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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 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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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 1:20-21)


세계인이 주목하는 런던올림픽이 7/27일에 개막이 되지 않습니까?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전 세계 스포츠맨들의 한판 승부가 시작이 됩니다. 국가의 명예라는 자존심을 걸고 다양한 종목에서 초 고수들이 펼치는 정상급 경기는 16일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각 나라마다 선의의 경쟁이기는 하지만, 매달에 대한 관심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글로벌금융기업 골드만삭스가 오는 27일 개막하는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이 금메달 10개를 따 금메달 순위에서 8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12일 한국이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0개를 비롯해 총 31개의 메달을 수확해 이탈리아와 8~9위를 놓고 경쟁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200여 나라의 선수들이 그 분야에 최고를 가리는데 정말 최고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훈련과 끊임없는 도전을 합니다. 

선수들은 메달에 자신의 기대와 소망을 갖고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앞서 가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쟁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앞선 사람들 역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더 앞에 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이런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인데, 「워싱턴 포스트」지에 소개되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인데,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행복도 순서가 ?금-은-동?이 아니라 ?금-동-은?이라는 겁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금메달을 놓친 데 대해 아쉬워하면서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반면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그나마 메달을 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육상 1500m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아벨 키비아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우승후보였건만 마지막 몇m를 남겨놓고 추월당해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90살이 넘은 그는 지금도 한밤중에 깨어나 ?도대체 내가 그때 어떻게 해서 금메달을 놓쳤지??라며 자책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인생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조건 행복인가? 또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그런데 여기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경주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20절입니다.“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아멘. 이 고백을 하는 자리는 어느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한 죄수가 이제 앞으로 어떤 고난과 고통이 그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감옥 한복판에서 당당히 외치는 고백입니다. 지금 자기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와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하는 식의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뜬구름을 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가 고백한대로 ‘간절한 기대’입니다. ‘간절한 소망’입니다. ‘간절한 기대’란 헬라어로 ‘아포카라도키안’(?ποκαραδοκ?αν)인데, 이 말은 ‘분리’를 의미하는 ‘아포’(?πο)라는 전치사와 ‘머리’를 의미하는 ‘카라’(κ?ρα)와 ‘주시하다’라는 뜻의 ‘도케오’(δοκε?ω)라는 세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로 ‘목을 길게 빼고 계속해서 열심히 지켜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는 목표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이 ‘간절한 기대’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 있습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입니다. ‘학수고대’란 ‘학의 목처럼 길게 목을 늘여 빼고 몹시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소가 우리 넘어 펼쳐진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그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놀기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듯, 농부가 오랜 가뭄에 무심한 하늘을 쳐다보며 비 오기를 기다리 듯,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고백을 한 사람은 바로 바울입니다. 

여기 바울의 첫째 간절히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20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여기“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만이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 찬송을 부르면 바울의 그 심정을 우리가 알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있는지 우리 모두 한번 자신에게 물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소박한 꿈, 즉 '이것을 놓고 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금년을 우리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까? 내년을 또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 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목표가 흐릿하거나 목표가 있어도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을 일컬어서 어떤 사람은 '딸꾹질 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었든지 그 목표는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걸 만한 목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그 목표가 있느냐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그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생 목표를 바로 정하고 달려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그는 환호하듯이 외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바에는 우리가 그런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여러분, 바울의 형편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지금 수감되어 있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언제 풀려 나올 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지금 60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몸에는 여전히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다. 남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늘 어떤 통증을 달고 살고, 불편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가듯이 인생을 살겠다,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가볍게 들으면 안 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포기하고 그저 앉아 있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달리리라.' 하는 그 바울을 우리 마음에 한번 그려 봅시다. 그래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요사이처럼 볼펜이 있습니까? 종이가 제대로 있습니까? 그 어두침침한 감옥 속에서 시력도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마당에 글을 썼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리고는 시간만 나면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성도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가며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대인들을 앉혀 놓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감옥에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세상이 말립니까? 아니요, 절대 못 말립니다. 바울이 감옥에 앉아 있는데도 빌립보서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는 소리를 9번 이상이나 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서 솟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자신의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알고,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힘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시고 주님이 매일매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입고 나아갈 때 감옥이라는 환경도 바울을 꺾지 못했습니다. 나이도 꺾지 못했습니다. 그 몸에 있는 병도 꺾지 못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한 예감도 그를 기죽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힘이 솟았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고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이 솟았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은혜를 그가 맛보고 살았습니다. 바울을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네로가 이겼습니까? 로마 제국이 이겼습니까? 아무도 바울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합니다. 정부를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덩어리로 화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미칠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앞에는 무언가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없는 답답한 환경만이 놓여 있지만 그러나 감옥과 같은 이런 환경도 우리를 절대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우리 안에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인 삼성에 이건희 회장이 이런 제안을 하나 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싶은 사람은 신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벌하고 식사한번 할려고 해도 소화가 되겠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이 신청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100여명이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청한 한 사람이 이런 글을 썼는데 모든 임직원이 그 글을 보고 포복절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장님 죄송해요. 제가 선약이 있어서 참석을 못하겠습니다” 누가 만나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객기를 부리기에는 너무 무모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배꼽을 잡고 폭소가 터졌다고 합니다. 
- 그 당당함의 여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세상의 것을 한때 가졌던 그가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고통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진실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그 진실은 한 영혼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존재의 목적, 생존의 이유가 아직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 이제 소망 없이 사탄에 휘둘려 죽어가는 그 영혼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그것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도 한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얼마나 핍박을 했던 자입니까? 부흥하는 초대 교회에 찬물을 끼얹은 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파멸로 이끈 장본인입니다. 그런 자신을 다메섹 도상에서 도무지 자신이 생각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 없는 인생을 자녀로 삼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로 부르신 그 소명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이후 한눈 한번 안 팔고 자신의 삶에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세상과 충돌을 합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한 생명을 주께로 인도하는 데는 정말 목숨을 담보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역시 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자들이 아닙니까?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의 기대와 소망이 단지 내 행복, 내 안일에만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가정의 행복, 직장의 안정, 그리고 건강한 삶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면 생각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지금도 매일 80-100여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조용하게 트럭에 실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잡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보도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한달이면, 3000명이 1년이면 36000-40000명 정도가 북한에 끌려가 차마 눈을 뜨고는 볼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멀쩡한 우리 동포들이 굶주림을 피해 나왔다가 끌려 들어가 개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이런 아픔이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1000만이 넘고, 양심을 가진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크리스찬으로서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일할 시간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을 일으키며, 열정은 평생 사명을 달성하게 해줍니다. 사명자의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를 때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의 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맑은 날,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군데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태양 빛이라도 집중되지 않으면 종이를 태울 수 없습니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낀 사람은 시야가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이 분명한 안경을 끼면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탈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명은 해야 할 일들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몰랑 퀴볼러는 말했습니다. “길은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을 다 가보기에는 생이 너무 짧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각성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회개하고, 다시 감사하고, 다시 전도하고, 다시 봉사합시다. 다시 축복을 받읍시다. 그는 다시 새 인생을, 새 축복을,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꺾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힙니까? 목표와 방향만 분명하다면, 달려가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어디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고통이 있다 하더래도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합니다.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몸을 드려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손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연약한 이들과 아직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한 이들의 구원과 성숙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바울과 같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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