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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슥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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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슥 5:1-6) 

스가랴 1~6장까지는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속에 든 여인은 그 가운데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들은 언뜻 보면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또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있고 무슨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는 환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환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재건하고 나아가 예루살렘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유다백성들 5만 명에서 103명이 부족한 48,997명이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은 전부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까?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전부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해서 정확한 대답을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각 개인은 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영적인 유대인이 있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육적인 유대인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룹바벨 같은 사람은 비록 대제사장이지만 죄가 컸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깨끗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스룹바벨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룹바벨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이유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유대인이나 육적인 유대인이나 다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모두 죄인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심을 받은 영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죄 사함을 주시고 의롭다 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육적인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이것이 스가랴서 5장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백성들 가운데에도 육적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이방인과 혼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족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느헤미야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야십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벽건축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사돈이 되었습니다. 또 암몬 사람 도비야를 위해서 성전에 큰 방을 마련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가운데 참된 믿음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육적인 유대인인 것입니다. 

스가랴 5장에도 유다백성들 가운데 도적질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나님께 거짓된 맹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슥 5:3). 스가랴 5장에 나오는 두 가지의 환상은 하나님은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죄에서도 심판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환상입니다. 

Ⅰ. 여섯 번째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에바라고 하는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있고 하늘과 땅 사이로 들려서 시날 땅으로 옮겨가더라는 말은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엄위한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는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스가랴가 눈을 들어보니까 두루마리가 날아갑니다. 근데 두루마리가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이라고 했습니다. 규빗이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표준 도량형으로는 45cm입니다. 그러니까 두루마리의 크기는 가로가 20규빗으로 9m, 세로가 10규빗으로 4.5m나 되는 거대한 두루마리입니다. 이 두루마리 안팎으로 글이 쓰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루마리는 도대체 무슨 책일까요? 열왕기상 6장 3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성소 앞에 낭실이라고 하는 베란다를 지었습니다. 이 베란다가 성경을 넣는 곳인데 이 베란다의 크기가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입니다. 이 두루마리 크기하고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는 솔로몬 낭실에서 나온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해서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앞뒤로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글자의 내용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란 곧 십계명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한쪽 면에는 도적질하는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팔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 후반부를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거짓 맹세한 것은 삼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즉 이 두루마리의 전반부는 대인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 후반부는 대신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큰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워낙 커서 하늘에 있어도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바로 십계명을 어긴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를 내리신다는 내용을 알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저주가 기록된 두루마리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2장 9~10절을 보니까 에스겔 선지자도 안팎으로 저주와 애가와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0장 9~10절에도 사도요한이 천사로부터 작은 책을 받아먹었는데 그 책은 입에서는 단데 배는 몹시 쓰더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의 글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은 축복된 이야기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는 대신 계명을 어긴 자나 대인 계명을 어긴 자에게 하나님은 일점일회도 틀림없이 저주를 집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집으로 가셔서 나무도 불살라버리고 돌도 불살라버려 그 집을 망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양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이 되고 죄 사함이 되고 축복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경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셔도 자위대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법에 따라서 기록된 죄에 대하여 정확하게 심판하시고 저주를 내리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육적인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3절에 보니까 이 두루마리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신자들에게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다 지키셨습니까? 한 가지만 어겨도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도적질만 해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만 해도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서 한 계명만 어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저주하시고 그 집에 들어가 나무와 돌을 불살라 버리고 지옥에서 영원토록 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무섭기만 하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로 택하신 사람은 나이가 많아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은 저주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율법을 다 어겼는데 나에게 이런 저주가 임한다고? 아이고 무섭구나. 내가 저주에서 어떻게 해방될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기준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겨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들어도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이런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교나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내가 자유의지로 예수를 택하여 믿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건 성경의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에게 죄를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주시고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은 자는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인간은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십계명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와와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우리 속에 죄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한 법을 주어도 지킬 능력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복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20년입니다. 오래 잘 먹고 잘 살아도 120년이면 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하는 복은 죽은 후에도 영생의 복이요, 부활의 복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마음껏 축복을 누리는 영원한 복인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있고 질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율법, 즉 십계명을 어긴 죄에 대한 저주가 그대로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이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의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마시고 대신 저주를 받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Ⅱ. 일곱 번째 환상: 에바 속의 여인 

일곱 번째 환상은 에바 속의 여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다시 환상을 보았는데 에바 속에 한 여인이 들어있습니다. 에바는 큰 그릇입니다. 곡물을 측량하는 기구 가운데 제일 큰 22리터가 들어가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그릇 속에 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로 뚜껑을 만들어서 무겁게 만들어서 이 여인이 못 나오도록 뚜껑을 덮어버리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에바 속에 있는 여인은 뭐냐? 히브리어로 '악'이 여성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가 해석하기를 이 여인은 '악'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어나 히브리어 같은 언어는 명사마다 성이 있습니다. 에바 속에 죄와 악이 싸여가는 것을 에바 속에 여인이 들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졌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하나하나 쌓여가다가 그릇의 양이 다 차게 되면 그때는 심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왕입니다. 선지자가 아합과 이세벨의 악에 대해서 저주했습니다. 개가 너의 고기를 먹고 너의 피를 핥으리라. 

그러나 이 저주는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실행되었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그대로 아합과 이세벨은 결국 개가 고기를 먹었고 개가 그 피를 핥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확실하게 돈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양을 그릇 속에다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꼭대기에 닿으면 그때 심판을 내리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 벌써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의 에바가 가득 차는데 400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내쫓고 애굽의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옮기시겠다는 말씀이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도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마 23:32). 너희 조상들이 에바에 많이 채웠는데 조금 모자라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 너희가 채워서 심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죄를 더하여서 에바 속에 악이 가득 차게 되었고 결국은 A.D.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에 의해서 100만 명이 죽고 국가는 완전히 멸절 당하고 그들은 다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슥 5:7~11).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여기 에바 속에 여인이 들었는데 이 에바 속에 들어있는 여인을 보니까 학 같은 날개가 있고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누구일까요? 학자들은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라 이름도 여성이기 때문에 두 여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A.D. 70년대 세계를 지배하던 문명은 헬라와 유대문명입니다. 이 두 가지 세력들이 결국 악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로 들어 올려서 시날 땅으로 옮겼더라는 것입니다. 시날 땅이라는 것은 창세기 10장 10절에서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바벨론을 만든 땅입니다. 시날 땅은 우상 숭배와 불신앙을 상징하는 땅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재앙이 다 차니까 결국 가나안 땅에서 뽑혀서 우상숭배의 땅으로 다 흩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져서 거기다 집짓고 정착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1948년 일부는 돌아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는 불신앙 시날 땅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유대인의 국가로서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도 그 양을 측정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이든 죄악의 양이 다 차게 되면 나라에 재앙이 오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즉시 오지 않는다고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백성들은 결국은 에바에 악이 점점 빨리 차서 심판도 빨리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스가랴 5장의 두개의 이야기는 1~5절까지는 개인을 심판한다는 것이고 6~11절까지는 불신앙하는 국가를 심판하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죄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심판하시고 국가적인 죄에 대해서도 그 양이 차면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함을 주시고 이런 백성들이 많은 나라를 향해서는 축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고 기도하는 백성이 많은 나라,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잘 삽니다. 그런데 우상숭배가 심하고 복음이 들어가도 이상하게 변질된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은 별로 잘 살지도 못하고 나라에 재앙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많은 나라, 기도하는 백성이 많은 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많은 나라에 대해서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다윗의 가지에서 나온 순 일곱 눈을 가진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죗값을 모두 지시고 저주를 모두 십자가에 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1920년대 미국의 제 30대 대통령인 켈린 쿨리쉬라는 사람은 말이 짧기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교회를 다녀오니까 사모님이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설교했습니까?” 그러니까 “죄” 한마디로 대답하고 더 이상 설명이 없자 또 물어봤습니다. 
“죄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반대하신다네.”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가랴 5장은 하나님이 개인적인 죄도 반대하시고 국가적인 죄도 반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에서 해방된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도 죄를 반대하고 교회적으로도 죄를 반대하고 국가적으로도 죄를 반대하여 개인적으로도 성결을 이루고 교회적 국가적으로도 성결을 이루며 살아야겠습니다.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주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누구 공로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믿으십시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스가랴 4장은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말씀이며 우리가 성결을 이루게 되면 우리 영혼이나 교회나 우리 대한민국에 하나님이 성령을 지속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위대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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