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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요 2:2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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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요 2:23-3:15)
   
여러분의 영성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습니까? 우리의 영성의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이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기독교 영성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성형성이란 말을 잘 알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Spiritual formation 영성형성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빚어지고 세워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성형성을 위한 거룩한 독서’라는 책을 쓰신 로버트 멀홀랜드는 “영성형성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평생의 과정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그냥 이루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깊어지고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야 합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다듬어지고 자라나고 깊어지는 과정과 이것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방법과 훈련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엡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벧후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여 우리의 영적인 수준과 성품과 인격이 자라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어려운 문제는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내가 갈망하는 것 중에 가장 갈망하는 것 하나를 말해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갈망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인데, 육신을 위한 양식이 풍족한 것으로 다 해결된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으로 목말라하는 자기의 영혼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배고픔과 갈증은 다릅니다. 우리 영혼도 육신처럼 배고파하고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음식물이나 세상의 화려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갈급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생명수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영혼의 갈증을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수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여야겠습니다. 

시42:1-2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의 영혼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영성사’를 쓰신 독일 아우구스부르크대학 교수인 브레들리 홀트박사는 영성형성은 세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영성형성이란 존재(Being)에 있다고 합니다. 영성형성이란 무엇을 성취하거나 무엇을 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정한 나라는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모릅니다. 사회에서 만들어진 나,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 나, 그럴듯하게 포장된 나,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나, 그러면 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아니 옳습니다. 진정한 나, 참된 나를 찾아야 합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참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성형성이란 관계(Relationships)를 이루는 것입니다. 참된 나를 찾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 조화를 이루고 받아들임과 보살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려면 우리의 내면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나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면 나 자신과의 관계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나아가 피조물과의 관계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나아지고 이웃과의 관계는 파괴되었다고 하면 절름발이의 신앙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영성형성에는 훈련(Doing)에 있습니다. 묵상과 훈련의 시간이 주어져야 영성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영적 관계를 성숙하게 증진시키기 위하여 시간이 들어가고 훈련이 있어야 하고, 자아성찰의 묵상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영성형성은 기나긴 시간, 우리의 일생에 걸쳐 계속되어야 하고, 어느 한 순간이라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성형성에 아주 좋은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7:28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새번역) 라고 했습니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호흡과 함께 숨 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거듭났다고 하면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거듭난 삶을 살아가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유월절을 세 번 지킨 것으로 보아 공생애를 3년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각생 병든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 주님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유대교권자들도 지켜보았습니다. 

요2: 23절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은 그 이름을 믿는 신앙과 그를 믿는 신앙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믿는데서 그를 믿어 구원받아야 합니다. 

다음 24-25절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유대인들의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믿는 정도요, 다만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그의 몸을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의탁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은 앞 절에 믿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피스튜오”라는 말이 기본단어입니다. 

믿는다는 말과 의탁하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믿음이란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유해야 하고, 몸을 맡길 수 있어야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 거듭난 성도들의 영성이 바로 예수님을 소유하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몸을 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에게 온전한 위탁이 이루어질 때가 그는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온전히 주님에게 맡기는 인격적인 위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온전히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의 대화가 11번 나오는데, 그 중의 첫 번째가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 사용된 말은 단순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심오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요7:50에 보면 산헤드린 국회의 의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례하기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은 100리트라쯤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니코데모스’라고 하여 백성의 승리자,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 되었는데, 그는 산혜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의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메시아 왕국이라는 국민적인 소망에 살고 있었고, 사색적인 사람이요,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와서 그동안 예수님을 지켜보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대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귀중한 신분을 가진 유대의 관원이 아직도 청년에 불과한 예수님에게 ‘랍비 ’곧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하면서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말에, 아직은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말도 아니고, 참선지자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세례요한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요, 자기가 지켜본 대로 예수님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면서 능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와서 동문서답 같이 던진 말에는 당신이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인 것은 분명한데, 유대인이 고대하는 메시아이시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오신 메시아라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이 땅에 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당신이 메시아시냐, 메시아라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느냐 하는 중대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니고데모가 말하는 예수는 누구시냐 하는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 사상을 바로 잡아주시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공간적으로는 위로부터, 시간적으로는 다시, 즉 새롭게 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었고, 당대에 메시아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진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 나야 한다,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말을 잘 몰랐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사역을 잘 몰랐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땅 위에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거듭난다는 다시 난다, 위로부터 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나는 것만 알았지, 새 사람이 된다든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다는 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조소하는 말은 아니고 당황하여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과의 대화는 점점 더 깊어지고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어 구원받는 도리를 관용적인 말씀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데, 물로 나는 것이 무엇이고 성령으로 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성경의 마스터키인 십자가의 사건으로 열어야 합니다. 고대로부터 물은 세례로 이해하였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고 주님을 영접한다는 뜻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를 정의하는데 존 칼빈은“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다”고 했습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롬6:3-5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고전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면 주님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요,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는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담 하와로 인하여 태어나는 것은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이제 영으로 태어나야 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거듭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영적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 것을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후에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아보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요7장에 보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성전의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랫사람들을 나무랍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이 말은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하여 옹호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영적 성숙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동료 의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례지내겠다고 빌라도 총독에게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니고데모가 아리마대 요셉을 거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되는 이 마당에 얼굴을 드러내고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선포하는 것을 정치적인 생명이 끝나고 앞으로 큰 핍박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죽으시는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위하여 나서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19:39입니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리트라 쯤 가지고 와서 발라드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방부제로 옛날에 왕들이나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100근 쯤 가지고 온 것을 정성을 다한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와서 말씀을 들은 것이 차츰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성숙한 헌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밤중에 찾아올 정도로 소극적인 만남이었지만, 이제는 드러내놓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나섭니다. 

우리에게 거듭난 사람이냐고 물으면, 구원받은 확신이 있느냐는 말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들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의탁한다는 말이 같은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에게 의탁하고 위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머리나 감정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맡기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믿어보고 싶으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아직도 유대인이라는 굴레, 유대교라는 율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매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반신반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변호하더니 마침내 예수님을 위하여 명예도 지위도 내려놓고, 재물도 내려놓고, 나는 예수의 제자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점전적이지만, 분명한 제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공개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힘든 세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위하여 나설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C. T. 스투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를 위한 어떠한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으시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되었고, 우리가 보답하면서 살아갈 차례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조금은 더디고 느리다고 하여도 예수 중심, 성령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듭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신비로운 역사요, 성령으로 인치시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나 의지나 감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 나는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거듭난 사람으로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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