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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잘 믿으세요! (삼하 5:1-5, 9-10, 막 6:1-13, 고후 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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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잘 믿으세요! (삼하 5:1-5, 9-10, 막 6:1-13, 고후 12:2-10)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오늘은 오순절 후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저는 마가복음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막 6: 1-6절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1절로부터 6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고향에서 배척당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7절로부터 13절 말씀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세상에 파송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따로 떼어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뚜렷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말씀은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박대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몇몇 병자들에게 안수하셔서 고쳐주신 것 외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6절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달리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하러 세상에 나갔을 때에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제자들은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항상 성공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에는 너무 처절하게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실패라는 것이 가장 믿었던 곳에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랬지요. 가장 잘 믿고 예수님을 도와주어야 할 고향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 역시 가장 기대를 많이 거는 곳에서 어이없는 일격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가장 잘 믿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믿지 않습니다. 남들이 볼 때 저 사람들은 예수를 굉장히 잘 믿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잘 안 믿는다는 말씀이지요. 
       
영락교회를 크게 일으켜 세웠던 한경직 목사님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교계의 중진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해서 머물고 계시던 남한산성에 병문안을 갔습니다. 방문자 중에 한 분이 “모처럼 이렇게 교계의 중진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 마디만 해주세요.” 하고 청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참 골똘하게 생각하더니만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간곡하게 당부했습니다. 그 때 나름대로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라고 자부했던 목사님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한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가장 잘 믿을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한목사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향무정, 매정한 고향 사람들>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듣고서는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니까 한 마디씩 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달라진 모습에 다 놀랐다는 말이지요. 이런 질문들 속에는 뭔가 예수님을 깔보는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깔보는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3절에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 몰라서 다 놀랐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에는 대개 아무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컨대 베드로를 소개할 때 ‘바 요나 시몬’(마 16:16)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아비도 없는 후레자식, 사생아라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게다가 목수라고 했습니다. ‘목수’는 헬라어로 ‘tekton’인데 ‘건축업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 나무뿐만 아니라 돌이나 철로 건물을 짓는 사람들을 ‘tekton’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직업인 목수직은 그 당시 하층계급에 속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 질서가 있었던 것처럼 유대 사회에서도 아주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하층민 출신인 예수님이 뭔가 위대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수많은 상류층 인사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의 출신성분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최하층 출신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믿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최측근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쉽게 예수님을 배척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가장 적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죽마고우가 벼락출세를 하면 쉽게 깎아내립니다. 그 옛날 누런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 되면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폄하하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부목사로 한 십년 동안 계시다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의 가장 큰 고민은 장로님들을 비롯한 중직들이 옛날과 같이 부목사님처럼 대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담임목사가 되었으면 그 권위를 인정해야 마땅한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 하고 이름을 날리던 분들은 더더욱 이런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고등학교 때 사고나 치고 공부도 못했던 친구가 유명한 사회 인사가 되면 그 분의 형편없었던 옛날이야기만 꺼냅니다. 
“쟤 학교 다닐 때 문제아였는데….” 
“쟤 내가 1등할 때 내 뒤에 있던 얜데.…” 

이런 편견은 어떤 사회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자라났고 그 집안 사정을 뻔히 아는데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니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수준에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기들을 저 멀리 뛰어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생각만 하고 출신성분을 따지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동네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고서는 얼마나 서운하셨던지 이런 탄식을 하십니다. 4절을 보세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참으로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열렬히 환영해야 할 사람들이 가장 격렬하게 배척한다는 것이지요! 


<포장지냐? 내용물이냐?>
       
여기서 우리는 잠시 포장과 내용물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신학생 시절 가스펄 찬양단 멤버로 활동하면서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어떤 교회의 보수적인 교인은 찬양단 멤버 중에 턱수염을 기르거나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찬양단 사역자는 모름지기 이러해야만 한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턱수염을 기르거나 기타 연주를 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목사님이 신학생 시절 그 찬양단 멤버로 활동할 때 턱수염을 길렀고 기타를 둘러메고 기타 연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 보수적인 교인은 단지 한 멤버의 외양 때문에 복음의 내용을 거부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포장만 보고 내용물은 뜯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복음을 전해주는 메신저 때문에 메시지를 거부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도 모름지기 교회는 마땅히 이러해야만 한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교회에서 연주하면 안 된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겠지만 옛날에는 교회에서 드럼을 치고 기타를 치고 북을 두드리는 것을 반대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포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포장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이 시원찮으면 포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포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내용물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보다 메시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미국 서부 지역의 명문대인 스탠포드 대학교의 설립자 리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부부는 본래 하버드에 다니다가 요절한 자기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큰 재산을 기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버드 총장이 스탠포드 부부의 허름한 외모만 보고서는 소홀하게 대하는 바람에 기증을 단념하고 전 재산을 스탠포드 대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부모가 변변치 못하고 직업이 시원찮다는 이유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메신저의 외모만 보고서는 메시지를 거부했던 것이지요! 포장지만 보고서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한 때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되고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였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명설교가들이 담임목사로 거쳐 간 훌륭한 교회였지만 미국의 주류 교회가 쇠퇴하는 동안 이 교회 역시 교인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수천 명이 모이던 그 교회가 노인들만 겨우 50여명 남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목사님이 오신 다음부터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에 4-500명이 모이는 힘찬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를 방문해서 교회 직원 한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직원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만 새 목사님의 리더십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방문자 목사님이 도대체 어떤 리더십으로 이렇게 죽어가던 교회가 활발하게 살아나게 됐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새 목사님이 교인들을 가르칠 때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단 여섯 글자로 요약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그 여섯 글자가 무엇이냐고 다그쳐 묻자 그 직원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I am God and you’re not.” 영어로 딱 여섯 글자이지요. “내가 하나님이지 너는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이 간단한 표현으로 요약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 옛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교회가 형편없이 쇠퇴하는 것을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빨리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예수를 가장 잘 믿어야 할 터인데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이고 목사님 가정, 장로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예수님과 교회에 가장 덕을 많이 봤으면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았던 것처럼 교회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교회를 멀리하는 아이러니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포장만 보지 말고 내용물을 중시해야 합니다! 메신저만 보지 말고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화려한 전통만 자랑하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더욱 더 잘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 높이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초라한 모습을 가졌어도 큰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들어 쓰셔서 전부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사무엘하의 말씀을 보면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들판에서 양이나 치는 꼬마 목동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던 사람이 이스라엘 최고의 영웅군주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큰 믿음만 있으면 오늘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봉독한 고후 12: 10절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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