아도 세상은 달라집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랑에 굶주린 시대입니다. 무한한 사랑의 샘물인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 굶주려 메마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었을 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 사실을 믿습니까? 사랑들은 좋은 사람,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롬5:8).

세상 모두가 우리를 떠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배려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의 비밀을 다 들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잊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우리가 병들고, 힘없고, 무능해 진다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요람에서 무덤까지(사46:3-4) 사랑하십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 46:4)"

스바냐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9)"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부정적인 자아 정체감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다 나를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x2)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한 번 따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너무 너무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성도님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세밀하게 알고 계시며 풍성한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예레미야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긍휼에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는 이미 "보배를 품은 질그릇(고후 4:7)",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 "하나님의 자녀(롬 8:16)"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고 있는 자신을 사랑함으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2.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분이 누구입니까? 나 사랑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명 중에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나 이웃 사랑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존재와 인격의 중심입니다. 뜻과 힘이 발생하는 근원입니다. 목숨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 생명력입니다. 뜻은 인간 지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기질과 마음가짐의 중심입니다. 힘은 영적 육체적 활동력 모두를 포함한 전인적인 역량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스텐버그(Sternberg)는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친밀감, 열정, 결심과 헌신입니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하여 좋아함(친밀감만 있는 사람), 낭만적 사랑(친밀감과 열정), 도취성 사랑(열정만 있는 사랑), 얼빠진 사랑(열정과 헌신), 공허한 사랑(결심 헌신만 있는 사랑), 우애적 사랑(친밀감과 헌신), 성숙한 사랑(친밀감과 열정 헌신) 등 8가지로 구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친밀감과 열정,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세상이 사랑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다윗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힘들고 어렵습니까? 삶의 힘을 잃었습니까? 고독합니까?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까? 사랑할 대상이 없어 방황하고 외롭습니까?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지치고 힘들 때 "제가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면 눈물이 나오고 새 힘이 솟아날 것입니다. 설거지 하면서도 사업하면서도, 예배드리면서도, 직장 생활하면서도 자녀를 교육시키면서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삶의 동기는 여호와를 사랑하는데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지은 시편을 보면 얼마나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였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른 것 주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것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사랑과 자신의 삶이 분리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을 때도,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녔을 때도, 왕이 되었을 때도, 자식에게 반역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과는 상관없지 자기 마음대로 처신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조롱받는 모습을 보고도 침묵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상대는 장군이고 키가 장대처럼 크지만 조그마한 돌을 가지고 나가 싸워 이깁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일 기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므이가 욕하며 저주합니다. 다윗을 따르는 아비새라는 신하가 시므이를 요절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가만 두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가 내게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고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부당한 방법으로 복수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한 근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강력한 힘이 나옵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고,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첫 번째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 첫 번째 회복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세 번이나 이것을 물어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을 맡깁니다. 모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할 때도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네가 100살에 낳은 아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 시간 함께 고백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 하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세상은 사랑이 풍성한 세상이 됩니다. 나 사랑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세상을 사랑으로 풍성해 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므로 사랑이 풍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서기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31절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 4:20)"라고 말씀합니다. 

믿습니까? 사랑의 종착역은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가난하고 힘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이런 것들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마 25:40). 미워하는 자, 원수까지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웃이 원수가 아닙니다. 제거해야 할 경쟁자가 아닙니다. 옆에 계시는 우리 성도님이 경쟁자로 보이십니까? 우리가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증명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고백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형제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고 실제적으로 사랑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좋은 가정이 되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이 풍성이 넘쳐야 합니다. 교인들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관심을 받고 싶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경받고 싶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 대하여도 책임감을 갖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해,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회학자 리(Lee)는 광범위한 면접조사와 문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사랑에 대한 개념을 여섯 가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삼원색에 해당하는 사랑의 기본색 세 가지와 이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를 합하여 여섯 가지 방식의 사랑의 유형을 제시하였습니다. 

우선 사랑의 기본색 세 가지는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루두스(Ludus)입니다. 
에로스는 첫눈에 반한 것과 같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스토르게는 형제 자매간이나 놀이 친구 사이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입니다. 루두스는 사랑의 대상과 지속적인 관계나 헌신을 거부하는 유희적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가 조합하여 매니아(Mania), 프래그마(Pragma), 아가페(Agape)가 나온다고 합니다. 에로스와 루두스가 혼합하게 되면 매니아가 된다고 합니다. 중독된 사랑입니다. 

루두스아 스토르게가 혼합되면 프래그마가 나온다고 합니다. 논리적이고 분별력 있고 실용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혼합된 형태가 아가페라고 말합니다. 주기만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조건없이 상대를 좋아하고 돌보아 주며 용서하고 베풀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수준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웃을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관심의 단계에 머물지 말고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람, 내 욕을 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정말로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에 와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같이 열심히 봉사하며 신앙 생활했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화장실에 가 용변을 보는데 성가대원들이 화장실에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 분이 화장실에 들어와 열심히 자신의 흉을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후 같이 성가대에서 봉사하던 자매가 원수로 변한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고 참을 수 없고 얼굴 보기가 싫은 것입니다. 제가 찾아갔지만 문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극복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사랑으로 극복하면 인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신앙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사람이 사랑 받을 때와 사랑할 때 어느 때 더 행복하겠습니까? 어느 때 더 사랑의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살겠습니까?

앨런 룩스('Healing Power of Doing Good'의 저자)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이 사랑으로 봉사할 때 봉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희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험해 보니까 봉사자의 90%이상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Helper's High(봉사자들의 희열감)를 경험했고, 봉사 후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통증과 불편함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는 것보다 웃어주고 포옹하고 악수하며 사랑으로 친밀한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훨씬 건강에 이롭다는 것입니다.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는 현대인이 건강을 위하여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때도 강력한 힘이 나타나지만 사랑을 하면은 더욱 강력한 힘과 활력이 나타납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 보십시오. 세상이 달라집니다.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당시 열심히 주방 봉사하시던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이면 교회에 나와 혼자 청소를 다 했습니다. 참 봉사정신이 좋아 주중에도 복지원에 나가 봉사하고 교회에 나와 주방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느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손자 며느리가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한 것을 목사님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 건축이 부담이 되어 교회를 떠날 생각인데 제가 가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교회 건축할 때, 자신에게 부담이 될 것같으면 목회자가 심방 오는 것도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봉사 정신이 강한 집사님께서 볼 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저에게 심방을 가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서 위로해 주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심방 왔다는 사실을 손자며느리가 안 것입니다. 그 손자며느리가 “왜 목사님에게 알려 심방 오게 했느냐고 한 바탕 한 것입니다.” 제가 집사님께 심방 간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 다 그 일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웃 사랑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도태되고, 경쟁에서 지면 직장을 잃고, 패배자가 되면 철저히 외면되는 세계에서 이웃을 사랑하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글의 법칙 즉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시계제로의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장과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시장적응을 해야만 살아남습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 시장에서 세계 최강자였던 록키아가 무너졌습니다. 

세계 전자시장을 석권했던 소니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강한 기업과 세계일류 기업, 위기관리를 잘하는 기업, 상품과 서비스를 팔아 수익을 내는 기업, 먹이사슬과 같은 유통사슬에서 이익과 가치를 확대 생산하는 기업, 자연도태 되지 않는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살아남는 세상입니다. 이 기업의 원리, 경영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60,70년대는 군사 문화가 사회 각 분야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문화가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병원도 학교도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기업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강자만이 살아 남는 기업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성을 최대한 개발해야 한다고 세상을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하든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공격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두려움(불안)과 공격성(분노)은 인간 행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공격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며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스 롯터는 "순수한 의미의 몰아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장 마리 펠트(Jean-Marie Pelt)는 그의 책 [정글의 법칙 – 식물· 동물· 인간의 숨겨진 공격 본능]에서 바닷속 물고기와 새,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은 물론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작은 식물들까지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만 적용되는 인간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합니까? 경쟁자를 사랑합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독하는 사람, 침뱉는 사람,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사람, 죄를 짓고 십자가에 달려있으면서도 조롱하는 사람 끝까지 사랑했듯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생물의 세계에 꼭 정글의 법칙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글의 법칙만 인간 세계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류는 결국 공멸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공격 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본능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관심을 가는 것이며, 존경하고, 이해하며, 책임을 지고,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증오하지 않는 것이며,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그의 상처와 어둠과 가난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4월 21일 자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장애인 복지시설 '남사랑의 집'에서 뇌병변 1급 장애인 이종국씨와 엄신화씨 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내가 다섯 살 연상입니다. 남편인 이종국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을 잇달아 여의고, 장애인 시설에서 홀로 자라 온 뇌병변 1급 장애인이랍니다. 뇌 또는 뇌로 이어진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겨 팔· 다리 등이 마비되는 장애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심각한 뇌병변 1급 중증장애인이었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이를 악물고 재활치료를 받은 끝에 걷고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후 천안 나사렛대학교 인간재활학과에 들어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고, 사회복지사 1급, 직업재활사 1급 등 자격증도 땄답니다. 아내인 엄신화 전도사는 전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강원도 철원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하다 이분을 만났답니다. 그리고 사랑하여 결혼을 하게되었고 둘이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말합니다. "아내는 하늘이 제게 내려준 선물입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남편이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든든합니다." 이들 부부의 꿈은 "우리보다 힘든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사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세상은 좋아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은 말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옳다는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34절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멀리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자기 사랑,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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