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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시련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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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 (약 1:2-4)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납니다. 여기 사용한 ‘시험’이라고 번역한 ‘페이라스모스’라는 헬라말은 시험, 유혹, 시련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세 번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전적으로 마귀가 가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피땀 어린 기도를 드리시는데 제자들은 육신이 곤해서 다 졸며 자다가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받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욕망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불신 세상이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가하는 시련도 있습니다. 일제(日帝)의 총독부가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 여기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시험을 당합니다. 불신 가족들이 가하는 핍박도 있고, 믿음 때문에 직장에서 받는 불이익도 일종의 시험이고 시련입니다.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정직하게 납세를 할 것인지, 편법을 쓸 것인지를 두고 시험을 당합니다. 그리고 요즘 성도들은 경제 문제로 시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그것을 좋아하고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우리가 환영하지 않더라도 다가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신 대로, 성도들에게 시험이 다가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이유로 시험이 다가오든지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한 단계 성숙하는 기회로 선용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만나면 당황해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는 시련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이는 시련을 불필요하고 우연한 일로 여기는 것으로 시련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이르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아 29장 11절에 이르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며 은혜롭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지라도 낙심치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루는 천상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섰는데 사단도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하시니, 사단이 대답하기를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단이 참소하기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욥은 무서운 시련을 만났습니다. 하루아침에 강도떼에게 그 많던 가축을 다 약탈당했고, 태풍에 집이 무너져서 그의 열 자녀가 몰사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비보를 들었을 때 일어나 머리털을 밀고 베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말하기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은 그가 당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욥은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련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단의 참소로 인해 욥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 몸에 악창이 발병하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피부가 코끼리 가죽처럼 부어오르고 딱딱하게 되었다가 터져서 진물이 났습니다. 얼마나 가렵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내마저 욥을 향하여 “당신이 그래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욥의 불행을 듣고 위문차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이 당한 재앙을 보고서는 이는 필시 욥에게 숨겨놓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나도 내가 무슨 까닭에 이같은 재앙을 당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시련을 당하는 욥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낀 것은 재앙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재앙이 자기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밝혀졌다면 그는 기꺼이 재앙을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변함없이 믿은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그는 시련 받는 원인을 알지 못했지만, 시련의 의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시련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단련하셔서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가리켜서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부여하신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며,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재물을 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르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출애굽 1세대에 속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지만,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이처럼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셔서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약한 믿음을 강하게,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바뀌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학기 내에 종종 시험을 보게 하는데, 그것은 시험을 통해서 학생 각 자가 자기의 평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선 시험 문제를 대하면 자기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한갓 가능성의 믿음이지, 검증 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 상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된 것이 아니라, 숱한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란에 살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천하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면 이제껏 그가 쌓은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에게 보통 큰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니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시험이 있었습니다. 최종적인 시험은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때에 겪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누굽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일 뿐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하늘에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같이 번성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제 그를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나귀에 싣고 불과 칼을 준비해서 이삭과 두 사환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모리아 산 아래에 이르러 두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는 이삭과 함께 산을 올라갔습니다.

도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다다른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쥐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니,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언뜻 생각만 해 보아도 그것이 보통 어려운 시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같은 시련을 허락하신 걸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케 만들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시려고 그 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시련을 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것을 정리해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며 탕진했습니다. 결국, 이 아들은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자,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 아들은 들판에서 돼지치기가 되었는데, 보수라는 것이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고,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이 끔찍한 고난을 통해서 이 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시편 119편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시련 중에 있으십니까? 시련의 시기는 결코 낭비가 아니라 무한히 값진 시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견디기 어렵더라도 원망, 불평하지 마시고, 욥과 같고, 아브라함과 같이,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시련의 시기를 여러분의 삶에 더없이 유익한 기회로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인내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인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터득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운동선수들을 보세요. 그들은 반복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웁니다. 이는 우리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연단을 받은 사람을 보면 웬만한 시련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만큼 많은 연단을 받아 인내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마쳤을 즈음에,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모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40년 광야생활은 매일같이 연단의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고질적인 약점은 인내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참고 기다릴 줄을 모르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고 이 백성을 해방시켜주셨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으며,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토록 경험하였으면,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기적을 체험할 때만 기뻐하고, 역경을 만나면 즉시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복을 누리려면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연단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인내가 부족해서 다가온 좋은 기회를 선용하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음을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기 원하시거든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아하,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게 하시려는 것이구나.” 생각하시고, 결심을 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받게 되는 복된 결과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주장이 강하였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처럼 자기의 기준을 남에게 적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회심한 후에,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 때,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가 동행하였는데, 유약한 마가는 전도여행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중도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얼마 후에,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처럼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이 일로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인생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던 바울의 태도를 칭찬할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헤어진 후에, 가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서 마가는 연단을 통과하여 매우 유능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으로 헌신하였고, 사복음서 중 하나인 마가복음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도 바울 역시 이해심 많고 인자한 성품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시련을 받는 가운데서 모난 부분이 깎이고 다듬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는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단지 시련을 극복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고,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인격이 원만하게 다듬어지는 기회로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주님께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에 우리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주님으로부터 상급과 칭찬을 받으려면 인내로써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셋째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평강의 복을 받아 누립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 보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당면한 모진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되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호와 이레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부과하시는 믿음의 시련을 인내로써 통과한 사람들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다가오는 삶의 모든 시련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또 인간적인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 곧 믿음의 인내로써 시련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시련은 어느 정해진 시기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계속해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다르기까지 부단히 연단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믿음의 수준에 따라서 합당한 시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거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로 아시고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고 온전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심으로 온전한 신앙 인격을 구비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설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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